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농업이슈] 인왕산 자락 순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성은 어디일까? 한양도성이다. 흔히 중국의 시안성을 떠올리기 쉽지만 시안은 현재 수도가 아니라서 도성이 아니다. 한양도성은 시대별 건축양식을 알 수 있어 201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조선이 건국된 1392년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700여년간 한양도성은 무엇을 꿈꾸고 어떤 것을 보았을까?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농업농촌문제세미나’ 수강생들은 지난 3월26일 김형배 문화유산해설사와 함께 한양도성길을 걸었다.

불교국가 수도 개성에는 없던 시설물들

“백성을 위하지 않으면 군주가 못 된다. 이것이 주자학의 이념입니다. 개성 송학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길 때 제일 먼저 한 것은 왕을 성리학의 이데올로기에 가둔 겁니다.”

한양은 유교적 철학으로 세운 철저한 계획도시였다. 맨 먼저 사직과 종묘를 세웠다. 국토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제단을 짓고 선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만들었다. 불교국가 고려에는 없던 시설이다. 그 다음 풍수지리에 맞게 궁궐을 배치하고 유교 철학으로 이름을 붙였다.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에 따라 북악산을 등지고 한강을 바라보는 곳에 경복궁을 지었다. 경복궁에서 한강을 바라보면 동쪽에 낙산, 서쪽에 인왕산이 있다. 남쪽에 오늘날 남산으로 부르는 안산이 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곧 인의예지신을 4대문 이름에 붙였다. 동대문인 흥인지문(興仁之門)에는 인(仁),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에는 의(義),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에는 예(禮), 북대문인 홍지문(弘智門)에는 지(智), 가운데 세운 종루인 보신각(普信閣)에는 신(信)이 들어갔다. 그 안에 왕을 거주시켜 건축적 의미뿐 아니라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도록 했다. 흥인지문만 이름이 네 글자인데 좌청룡을 이루는 낙산이 너무 낮아 이를 보강하기 위해 산맥처럼 생긴 갈 지(之)자를 덧붙였다고 한다.

친일과 항일의 역사를 간직한 근대문화유산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경찰박물관을 지나 강북삼성병원에 도착했다. 나무 모양 축대 위에 아크릴판이 덧대어져 있다. 돈의문 터 표지석이다. 문은 물론이고 성곽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1899년 대한제국은 서대문과 청량리를 잇는 전차길을 놓으면서 동대문과 서대문 부근 성곽 일부를 허물었다. 이듬해는 용산과 종로 사이를 개통하면서 남대문 부근을 철거했다. 일본 황태자가 방문하는데 통과할 수 없다며 남대문도 허물었다. 서울이 마구잡이로 개발되면서 평지에 있는 성곽은 대부분 소실됐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이 활동한 공간이자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경교장. ⓒ 하상윤

표지석을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면 병원 건물에 포위된 듯한 베이지색 건물이 보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들이 활동한 공간이자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경교장이다. 근처에 다리가 있다고 해서 이름에 다리 교(橋)자가 붙었다.

고동색 나무 바닥에 벽에는 황토색 벽지가 발라져 있다. 지은 지 오래된 가정집에 들어가는 기분이다. 지하 1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꾸몄다. 1층에는 응접실과 식당, 2층에는 김구 선생 집무실과 임시정부 요인 숙소가 있다.

김구 선생은 생전에 ‘신기독’(慎其獨)이라는 글씨를 두루마리에 적어 집무실에 걸어뒀다. 혼자 있을 때도 삼가라는 뜻이다. 이 말은 퇴계 이황 선생의 말에서 유래했다. 퇴계가 여름날에도 의관을 바로 하고 책을 읽자 형이 옷을 벗고 시원하게 앉으라고 했다. 그러나 퇴계는 혼자 있어도 천 명 사이에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며 ‘신기독’이라는 글귀를 남겼다.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취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던 김구 선생의 정갈함과 이어진다.

서거 당시 입었던 조끼적삼도 전시돼 있다. 앞섶과 겨드랑이에 피가 튀어 있고 응급처치를 하느라 소매를 찢은 자국이 선명하다.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은 미군방첩요원 안두희의 총에 서거했다. 김구 선생이 위원장으로 있는 한국독립당의 당원이라 아무 의심 없이 면회를 시켜준 것이 화근이었다. 김구 선생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있었다. 김구 선생이 작고하자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이 득세했다.

