[클래식 카페] '세 남자와 나'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은 가을로 가득 찬 밤하늘을 노래하며 시작한다. 그 밤하늘은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소학교 시절 벗들의 이름을 추억하고, 무수한 별들을 가로질러 가장 아름다운 이름, '어머니'라는 별에 닿는다.

윤동주 시인이 아스라이 먼 별을 헤며 밤을 지새우기 100년 전,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린 다른 청년은 향수를 오선지에 그려 넣는다.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쇼팽은 스무 살 가을, 음악가로서 지경을 넓히기 위해 폴란드를 떠나기로 한다. 그해 여름 열렬히 짝사랑한 성악가 콘스탄틴을 생각하며 작곡한 것이 피아노협주곡 1번이다. 이번 쇼팽 콩쿠르 결선에서 조성진이 연주한 바로 그 곡이다.

이 곡은 1830년 10월 바르샤바 고별 연주회에서 쇼팽이 직접 연주한 곡이기도 하다. 그는 그것이 폴란드 땅에서 하는 마지막 연주가 되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쇼팽이 태어난 1810년 폴란드는 이미 유럽의 지도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폴란드를 둘러싼 강대국인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폴란드 영토를 분할해갔다. 쇼팽이 떠난 다음 달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에 대항해 봉기했고 정치적 이유로 쇼팽은 죽어서야 그의 심장만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쇼팽이 40년 인생 중 절반을 파리에서 보냈는데도 폴란드인에게 불멸의 민족음악가로 사랑받는 이유는 그의 음악 속에 폴란드가 흐르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이후 19세기 유럽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로 뜨거웠다. 쇼팽 역시 폴란드의 민속춤인 마주르카와 폴로네이즈의 리듬과 멜로디를 음악 속에 녹여냈다. 지도상에서 사라진 폴란드는 쇼팽의 악보 안에서 선명하게 살아있었다.

쇼팽의 음악을 또 다른 그리움으로 승화한 연주가가 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주인공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이다. 나치 정권은 폴란드를 점령한 뒤 오랜 시간 그 땅에서 폴란드인으로 살아온 유대인을 학살한다. 스필만은 '시대의 쇼팽 연주자'로 각광받은 '천재 피아니스트'였지만 전쟁은 하루아침에 그를 단지 '유대인'으로 낙인찍는다.

▲ 홀로코스트의 무참한 폭력도 굴복시킬 수 없었던 주인공의 참된 정체성이 드러나는 순간. ⓒ 영화 <피아니스트> 화면 갈무리

폐허가 된 동네에서 나치의 눈을 피해 가까스로 목숨을 이어가던 어느 저녁 그는 독일 장교에게 발각된다. 세련된 피아니스트의 모습이 아닌 노숙자보다 더 추레한 몰골의 그가 피아노 앞에 앉아 적을 마주한 채 연주를 시작한다. 피아니스트와 피아노 위에 희미한 빛이 내리고 쇼팽 발라드곡 1번의 선율이 정적 위로 흐르며 기어코 삶과 죽음 사이 팽팽한 긴장감마저 압도해 버린다. 참혹한 전쟁이 짓밟아 버린 인간성이 다시 한 번 꿈틀거리는 순간이다.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그들의 정체성은 유대인과 독일인이 아닌 온전한 피아니스트와 관객이다. 스크린을 통해 그 장면을 보는 관중의 마음에는 폭풍 같은 그리움이 휘몰아친다. 그것은 우리 영혼 깊숙이 내재한 자유와 평화에 대한 그리움, 아름다움에 대한 그리움, 인간다움에 대한 그리움이다.

윤동주, 쇼팽, 스필만. 이들은 모두 시대의 한계 속에 살며 괴로워했다. '별 헤는 밤' 속의 시인은 불쑥 자신의 이름을 땅에 쓰고는 이내 흙으로 덮어버린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시간을 거꾸로 가로질러 그 밤 그의 옆에 벗이 되고 싶지만 나는 그저 시인의 독자일 따름이다. 바람이 알리는 공기의 존재를 새삼스레 느끼며 나란히 앉아있고 싶지만 그렇다고 변하는 것은 없을 터. 봄이 오고 그 위에 무성한 풀들이 자라나기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단지 위로가 되는 것은, 흙으로 덮어버린 그 이름이 이제는 시를 읽는 독자의 가슴 속에 별처럼 박힌다는 사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그리울 때는 그리워하는 수밖에.


영화와 게임이 대세인 시대에 음악을 얘기하는 [클래식카페]를 <단비뉴스> 한 구석에 엽니다. 혁명의 시대를 불꽃처럼 살다 간 모차르트, 영웅의 출현과 몰락을 지켜봐야 했던 베토벤, 히틀러와 독일국민을 열광시킨 바그너와 푸르트벵글러, 약소국가 핀란드와 폴란드의 민족주의에 불을 지른 시벨리우스와 쇼팽, 그리고 클래식이 된 대중가요와 아이돌음악까지…… 기사 속 곡명을 클릭하면 음악이 흐르는 이 카페에서 음악은 인생과 역사, 그리고 글쓰기와 결합됩니다. (이봉수)

편집 : 이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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