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스쿨 문사철특강] 이주헌 미술평론가
주제② 서양미술의 정신과 태도

논쟁 중시 문화 속에 사실주의 발달

"동양인은 개인의 자율성보다 관계를 중시했습니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논쟁을 중시했지요. 끊임없이 비판하고 수정하며 타인을 설득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설득은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구체적이고 사실적이어야 가능합니다. 또한 서로를 인정해야 하고요. 그래서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이 중시됐습니다. 이런 성향은 서양 미술에도 나타납니다."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틴토레토의 <은하수의 기원>을 보여주며 설명을 이어갔다.

▲ 틴토레토 <은하수의 기원> 헤라의 젖이 분수처럼 하늘로 솟구치며 ‘젖의 길’, 곧 은하수를 만들었다. 땅으로 떨어진 헤라의 젖은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이 되었다.

보다시피 신인데도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아주 사실적인 사람의 몸을 보여주고 있죠. 주제도 인간적입니다. 신이 바람을 피우고, 그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도망을 다니는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서양미술은 이렇게 인간을 표현하는 것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그는 <은하수의 기원>이 서양미술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말했다. 은하수의 기원은 얼핏 보면 평범한 식구의 단란한 모습이다. 하지만 아기를 안고 있는 남자가 제우스, 젖을 물리는 여인은 헤라, 그리고 힘차게 젖을 빨고 있는 아기는 헤라클레스다. 이를 쉽게 알 수 있도록 헤라의 공작새, 제우스의 독수리, 헤라클레스의 번개와 같은 상징물들이 적절한 위치에 배치되어 있다. 그림이 전하는 아름다움을 즐기는 한편으로 숨은 그림 찾기와 같은 상징물을 찾아내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캔버스가 좁아 불만이었던 작가들의 묘수가 아니었을까?

서양 화가들은 무언가를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래서 상징은 물론 사실적 묘사나 감각적 묘사가 발전하게 됐죠. 조화와 절제, 여백을 중시하며 예스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우리와 대조되는 부분입니다.”

▲ 사람의 심리를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는 <깔레의 시민>.

너무나 인간적인 군상  <깔레의 시민>

"서양 미술은 인간 심리를 작품에 잘 반영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 미술에서 사람의 표정을 이렇게 생생하게 묘사했던 적이 있었나요. 비교적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 풍속화의 경우도 웃고 우는 모습 정도의 추상적 표현에 그치는 게 대부분이고, 생생한 삶의 표정을 그린 것은 드물었죠. 서양 미술에서 특히 발달한 장르가 역사화입니다."

<깔레의 시민>에 조각된 여섯 인물은 약 600년 전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있었던 100년 전쟁 당시 영웅들이다. 영국에 끈질기게 대항했지만, 결국 항복해야 했던 깔레시민들은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영국왕은 항복한 자의 목숨을 살려주는 게 다른 도시를 점령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시민들을 살려주기로 한다. 대신 조건을 붙였다, 대표 6명을 처형하겠다고.

6명을 어떻게 뽑아야 할지 고민에 빠진 깔레시는 결국 시민들의 자원에 맡기기로 합의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시에서 가장 부유한 자, 덕망 있는 자, 영향력 있는 자들이 앞 다투어 나왔다. 용기 있게 자원했으나 죽음을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울 수는 없는 일. 수의를 입고 목에 밧줄을 맨 채 시민들의 전송을 받으며 영국왕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의 심리는 로댕의 조각에 매우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앞장선 이의 결연한 표정은 신념의 인간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꽉 쥐고 있을 것 같은 그의 손이 힘없이 풀려 있다. 모든 것이 끝이라는 허망함과 죽음 앞의 두려운 마음을 완벽히 숨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피땀 흘려 지켜온 성문의 열쇠를 넘겨줘야 하는 이는 입을 꽉 다물고 있다. 울분이 치솟는 마음은 열쇠를 쥐고 있는 그의 손에서 표현된다. 뒷 사람에게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다며 돌아보지 말라고 애원하는 이의 속삭임, 완전히 넋이 나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이의 얼어붙은 몸동작, 머리에 손을 갖다 대며 고뇌의 표정을 짓는 모습. 이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로댕의 표현력은 탁월함을 넘어 조각에 혼을 불어넣은 것 같다고 이주헌 평론가는 설명했다.  

▲ 서양 미술 작품들을 사진으로 보여주며 강의를 하고 있는 이주헌 평론가. ⓒ 이태희

인간사와 인간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역사화는 서양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로 평가 받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자주 그렸던 풍경화, 특히 정물화는 서양에서 별로 중요한 장르가 아니에요. 생명이 없기 때문이죠.”