“김구도 반공주의자입니다. 그 사람은 중요한 건 연공하자고 했어요. 조선혁명당이라든지 독립당, 독립동맹 김두봉과 연합했어요. 김구 선생의 서거는 반공주의자들이 반공주의자를 죽였다는 점에서 모순된 역사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홍난파와 UPA통신기자의 다른 행로

서울시교육청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가곡 ‘봉선화’와 ‘고향의 봄’ 작곡가인 홍난파 선생의 가옥을 만난다. 홍난파는 이 2층집에 1935년부터 작고한 해인 1941년까지 살았다. 그는 이 무렵 친일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음악협회에 가입해 활동한 사실 등이 밝혀져 친일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 항일운동에 가담한 적이 있고 민족 정서를 잘 드러낸 노래도 많이 작곡했는데, 이에 견주어보면 그의 말년 행적은 더욱 안타까움을 준다.

▲ 홍난파 가옥은 1930년대 독일 선교사가 지은 서양식 건물을 홍난파 선생이 인수해 살던 곳으로 1930년대 서양식 주택 특성이 잘 보존되어 있다. ⓒ 하상윤

오르막길을 조금 더 걷다 보면 항일과 관련된 붉은 벽돌집이 보이는데, UPA통신 기자 앨버트 테일러의 집이다. 집 이름은 힌두어로 딜쿠샤, 곧 ‘즐거운 마음’이라는 뜻이다. 연극배우였던 테일러 부인이 세계 순회공연을 할 때 방문했던 인도의 궁전 이름을 본떴다.

앨버트 테일러는 항일운동사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사람이다. 세브란스병원에서 3.1운동선언문이 인쇄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한 일본 경찰이 병원을 압수수색하자 간호사가 미국인 병실에 선언문을 숨겼다. 테일러는 기지를 발휘해 아이 유모차에 선언문을 감춰 검문검색을 통과했다. 선언문은 도쿄로 반출돼 3.1운동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서울시는 그 공로를 높이 사 2006년 앨버트 테일러와 아들 브루스 테일러에게 명예시민증을 부여했다.

▲ 외신기자 앨버트 테일러의 집, '딜쿠샤' 에는 저소득층 가구가 쪽방처럼 공간을 쪼개 살고 있다. ⓒ 하상윤

켜켜이 쌓인 역사의 흔적

인왕산 입구에 이르자 도성길이 길게 나 있다. 한양도성은 1396년 조선 태조 때 장정 12만 명을 동원해 만들었고 세종과 숙종 때 보수공사를 했다. 지은 시기에 따라 성벽 모양이 달라 비교해가며 보는 재미도 있다. 제일 아래 납작한 갈색 돌들은 태조 때 쌓은 것이고 둥글고 큼직한 주춧돌 위에 쌓은 돌들은 세종 때 쌓은 것이다. 벽돌처럼 쌓아 올린 것은 19세기에 발달한 기법이다.

성벽 위에는 ‘여장’이라고 하는 낮은 담장을 쌓아 방어와 공격에 활용했다. 세로로 길게 구멍을 터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제압했고, 작은 구멍을 통해 총을 쏘았다. 성곽을 누가 쌓았는지 알아보는 것도 흥미롭다.  하늘 천(天)에서 조상할 조(弔)까지 천자문 글자 수대로 성곽을 97개 구간으로 나눴다. 구간별로 군현을 지정해 그 지역민이 책임지고 성을 쌓게 했다. 성곽 밑에는 축성을 지휘한 수령 이름을 적고 성이 무너지면 책임을 물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공사실명제다.

▲ 인왕산 고개마루에서 내려다 본 성곽길. ⓒ 하상윤

인왕산공원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려는데 청와대 경호요원인 듯한 남자가 일행을 불러 세운다. 어디로 가느냐는 말에 김형배 해설사는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라는 듯 수성동계곡으로 간다고 짧게 대답했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북한 특수부대원 33명이 청와대를 공격하려 했다. 지금 청운동까지 침투해 총격전을 벌이다 인왕산과 북악산 등지로 도주했다. 1.21 사태 후 북악산 도성길은 25년간 폐쇄됐고 주변 경비가 삼엄해졌다. <조선일보> 해직기자였고 <한겨레> 논설위원이기도 했던 김형배 해설사는 전두환 정부 시절 엄혹했던 이야기를 풀어냈다.

