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유성애

▲ 유성애 기자.
감기에 몸살이 겹쳐 꼬박 이틀을 앓고 난 뒤의 제천행이다. 병이 내게도 ‘생의 외경’을 가르친 것일까? 처음 보는 것도 아닌 단풍이 새삼 아름답게 차창밖으로 흘러간다. 가을에는 나무도 사람처럼 마음이 급해지는 걸까? 며칠 만에 보는 산천은 온통 형형색색의 점묘화로 바뀌어가고 있다.

가을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한 쪽에서는 추수와 풍요의 계절이라며 환영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쓸쓸하고 외로운 계절이라며 싫어하기도 한다. ‘존재에 앓고 있다’며 가을마다 칩거한 전혜린처럼 가을을 ‘고독’이나 ‘죽음’의 배경으로 삼은 문학은 또 얼마나 많은가? 가을은 많은 이들에게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그만큼 ‘자족’하는 계절도 없다. 쌓아온 모든 것을 비우면서도 그 속에 새로운 생명을 내포한다.

▲ ⓒ 허정윤

낙엽은 떨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떨구는 것이다. 나무는 잎의 희생으로 산다. 낙엽을 붉게 만드는 색소 ‘안토시아닌’도 그렇다. 이는 강렬한 햇볕을 차단해 뿌리에 필요한 영양분이 공급되게 하고, ‘부동액’ 역할을 해 나무가 얼어 죽지 않게 한다. 낙엽이 이불이 되고 거름이 되어 새로운 싹과 잎들을 피워낼 것임을 우리는 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다시 나무를 감싸 안는 후덕함과 가야 할 때를 아는 이처럼 떨굴 때를 아는 나무의 현명함이 경이롭고, 끝이 시작으로 이어지는 윤회의 모습이 감탄스럽다.

가을을 가을답게 만드는 단풍은 현란한 듯해도 유혹적이지는 않다. 온 천지에 자지러지게 피어 젊은 여승마저 환속시키는 봄빛과 달리, 가을 빛은 수줍으면서도 수더분하다. 수줍음은 마치 결혼을 앞둔 신부 같기도 하고 발그레한 어린아이 볼 같기도 한데, 고운 색만큼이나 놀라운 것은 그 속에 이미 지구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는 사실이다. 영겁의 세월 동안 그래왔듯 인간의 시간을 넘어 그들의 순환은 계속될 것이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인간 또한 낙엽 같은 존재임을 깨닫게 되고, 헤아리기 힘든 큰 이치 앞에 겸허해진다.

 ‘자연(自然)’의 그럴 연(然)자는 ‘개(犬)고기(肉)를 불(火)에 구워 먹어야 하는 것처럼 당연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自) 당연한 것(然)’을 제 기준에 맞춰 재단해 고치는 것은 인간의 오만함과 어리석음 탓이다. 이황은 자신의 호를 ‘계곡으로 물러나 산다’는 뜻의 ‘퇴계(退溪)’로 짓고 실제로 골짜기에 거주했고, 노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하여 다투지 않는 물의 성질을 으뜸으로 꼽았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자연을 마치 제 것인 양 파헤치고 물의 흐름을 방해한다.

비우고 다시 시작하는 지혜, 욕심내지 않고 자족하는 삶, 인위가 아닌 자연의 순리대로 놓아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순환과 상생의 가르침을 인간은 배우려 들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자연을 망가뜨리는 주역이다. 몸의 일부이면서도 몸을 죽이는 암적 존재가 바로 우리였구나! 이 아름다운 가을에 궁상맞게도 ‘가을앓이’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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