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김수진

아르테미시아는 17세기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서양미술사에서 최초 여성화가로 손꼽히는 그녀는 어린 시절 실력이 탁월했는데도 미술학교 입학을 거부당했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화가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안타까운 마음에 자신의 동료 타시를 딸의 스승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는 아르테미시아에게 흑심을 품고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 그녀는 재판을 통해 진실을 폭로하려 했지만, 세상은 오히려 그녀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 아르테미시아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왼쪽)와 신정아 씨의 <4001>.

동서고금의 스캔들은 거의 다 남녀 사이에서 일어났지만, 스캔들의 피해자는 대개 여성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스캔들에 연루된 여성은 '조신하지 못하다' '처신을 잘못했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최근 일련의 사건도 마찬가지다. 언론은 '상하이 스캔들' 보도에서 ‘처신을 잘못한’ 남성 관리들의 사진은 모자이크 처리하고 익명을 사용한 반면, 덩 여인의 사진은 거의 그대로 드러냈다. 2007년 불거진 신정아 씨 사건도 마찬가지다. 사건의 본질은 학력위조였지만, 언론은 신정아 씨가 고위 관리와 나눈 불륜을 비롯한 그녀의 사생활에 초점을 맞췄다.

최근 그녀가 발간한 수기는 이런 분위기에 '맞불'을 놓는다. 종전 ‘신정아’들이 가슴에 ‘주홍글씨’를 새긴 채 살아가야 했던 모습과는 다르다. 언론에서 부정적으로 묘사한 여성인데도 적극적으로 자기변호를 하는 모습이 당차 보인다. 하지만 그녀 역시 '남성중심적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쉽다. 그녀는 자신의 여성성에 시선을 빼앗겼던 유명 남성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복수를 한 듯하지만 그것 역시 남성중심적 시선의 확장에 기여하고 말았다.

▲ 김수진 기자
그 대신 왜 그토록 고학력이 필요했는지 고백하며, 실력보다 학력 위주로 돌아가는 한국사회를 고발했더라면 어땠을까? 혹은 미술계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그 바닥의 생리, 곧 전시나 비평의 패거리주의, 미술시장의 상업성 같은 이슈들을 용감하게 폭로했더라면, 그토록 소망했던 ‘새로운 신정아’로 다시 태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400여년 전, 아르테미시아는 그 일을 해냈다. 그녀는 모진 고문을 이겨내며 일곱 달 지속된 재판에서 진실을 밝혔다. 몇 년 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라는 잔혹하게 아름다운 작품으로 멋지게 정서적 복수를 완성했다. 실력을 인정받아 왕실화가가 되는 영광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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