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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단비발언대] 박기석 기자
2012년 12월 17일 (월) 17:27:29 박기석 기자 pkshaha@naver.com

   
▲ 박기석 기자
핀란드 최초 여성 대통령 타르야 할로넨은 2000년부터 올 2월까지 재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국가청렴도 1위, 국가경쟁력 1위, 학업성취도국제비교 1위, 환경지수 1위가 재임중 이룩된 것이다.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핀란드인 10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녀의 통치 수단은 ‘소통’이다. 주말마다 유명한 핀란드식 사우나를 즐기는데, 실은 시민들과 격의없이 어울리며 민의를 듣기 위한 것이다. 그녀에게 사우나탕은 국민을 만나는 광장이요 시장이다.

우리 정치인들은 시민들 목소리를 직접 듣겠다며 시장이나 광장 등을 자주 찾는다. 선거를 앞둔 요즘 할로넨보다 더 열정적이다. 시장에서 거리에서 군부대에서 매일 유권자들을 만난다. 박근혜ㆍ문재인 두 후보는 같은 날 광화문 광장을 찾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듣는 건 지지자들의 환호와 찬사일 뿐 여론 수렴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의 행보는 ‘또 선거철인가’ 하는 냉소를 자아내기도 한다. 선거 후 180도 변하는 행동 때문이다. 선거만 끝나면 우리 주변에서 정치인 모습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들의 ‘소통’은 원래 자신을 홍보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성은 선거기간만 나라의 주인 대접을 받을 뿐 선거가 끝나면 대통령이 휘두르는 절대권력의 통치대상일 뿐이다.

유럽과 한국에서 서로 다른 취급을 받는 것이 또 있다. 광장이 그렇다. 서구 도시문화는 ‘광장문화’라고 불릴 만큼 광장은 그들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모이다’라는 말에서 기원한 그리스의 ‘아고라’는 광장의 기원이다. 아고라는 시민생활의 중심지였고 그 주변에 시장이 형성되고 사교와 토론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로마의 포럼 또한 주변에 신전ㆍ목욕탕ㆍ시장이 있는 토론과 집회의 공간이었다. 유럽의 광장들은 예나 지금이나 국가와 국민이 소통하는 정치ㆍ종교ㆍ사회ㆍ문화의 중심지로 여겨진다.

반면 한국의 광장은 소통보다 불통의 상징이었다. 한국에서 유럽의 광장 구실을 한 곳은 원래 길거리였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중집회인 만민공동회는 종로 일대에서 개최됐고, 3ㆍ1운동 또한 탑골공원에서 시작돼 거리로 번져나갔다. 유럽의 광장 같은 공간 개념은 자생적으로 발달하지 못했고 도시화 과정에서 계획적으로 도입됐을 뿐이다.

한국에서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최초의 공간은 5.16광장일 것이다. 지금은 여의도공원이 된 5.16광장은 특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박정희의 명령으로 5.16광장은 군사 퍼레이드나 대규모 군중동원을 위한 아스팔트 광장으로 만들어졌다. 거대한 광장에 선 개인은 왜소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때 ‘국민’은 주체적 개인의 집합명사가 아니라 훈육과 통치의 대상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런 전통은 오늘에도 남아 서울광장과 광화문광장도 광장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지는 못하고 있다. 서울시는 2002년 월드컵 응원 이후, 서울광장을 계획했다. 처음에는 시민의 자유로운 소통과 만남의 공간으로 기획됐지만 권력은 그곳을 지배하려 했다. 돌을 깔 계획이었던 광장은 잔디광장으로 탈바꿈했고, ‘잔디 보호’가 광장의 집회를 규제하는 명분으로 등장했다.

시장이 바뀌면서 많이 자유로워지기는 했지만, 권력과 시민의 광장쟁탈전은 선거결과에 따라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휴전 상태일 뿐이다. 권력이 광장을 개방해도 마음을 열지 않으면 광장은 그저 광장의 모습을 한 폐쇄공간일 뿐이다. 한국의 광장들이 원래 주인인 시민에게 영구히 되돌려지는 때는 언제쯤일까? 그것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시민이 진정으로 정치의 주인이 되는 날과 일치할 게 분명하다. 투표도 하지 않고 지배를 허용하는 행위는 노예들이 하던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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