“전두환 때는 항상 골든박스가 있었어요. 오른쪽 맨 위에 제호가 있고 왼쪽 위에는 항상 대통령 사진이 들어가는 거지. 기사를 이렇게 썼어요. ‘전두환 대통령은 몇 월 몇 일 태릉선수촌을 방문해 축구선수들을 격려하고 선수들에게 “축구는 골을 많이 넣어야 이기는 경기”라며 골을 많이 넣도록 지시했다.’ 웃기는 기사거든.”

겸재 정선의 산수화를 재현해놓은 풍경들

수성동계곡에서 바라보는 인왕산은 겸재 정선의 인왕재색도를 현실에 재현해놓은 듯하다. 바윗돌 사이를 흘러내리는 냇물과 돌다리는 역시 겸재의 그림인 ‘수성동’(水聲洞 )을 그대로 빼 닮았다. 이곳에는 옥인아파트가 들어섰다가 2010년 철거하면서 수성동 계곡이 발굴돼 원형에 가깝게 복원됐다. 그림 속 다리가 바로 기린교다. 빗물이 바위 사이를 비집고 내려가는 소리가 기린이 우는 소리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긴 돌 2개를 나란히 놓아 만든 이 다리는 돌을 통째로 쓴 옛 다리 가운데 제일 길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는 기린교를 건너며 ‘수성동에서 빗속에 폭포를 보고’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 겸재 정선의 '수성동'(왼쪽)과 현재 수성동 계곡의 모습(오른쪽)을 비교하면 돌다리와 계곡의 모습이 닮았다. ⓒ 하상윤

옥인동 골목길을 걸어 내려오는데 오밀조밀한 집들이 담도 없이 붙어 있다. 청와대 근처라 경비가 삼엄해 굳이 담이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청와대와 가까운 효자동은 물론이고 500m 이상 떨어진 통의동까지 건축규제가 극심했다. 옥상을 수리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했고 옥탑을 만들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도 효자동을 지나는 사람들은 경찰의 검문을 받곤 한다.

작은 것이 아름다운 동네

그러나 골목길과 집들은 너무나 아기자기해 발걸음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밥+’라는 간판을 내건 조그만 식당은 창문에 ‘강아지 안됨, 도둑 안됨CCTV, 담배 안됨, 미원 안됨, 다시다 안됨, 나 윤경이 엄마다’라는 문구를 써놓아 주인의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 옥인동 '밥+'식당의 간판과 식당주인의 자부심이 드러나는 소개 문구. ⓒ 이봉수

근처 통인시장에서는 여기서만 통용되는 엽전을 사서 시장골목을 오가며 음식을 접시에 골라 담아 먹는 특이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마을기업인 통인커뮤니티에서 도시락 카페를 운영하는데 각자 음식을 골라 담는 ‘내맘대로 도시락’을 즐길 수 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인의예지신을 건물에 새겨 정치는 백성을 향해야 한다는 점을 군주에게 일깨웠다. 한양도성은 민본정치과 왕도(王道)정치를 통해 이 나라를 대대손손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했지만 주권을 빼앗기자 성곽도 대부분 헐렸다. 조선왕조와 영고성쇠를 함께한 한양도성과 근대문화유산들을 돌아보며 어떤 측면에서는 왕조시대보다 못한 우리 민주주의의 현주소가 자꾸만 비교돼 마음은 발걸음만큼 가볍지 않았다.


[지역∙농업이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기자•PD 지망생들에게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개설한 [농업농촌문제세미나]와 [지역농업이슈보도실습] 강좌의 산물입니다. 대산농촌문화재단과 연계된 이 강좌는 농업경제학•농촌사회학 분야 학자, 농사꾼, 지역사회활동가 등이 참여해서 강의와 농촌현장실습 또는 탐사여행을 하고 이를 취재보도로 연결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동행하는 지도교수는 기사의 틀을 함께 짜고 취재기법을 가르치고 데스크 구실을 합니다. <단비뉴스>는 이 기사들을 실어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인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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