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상 사고 후 1년 3개월간의 투병 그리고 만난 '황홀한 순간'


"아빠… 여기 어디야? 나 다쳤어? …근데 다리는 왜 이렇게 아파요? 아빠…. 나 내일 모레  시험 보러 가야하는데…."

만약 당신이, 평소와 다름없이 자고 일어났는데 두 다리가 부러져 있어 걸을 수 없다면 어떨까요. 거기다 턱까지 부서지고 이빨이 부러져 밥을 씹을 수조차 없다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라 생각하겠지만, 그 영화 같은 일이 제게는 어느 날 갑자기 마주하게 된 '현실'이었습니다.

자고 일어나니 중환자실, 팔 다리는...

▲ 대학교 졸업식 때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 유성애
 
3년 전인 2010년. 저는 스물다섯의 젊고 건강한, 기자가 되길 꿈꾸는 평범한 여대생이었습니다. 그 해 초 학교를 졸업하고 언론사 시험을 준비했지요. 일반 기업에 입사해 돈을 벌까도 생각했지만, 내가 가진 재능으로 혼자 행복해지기 보다는 같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원하는 것을 공부하면서 언론사 임원 면접에 올라가는 등 꿈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그때, 제 삶은 난데없이 극적인 순간을 만났습니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2010년 11월 2일.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토론을 하고 저녁을 먹고 고시원으로 돌아오는, 수도 없이 반복된 하루 중에 지나지 않았지요. 심지어 그날 저녁식사로 제가 좋아하던 중국집에서 친구와 함께 짬뽕을 먹었던 기억도 납니다. 하지만 그날 밤 10시경 저는 4층의 고시원 베란다에서 아래로 떨어졌고, 당일로부터 약 20일이 지난 후에야 겨우 중환자실에서 깨어날 수 있었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낙상 사고로 인해 당시 스물다섯 한창 젊고 꿈 많았던 여대생은 두 다리와 한쪽 팔이 부러지고 턱뼈가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게 된 겁니다.

처음에는 그저 황당할 뿐이었습니다. 자고 일어났는데 두 다리가 부러져 걸을 수 없다니요. 어제만 해도 걷고 뛰어다녔던 기억이 생생한데, 지금이라도 일어나면 당장 뛰어다닐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럴 수 없다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중환자실에서 지낸 3주 동안, 저는 온 몸의 피가 빠져서 죽는다든가 어느 외딴섬의 병실에 갇혀 평생을 늙어간다든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악몽들을 줄지어 꾸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아마 무의식 속에서도 스스로 왜 다쳤는지를 이해하려 노력했던 게 아닐까 합니다.

▲ 중환자실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합니다. 이상하게도 전 기억이 나질 않네요. ⓒ 유성애

약에 취해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했던 저는 급기야 모든 상황이 누군가 의도적으로 꾸며놓은 '연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절대 안정' 팻말을 달고 침대 위에 누워 눈만 껌뻑거리면서도, 저는 악몽이 현실이라 생각하고 중환자실로 면회 온 가족들에게 살려 달라고 헛소리를 하곤 했습니다.

'잠들면 죽을 거야, 죽을까봐 무서워'라며 졸려도 이를 악물고 밤을 새곤 했지요. 잠들지 않겠다며 버티는 딸 앞에서 성격이 유하신 아버지는 결국 울음 섞인 화를 내고야 말았습니다. "아빠를 그 정도로 못 믿냐, 아무도 널 못 건드리게 지킬테니 아빠를 믿고 한번만 푹 자라"는 호통을 듣고서야 저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가족과 친구가 아닌 사람(간호사와 의사, 심지어는 같은 병실 사람들도)은 무조건 의심했고, 붕대로 칭칭 싸매놓은 다리도 다 거짓말일 거라 생각했던 저. 하지만 상처 소독을 위해 붕대를 풀고 찢어지고 꿰맨 다리의 상처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지금 있는 곳이 대학병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저는 스스로 크게 다쳤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 말로는 제가 응급실에 실려 올 때까지는 의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프다고, 어디 다친 거냐고 물으면서도 곧 언론사 시험이 있다며 걱정했다나요. 하지만 깨어난 후 저는 당시 사고도, 응급실에서의 대화도 전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알아보니 이는 '심인성 해리장애'로 갑작스레 사고를 당한 사람들에게서 종종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합니다. 예상치 못했던 외상과 충격을 몸이 감당하기 어려워서, 무의식에서 의도적으로 힘든 기억을 지워버리는 경우지요.

망가져버린 몸, 왜 하필 저였을까요?

▲ 양쪽 다리와 함께 왼쪽 팔꿈치가 부서져 한동안 깁스를 해야 했습니다. ⓒ 유성애

사고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확인한 고시원 CCTV에 의하면, 그날 밤10시경 방에 들어온 저는 복도에서 비틀거리며 경련 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문을 찾아 열었는데 그곳이 하필 화재 시에 대피할 수 있는 베란다였고, 그 난간이 낮았던 탓에 떨어졌던 거지요.

