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특강] 정연주 전 KBS 사장: 언론과 권력

'권력에게 가장 미운 것이 신문입니다. 신문이 무엇입니까? 씨알(백성)의 눈이고 귀고 입입니다. 옛날 예수, 석가, 공자가 있던 자리에 이제 언론이 있습니다. 종교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언론입니다.'

▲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언론과 권력'이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진희정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을 개탄하며 <씨알의 소리>를 만들었던 고 함석헌 선생의 창간사를 가슴에 품고 산다는 정연주 전 KBS 사장. 그는 언론 자유가 위축돼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신문이 밉다던 함 선생의 말을 빌려 자신의 심정을 드러냈다. 정 전 사장은 지난 3월 이명박 대통령을 상대로 한 KBS 해고무효 소송에서 ‘해임이 부당하다’는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았다. 
 
언론이 ‘찌라시’가 되지 않으려면
 
현 정권 언론탄압의 대표적 피해자이자, 언론에 40년 넘게 몸 담은 ‘원로’가 생각하는 언론의 역할은 무엇일까? “제대로 된 기자 생활도 못하는데 뭣 하러 들어왔냐?” 정 전 사장은 1970년 동아일보 입사 당시, 수습기자를 교육하던 김중배씨가 내뱉은 푸념을 떠올렸다. 
 
“술 취한 선배들이 어느 순간부터 화를 내고, 분노하고, 몸부림쳤습니다. 신입 기자들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던 거죠. 사실 보도와 권력 감시를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대학생과 노동자는 줄기차게 유신반대 시위를 했지만,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다. ‘사실 보도’가 어려우니 ‘권력 감시’가 이루어질 리 없었다. 정 전 사장은 아는 선배가 <신동아>에 경제성장의 폐해로 공해 문제를 제기했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두들겨 맞았던 일을 전하며, 정권 비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과거를 회고했다.
 
그는 “보도해야 할 가치 있는 사실을 왜곡하거나 비틀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사실보도”라며 “그렇지 못한 언론은 본인에게 유리한 점만 과장하는 ‘찌라시’와 같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예로 지난 1월 <조선일보> 천안함 관련 오보를 꼽았다. 당시 <조선>은 <도쿄신문> 고미 요지 편집위원의 김정남 이메일 인터뷰를 바탕으로 했다며 “김정남 ‘천안함, 북의 필요로 이뤄진 것’”이라는 기사를 1면에 보도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덧붙여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KBS가 ‘내곡동 사건’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것을 들며, 언론의 권력 감시·비판 기능을 강조했다. 그는 “KBS가 내곡동 현장에 단 한 명의 기자도 보내지 않고 청와대 해명자료에만 근거해 보도했다”며 “언론은 권력이 부패하지 않도록 감시하면서, 권력으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이 소외되지 않도록 균형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 기능을 하는 언론은 사회의 아주 중요한 공론장이 됩니다. 아픔은 혼자서 앓는다고 해결되지 않지만 공유하면 줄어들죠. 사회적 아픔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일방직과 원풍모방 노동자들이 혹독하게 착취하는 것에 저항하자, 회사측은 구사대를 동원해 똥물을 끼얹었지만 국민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언론이 사실보도를 했다면, 사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고민하고 아픔을 공유하고, 해결책을 강구했을 겁니다. 작년에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에서 무사히 내려온 것처럼 말이죠.”
 
언론 자유는 싸워서 얻어야 값진 것
 
그가 3년차 사건기자였던 73년은 유신선포 1년 뒤로, 공포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권력이 강고한 바위처럼 느껴졌지만, 대학가에서는 계란으로 바위 치는 심정으로 인간의 권리가 박탈된 것에 대한 저항이 계속됐다. 그는 신문에 ‘보도’하지 못하더라도 ‘보고’는 해야겠다는 마음에, 학생들이 농성중이던 한 대학 도서관에 갔다. 바리케이드를 뚫고 들어선 농성장 입구에서 ‘개와 기자는 접근금지’라는 글귀를 발견했다. 
 
“팻말을 본 순간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분노했습니다. 저뿐 아니라 당시 대부분 젊은 기자들이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렇게 74년 동아자유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가 시작됐고, 이듬해 3월 17일 박정희 정권과 유착한 <동아일보> 사주들이 기자들을 몰아냈습니다. 그때 내 목이 처음 날아갔죠. 내 목은 주로 대통령이 칩니다.”
 
부끄러움과 분노를 견디지 못한 언론인들이 74년 싸우기 시작했고, 지금 KBS MBC YTN 등 그의 후배들이 싸우고 있다. 정 전 사장은 최근 파업하고 있는 후배들에게서 40년 전 자기검열에 괴로워하던 자신들 모습을 떠올렸다. 과거처럼 중앙정보부 직원이 편집국에 상주하면서 ‘문제되는’ 기사를 폭력으로 응징하지 않지만, 언론자유의 실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 정 전 사장은 지난해 KBS 새 노조 노보에 실린 설문조사 결과를 예로 들며 '데스크의 지나친 간섭'이 언론인의 자기검열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 진희정

지난해 KBS 새노조 노보에 발표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기획·취재·제작 과정에서 자기검열을 느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79.6%가 ‘그렇다’고 답했으며, 그 이유로 ‘데스크의 지나친 간섭’을 들었다. 정 전 사장은 “사실보도와 권력 감시기능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자기검열은 기자에게 영혼의 죽음과 같다”며 언론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파업을 하고 있는 언론인들에게 한마디 했다. 
 
