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유종일 ‘경제119’

2012년 새해 벽두부터 ‘굶어 죽은 소’가 파문을 일으켰다. 전북 순창의 한 축산농가에서 사료를 제때 주지 못해 소가 굶어 죽은 것이다. 한우값은 2년 전에 비해 40~50% 가량 떨어졌는데 사료값은 같은 기간 40% 이상 올라 농민들이 속수무책이 되면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

만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하고 쇠고기 등 축산물 수입이 더 늘어나면 이런 일은 더 자주, 더 심하게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농민 뿐인가. 빗장이 활짝 열린 대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수입품과 외국기업의 공세에 중소기업, 자영업자, 노동자들이 ‘소를 굶겨 죽인 농부’ 신세가 될 수 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수출 대기업들은 FTA의 혜택을 만끽하겠지만 그들이 이런 ‘희생자들’을 보살펴 주리라는 약속은 어디에도 없다.

▲한미FTA 반대 시위 참가자들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 ⓒ 양호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의 유종일 교수는 신간 <경제119>를 통해 현 정부의 수출과 개방, 성장위주의 경제정책을 매섭게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지난해 7월 민주통합당의 전신인 민주당의 ‘헌법 제119조 경제민주화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그는 이런 취지의 정책을 그 해 11월 특위 이름으로 발표했지만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미FTA ‘날치기’ 파동에 묻힌 것이다. 그는 언론에게 기대하는 대신 국민들에게 직접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국민소득 올라도 나아지지 않는 국민들의 삶

유 교수는 책에서 “현 정권이 우리 사회를 요람에서 무덤까지 고난의 연속인 사회로 만들었다”고 꼬집었다. 이명박 정부는 ‘747공약’, 즉 경제성장률 7%,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위의 경제를 만들자는 거창한 약속과 함께 집권했다. 그리고 줄곧 고환율ㆍ저금리 정책과 법인세 인하 등 수출대기업에만 유리한 정책을 펼쳤다. 또 4대강 같은 대형 국책사업뿐 아니라 부동산 규제완화와 금융기관 유동성 지원 등을 통해 경기부양과 성장에 매달렸다.

하지만 무역 1조 달러 달성 등 수출이 늘고 총체적인 국민소득이 올라가도 대다수 국민의 삶은 오히려 팍팍해졌다. 대기업의 수출이 늘면 일자리가 는다는 ‘낙수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재벌들이 경제력을 독점하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양극화가 심해졌다. 대다수 국민들의 소득은 제자리 걸음인데, 저금리ㆍ고환율 정책의 여파로 물가는 가파르게 올랐다. 그래도 정부는 금리를 올려 물가를 잡기보다 수출대기업을 위해 저금리와 고환율 정책을 유지했다. 부족한 소득을 빚으로 해결하는 집들이 늘면서 가계부채는 사상최대 기록을 거듭 갈아치우고 있다.

‘무한경쟁’을 강조하는 세태 속에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누군가를 공격하는 범죄가 늘어난다. 청년들은 너무 비싼 대학등록금과 취업경쟁으로 연애ㆍ결혼ㆍ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가 되었다고 자조한다. 중ㆍ장년층의 삶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고용불안과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에 지치고 아이들 교육비와 집값 걱정을 벗어날 수 없다. 내집이 있어도 이자 내기에 급급한 ‘하우스 푸어’는 200만 가구에 이른다. 자식 기르느라 자신의 노후를 준비하지 못한 노인들의 빈곤과 자살 문제도 심각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유종일 교수.

유 교수는 “외형적인 성장이 더 이상 삶의 질을 높이거나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그는 우리 경제가 경험하고 있는 성장이 ‘나쁜 성장’이라고 말했다. 국내총생산(GDP) 등 나라경제 전체의 부는 증가하지만 그 과실을 소수가 독점하기 때문이다. 분배에서 소외된 다수 서민층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출산율 최하위, 어린이ㆍ청소년 행복지수 최하위, 40대 남성 사망률 1위, 노인 빈곤율 1위인 끔찍한 현실 속에서 허덕인다. “그래서 정치적 민주화뿐 아니라 경제 민주화가 절실하다”고 저자는 목소리를 높인다.