저를 담당했던 의사들은 사고 후 찍은 CT(컴퓨터 단층촬영)에서 제 뇌혈관의 한 부분이 부어있는 걸 발견했다고 합니다. 조금 더 늦었으면 뇌출혈로도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그나마 경련이 먼저 온 탓에 떨어져 팔다리가 다친 거였다고 하네요. 사고가 난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왜 하필 저였을까요? 왜 하필 그날, 그리 늦지도 않았던 그 시간, 복도에서 비틀거리던 저를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걸까요. 4층에서 떨어졌을 당시 중간에 위치한 간판에 부딪힌 덕에 간신히 죽음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머릿속에서는 불만 가득한 '왜?'라는 질문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갈데없는 분노로 모난 마음은 지인들의 위로조차 상처로 받아들이고는 했었지요. 병실에서의 긴 하루 끝에 잠들면서도 늘 이 현실이, 깨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꿈'에 불과하길 간절히 바라곤 했습니다. 꿈이 아니라면 차라리 깨지 않기를 기도하면서요. 

그러나 삶이란 어찌나 오묘한 것인지. 우리가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던 막다른 곳이 때로는 출구가 되고, 모두가 축복이라 믿었던 일이 가끔은 재앙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고에 없던 사고로 꿈은 물론 건강도 잃고, 현재는 물론이고 열려있던 미래마저도 보이지 않는다며 우울의 나락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쩌면 가장 캄캄한 지금이 동트기 직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물론 주변 사람들의 지속적인 애정과 관심이 필요했습니다.

▲ 그래도 좀 여유를 찾았습니다. 두 다리 모두 붕대를 감고서도 웃고 있네요. ⓒ 유성애

늘 자상하고 조용하던 아버지의 간절하고도 애타는 다그침 덕분에, 그제야 저는 시선을 돌려 주위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마음 착한 우리 엄마는 제가 중환자실에 있을 당시 매일 아침 '이게 꿈은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셨다고 해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갑작스런 사고를 당한 딸을 보며 그저 참담한 마음이었을 부모님, 혹시라도 잘못 되는 건 아닐까 마음 졸였을 친구들과 함께 기도해주신 교회 분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마음결을 따라 가다보니 죄송스럽기만 했습니다. 참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고 힘들게 만들면서도 나는 잘도 모르고 있었구나, 중환자실에서 잘도 잠만 자고 있었구나, 하고요. 

돌아보니 곁에는 언제나 제가 울 때 함께 울어주며 손잡아주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친구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병실을 찾아왔고, 몇 년간 만나지 못했던 중학교 친구까지 소식을 듣고 달려와 위로해주었으니까요. 친구와 친척과 블로그 지인까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쳤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넘치도록 사랑받아도 되는 것인지…. 주변 사람들의 진심어린 응원과 기도로 저는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 제 생일 때였나 봅니다. 이외에도 많은 친구들이 함께 해줘 힘이 되었습니다. ⓒ 유성애

당시 저는 4층에서 떨어져서 살아난 '구사일생'의 경우였습니다.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었지만 5%의 확률로 살아남았고, 상처야 어찌됐든 이렇게 살아있기만 하면, 포기하지 않으면 희망은 존재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꼭 다시 걸을 수 있을 거라고 말이지요. 실제로 사고로부터 3년여가 지난 지금, 저는 멀쩡하게 잘 걸어 다니며 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마구 뛸 수는 없지만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걷는 것도 가능하고요.

그간 다리만 총 대여섯 번의 수술을 받았습니다. 들어갈 때마다 수술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전신마취를 했어요. 한번은 골반에 있는 뼈를 떼어다가 골절된 오른쪽 다리뼈에 이식하기도 했지요. 뼈를 고정하는 '일리자로프'란 기구(링)을 발목에 두르고 무려 1년 2개월 정도를 버텼습니다. 목욕은커녕 샤워도 어려웠고, 휠체어를 타고 산책만 해도 사람들의 놀란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 했던 시간. 그 지난했던 과정을 한 편의 글로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을까요. 부모님 또한 제가 걸을 수는 있을지 혹시 우울증에 빠지는 건 아닌지 노심초사하던 날들이었습니다. 막막한 미래가 두려워 한때는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었습니다.

2012년 1월 말, 그러니까 사고가 일어난 지 약 1년 3개월이 지나서야 제 다리는 완전히 자유로워졌습니다. 기구는 물론 깁스도 풀고 본격적인 재활 치료에 들어갔습니다. 산 넘어 산이라고, 수술만 끝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 뒤에 더 강력한 '끝판왕'이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종아리뼈가 굳느라 함께 90도로 굳어버린 오른쪽 발목을, 물리치료사가 힘을 주어 굽힐 때마다 고통스러워서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아야 했습니다.