“동아투위가 5개월 동안 싸워서 언론자유를 쟁취했을 때 고귀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파업현장에 가서 후배들에게 싸우라고 말합니다. 정권이 바뀌거나 좋은 사장이 취임해서 얻는 자유, 누군가 대신 찾아주는 자유는 쉽게 잃어버립니다. 싸움이 얼마나 길어지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장에 있는 그들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스스로 값진 자유를 얻어내길 바랍니다.”
 
‘고봉순’ ‘마봉춘’ 대신 ‘김비서’ ‘MB씨’
 
사람들은 KBS와 MBC를 더 이상 ‘고봉순’ ‘마봉춘’이라는 애칭으로 부르지 않고 ‘김비서’ ‘MB씨’로 부른다. 정 전 사장은 세 가지 설문조사 결과와 최근 벌어진 몇 가지 사건들로 한국 언론의 위상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흐름을 짚었다. 칠팔십년대 정치권력에 탄압받던 언론도 87년 6월 항쟁을 거치며 민주주의를 맞았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참여정부를 거치며 정치권력의 언론 간섭은 잦아드는 듯했다.
 
그러나 95년 3월 24일자 <조선노보>에 실린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리 신문(조선일보)의 편집권이 독립되어 있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54%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으며, 편집권을 가로막는 주체로 61.4%가 ‘경영진’을, 2.9%가 ‘정치권력’을 꼽았다. 정 전 사장은 “이 자료가 6월항쟁 이후 정치권력이 언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며 “경영진과 같은 내부요인이 편집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한 뒤 상황은 급변했다. 2009년 9월 한국언론재단이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현재 우리나라 언론 자유를 제한하는 권력이 무엇인지 답해보시오’라는 물음에 31.4%가 ‘정치권력’을 선택했다. 자본권력(광고주) 20.4%보다 11% 많은 결과다. 2010년 연합뉴스 노조에서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도 마찬가지로, 86.9%가 ‘연합뉴스는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답했다.
 
그는 정치권력이 언론자유를 제한하는 주요 요인으로 다시 등장한 것과 함께 언론과 표현의 자유 전반이 훼손된 것을 우려했다. ‘국경없는기자회’가 해마다 발표하는 언론자유지수를 보면 한국은 2005년 34위에서 2008년 48위로 강등됐고, 2009년에는 69위까지 떨어져, 가나·남아공·탄자니아보다 낮다. 국제엠네스티는 연례보고서에서 “10년 만에 다시 표현의 자유 제약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라며 우리나라를 ‘부분적 언론 자유국’으로 분류했다. 
 
정 전 사장은 ‘G20 포스터 쥐 그림’과 미네르바 사건, ’’지붕 뚫고 하이킥’의 ‘빵구똥구’ 권고조처’, ‘김여진 법’ 등이 우리 사회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표상이라고 말했다. 
 
“낙서는 풍자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문화죠. 문화가 다양해지려면 사람들의 생각과 말을 억압해서는 안 됩니다. 낙서했다고 검찰이 기소한 것도 황당하지만, 대법원에서 벌금형을 선고한 것도 문제입니다. 대법원이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표현과 사상의 자유에 반하는 판결을 내린 것 아닙니까? 법을 어떻게 공부했는지 의문입니다.”
 
‘절망의 벽’을 ‘담쟁이’처럼 오르길

▲ 언론인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담쟁이' 같은 존재가 되기 바란다는 정 전 사장. ⓒ 진희정
최근 대법원이 해임무효소송에서 정 전 사장의 손을 들어주기 전, 지난 1월 12일 배임혐의에 대해서도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2008년 강제로 해임된 지 3년 5개월만이었다. 지겨운 소송 자료를 여러 번 읽으며 머리가 하얗게 샜다는 그는 “배임죄로 고소했던 내부구성원들에게 개인적으로 분풀이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며 “공적 권력이 개입한 것이 문제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쫓아내려고 했을 때, 사실 사표 던지고 나오면 그만이었습니다. 제일 편한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옳은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버텼습니다. 당시 가장 필요한 문제는 공영 방송의 독립이었고, 그러기 위해서 최소한 방송법에 정해진 사장 임기는 보장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 전 사장은 강연을 마치며 손바닥 크기의 노란색 수첩을 꺼냈다. 앞으로 언론인이 되어 사명을 다하려면 시련에 부닥칠 수 있는데 그럴 때도 ‘담쟁이’ 같은 존재가 되어달라며 도종환 시인의 시를 낭독했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담쟁이’ 끝 부분)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며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학기 <저널리즘특강>은 보도와 칼럼, 방송제작, 매체창업 등을 통해 한국사회의 담론형성과 의사소통에 크게 기여해온 분들이 진행합니다. 한국의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언론사의 핵심간부와 논객들이 한 특강을 <단비뉴스>가 중계합니다. 이 특강은 우리 저널리즘에 대한 생생한 경험담도 흥미롭지만, 학생이 쓴 기사를, 함께 강의를 듣는 강좌책임교수가 데스크를 봄으로써 ‘강연ㆍ연설기사 쓰기’ 수련을 겸하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특히 언론인이 되려는 학생들의 관심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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