인간중심적인 서양미술. 인간중심적이라는 것은 세계와 맥락으로부터 인간을 분리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의 말을 빌리면 서양은 저맥락(Low context)사회이다. 저맥락 사회는 커뮤니케이션이 직설적이고 명료하다. 또한 자기의사를 분명히 밝힌다. 이런 서양의 태도는 사람을 사회나 다른 인간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이주헌 평론가는 말했다.

자궁속 아기까지 보고 싶어 했던 다빈치

논쟁을 중시하는 문화가 사실주의 미술을 발달시켰습니다. 관객이 비판을 하면 화가는 다시 관찰하고 수정했지요. 비판-수정-비판-수정하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사실주의를 고도화했습니다.”

서양 미술의 두드러진 특징인 사실주의는 논리가 발달하고 정치가 시작된 그리스에서부터 출발했다. 사실을 보다 완벽하게 구현하고자 했던 화가들의 집념은 대단했다. 다빈치의 해부도를 보면 엄마의 자궁 속에 아기가 들어있는 모습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자궁 조직, 내장 조직이 그려진 것을 보면 화가가 실제로 해부를 해보지 않고는 불가능한 작업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당시 화가들은 해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의사들조차 교회의 허락 아래 해부를 할 수 있었던 가톨릭 사회에서 화가가 쉽게 할 수는 없었다. 다빈치는 그를 아꼈던 교황이 몇 번 눈치를 주다가 최후통첩을 보낸 뒤에 해부를 그만두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미켈란젤로의 작품 속 인물들도 뼈와 근육이 살아 움직일 것만 같아 보이는데, 그도 남몰래 30구 정도의 시체를 해부했다고 한다. 서양 화가들이 사실주의를 대하는 태도가 그 정도였다고 이주헌 평론가는 설명했다.

진화의 결과인 곤충의 의태는 자연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살아있는 사실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환영을 창조하는 행위, 눈을 속이고 나면 마음은 쉽게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백문이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거죠.”

우리 미술은 개인보다 관계를 중시

그러나 우리 미술은 사실을 넘어선다. 개인의 자율성보다 관계를 중시했고 맥락을 따졌다. 그리스인의 행복이 자신의 재능을 자유롭게 발현하는 것이라면 동양인의 행복은 화목한 인간관계를 맺고 조화롭게 사는 것이다. 1인칭 시점을 지닌 서양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지만, 동양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자기에게 투사해서 3인칭 시점에 익숙하다. 자신감 넘치는 표현보다 겸손한 표현을 선호하고, 대상을 해부하고 정복하듯 바라보기보다는 마음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물아일체를 지향한다. 오히려 예스럽고 서툰 것에 미의 가치를 둔 것이 바로 우리 미술이다.

우리나라에선 화가가 환쟁이라 불리고 예술은 잡기였습니다. 군주나 선비에게 완상 취미는 경계해야 할 것이었으며 감각을 추구하는 것은 허상을 탐닉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서양에선 감각을 재능으로 인정했으며 고도의 감각은 고도의 지성으로 보았어요. 와인 맛을 감별한다든지, 훌륭한 미술품을 알아보는 것 모두 고도의 감각을 필요로 하며 고도의 감각은 뛰어난 직관력과 통찰력을 낳습니다.”

▲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아름다운 비너스의 피부는 바다의 옥빛과 대조되어 더욱 뽀얗다. 옆으로 누워 있지만 가슴은 정면을 향한다. 그녀의 ‘S라인’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에로틱한 이 포즈는 바로 관객을 위한 것이다.

서양미술은 감각에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그것은 관능을 중시하는 것으로도 이어진다. 무엇보다 그림을 감상하는 관객들이 보고 즐길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인간 중심적이었기에 인간의 감정에 충실했고, 사실적이고 감각적이었기에 에로스의 절정까지 묘사했다.

이 시대의 지식인은 감각이 뛰어난 사람

서양 미술의 바탕에는 우리문명과 다른 서양문명의 정신과 태도가 있었습니다. 그 핵심에 인간중심적인 개인이 있었고요. 개인은 논쟁을 중시하는 문화를 낳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화는 인간중심적인 미술, 감각적인 미술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발달시켰습니다.”

이주헌 평론가는 지혜로운 사람은 선견을 가진 사람이고, 그렇게 되려면 감각을 예리하게 벼려야한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시대의 지식인은 몰입할 줄 알고, 몰입에서 얻는 감각이 남보다 뛰어난 이가 아닐까. 강의를 들은 뒤 그림을 자주 감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쩐지 그림이 말을 걸어오고, 주눅 든 내 상상력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저널리즘스쿨특강은 <인문교양특강> <사회교양특강> <저널리즘특강> <문사철특강>으로 구성되며, 매 학기 번갈아 개설되고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서울 강의실에서 일반에 공개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거야말로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학기 <문사철특강>은 도종환, 김진석, 한홍구, 이권우, 이주헌, 장승구 선생님이 맡았는데,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를, 강의를 함께 들은 담당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가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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