유 교수에 따르면 경제민주화는 시장경제의 효율성과 역동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거래 질서를 바로잡고, 노동조합의 조직률을 높이는 등 노동자들의 협상권을 강화하는 일, 부유층에게 세금을 더 걷어 복지를 확대하는 방식 등으로 추진할 수 있다. 경제민주화가 이뤄지면 성장의 혜택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골고루 분배돼 경제가 안정되고 지속적인 성장의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 유 교수는 이것이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미국과 유럽 주요국의 경우 경제민주화가 진전되었던 전후 황금기(1950~1973년)에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았다. 이 기간 중 소득의 불평등은 크게 줄고 경기변동은 완만해졌으며 경제안정도 이뤘다. 저자가 강조하는 ‘좋은 성장’, 즉 ‘경제민주화를 통한 성장’이 바로 이런 것이다.

유 교수는 좋은 성장을 이루기 위해 경제민주화의 세 가지 축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첫 번째는 ‘공정경쟁’이다. 여기서 공정은 형식적인 기회의 균등이 아니라 실질적인 기회의 평등으로, 누구나 시장에서 의미 있는 경쟁을 할 수 있도록 사회가 뒷받침해주는 것을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공정경쟁이 가능 하려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시장 질서를 잡아 주어야 한다. 대기업이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등을 통해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의 사업 영역을 침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축은 경제적 의사결정에 이해당사자들이 고루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수의 자본가나 경영자에 의해 기업의 의사결정이 독점되어선 안 된다. 저자는 이를 ‘참여경제’라고 설명한다. 노조 대표, 혹은 종업원 대표가 기업의 이사회에 참석해 최고의사결정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종업원이사제(ERP) 등을 도입함으로써 구성원의 민주적인 참여 권리를 보장하자는 것이다.

경제민주화의 세 번째 축은 ‘분배정의’다. 평등한 기회와 참여 권리가 주어져도 결과적으로 소득과 부의 분배가 너무 불평등해선 안 된다. 분배의 불평등은 결국 기회의 평등을 무너뜨려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정치권과 국민 모두 나서야 경제민주화 가능

▲ 유종일 교수의 <경제119> 표지.

저자는 경제민주화의 세 가지 요소인 공정경쟁, 참여경제, 분배정의를 이루기 위한 정책대안으로 먼저 재벌의 범죄 근절 등 재벌개혁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위해 검찰개혁과 사법개혁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검사장 직선제를 도입하고 공정한 법관 선출을 위해 독립적인 인사위원회를 설치해야 검찰과 사법부가 정치권력이나 재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재벌의 범법행위를 엄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 교수는 또 재벌들이 ‘문어발’을 넘어 ‘지네발’이 될 만큼 계열사를 늘려 경제력을 독과점하는 폐해를 막기 위해 일정규모 이상 대기업의 출자규모를 제한하는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산업자본이 은행을 지배할 수 없도록 하는 금산분리 규제도 강화해서 금융회사가 대기업집단의 계열 확장과 총수의 지배권 강화 등 경제력 집중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저자는 중소기업과 노동자 보호도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중소기업의 경우 대기업이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 횡포를 부릴 경우 관련 협동조합이 기업을 대신해 협상에 나서도록 ‘하도급분쟁조정 협의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노조조직률과 단체협약 적용률을 높이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가치를 입법화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부자증세’를 위해 법인세와 소득세의 최고세율 구간을 신설하는 것, 부모의 소득과 교육수준이 낮은 학생에게 가산점을 주어 대학입시에서 적극적인 ‘기회균등선발’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 등 노동, 금융, 교육, 조세 각 분야에 걸쳐 총 열 두 가지 핵심정책을 제안했다.

저자는 경제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해방 직후, 4ㆍ19혁명 직후, 그리고 87년 6월 항쟁 직후 등 민주정치의 공간이 열릴 때마다 항상 전면에 등장했지만 충족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6월 항쟁의 성과로 만들어진 현행 헌법 119조 2항에 경제민주화의 원칙이 명시돼 있지만, 최근에서야 이 조항이 사회적 토론의 주제로 떠올랐다.

▲지난해 7월 부산역에 모인 1만 여명의 희망버스 참가자들. ⓒ 안세희

유 교수는 “오랜 숙원인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대중이 분노하고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눈 앞의 현실에 좌절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개혁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와 농민,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인, 그리고 시민사회의 연대와 협력으로 강력한 ‘경제민주화 동맹’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120 페이지 남짓, 짧지만 단단한 책을 이렇게 마무리 했다.

“경제민주화 동맹이란 단지 정치권의 얘기가 아니다. 나라의 주인인 우리가 나서서 경제민주화 동맹을 구축해야 한다. 모든 억울하고 힘든 이들의 연대, 모든 선량한 시민들의 연대, 이것이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경제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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