쉽지 않은 시간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혼자서 집에만 있다가는 정말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아 두 달 후에는 기숙사가 있는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 대학원에도 등록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는 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잘 굽혀지지 않아 걸음을 절뚝거리게 만드는 제 발목이 어찌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릅니다. 학교 안에 있는 병원에서 수업과 재활 치료를 병행하며 학교를 다녔지요. 문자 그대로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습니다. '어렵다'는 말을 의도적으로 피할 만큼 재활 치료는 쉽지 않았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의 응원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 대학원에서 친구와 함께... 이제 정말 많이 나아졌죠? ⓒ 김태준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냐고요? 놀랍게도 지금은 거의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앞니가 빠졌지만 임플란트를 통해 감쪽같은 '치아 미녀'가 되었고요, 무리만 하지 않으면 걷는 것도 별다른 불편 없이 가능합니다. 부었던 뇌혈관도 치료를 통해 정상으로 되돌아왔고, 처음 만나는 사람은 제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를 만큼 기적같이 회복했습니다. 병원에 자주 찾아오던 친구들은 그런 저를 '회복의 여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 사람들에 대한 '믿음'에 기댈 수 있던 탓에 이제 저는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예전과 똑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을 테고, 입술 아래에는 사고로 인한 흉터가 내내 남아있겠지만요.

믿기 어렵겠지만 얼마 전까지는 <오마이뉴스>에서 인턴으로도 활동했습니다. 부족한 능력 때문에 실수도 많았지만 20대 젊은 친구들과 울고 웃으며, 닮고 싶은 선배들을 보고 배우며 공부보다 더 크고 많은 것들을 깨달았다고 자부합니다. 휠체어를 타던 때의 기억을 살려 '장애인 대중교통 체험기(링크)'를 쓰기도 했었고요. 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도 사회의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 사연은 많지만 그들을 대변할 매체가 많지 않아 답답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지금 가진 새로운 꿈이라면, 너무 큰 것이라고 비웃을까요.  

▲ 지하철에서 취재를 도와주던 인턴 친구와 함께. 턱에 흉터가 보이네요. ⓒ 유성애

지난 3년 간 일어났던 사건과 경험했던 일들이 앞으로 제 삶에 어떤 형태로 자리 잡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왜 하필 나였는지, 왜 굳이 그때 거기서 떨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몰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틈새가 어디인지, 신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계속 궁금해 하지만 결코 그 답을 결코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시간은 충실히 흐르고, 봄은 다시 찾아오고, 사랑하는 이들은 변치 않고 제 곁에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건강하던 스물다섯 아가씨가 어느 날 4층에서 떨어지고, 생사를 넘나들다가 겨우 깨어나지만 사고의 기억은 전혀 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드라마 같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인생이지만… '왜 하필 나였냐'고 부르짖는 원망에서 '하필 나여서 다행'이라고 감사하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도, 그런 이해하기 힘든 일이 일어나는 것도 인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도 저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새롭게 주어진 하루에 감사합니다. 다리가 부러지긴 했었지만 가장 중요한 머리와 허리를 다치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빠르게 회복해준 제 몸에게 감사합니다. 오늘 주어진 하루가 내 삶의 마지막 날이라, 지금 만나는 사람과의 만남이 마지막이라 그렇게 생각하며 한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행복하려 합니다. 쉽지 않은 삶, 그래도 밝은 면들을 보려 노력하면서 제 삶의 '이토록 극적인 순간들'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거짓말 같았던 시간들이 지나고도 저는 여전히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네요.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이 순하게 흘러 스물여덟의 꽃다운 청춘(?)이 되었답니다. 지금은 추운 겨울이라 조금 웅크리고 있지만, 이제 곧 따뜻한 봄이 오면 제 청춘은 더 활짝 피어나게 될 거예요.

두서없이 써내려간 이 글이 저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모두들 힘내주세요. 살아만 있으면, 지금보다 더 좋은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마니까요. 언젠가는 저의 '좌충우돌 취업 성공기'도 싣게 되길 기도하면서, 당시 저를 버티게 만든 구절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 당시 병실에서 바라본 노을입니다. 아름다웠습니다. ⓒ 유성애

내 인생은 순간(瞬間)이라는 돌로 쌓은 성벽이다.
어느 순간은 노다지처럼 귀하고 어느 벽돌은 없는 것으로 하고 싶고
잊어버리고도 싶지만 엄연히 내 인생의 한 순간이다.
나는 안다. 내 성벽의 무수한 돌중에 몇 개는 황홀하게 빛나는 것임을
또 안다. 모든 순간이 번쩍거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겠다.

인생의 황홀한 어느 한 순간은 인생을 여는 열쇠구멍 같은 것이지만
인생 그 자체는 아님을.

… 원근에서 기다려 주시는 분들, 고맙습니다, 언제나.

- 성석제,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작가의 말 중에서


* 이 글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재학생 유성애 기자가 <오마이뉴스>에 송고한 기사를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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