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백서 사건 210주년, 배론성지를 찾아서

봉건시대인 210년 전 오늘(1801년 10월29일) 비단에 쓴 한 통의 편지가 몰고 온 끔찍한 재앙이 ‘황사영백서 사건’이고, 그 현장이 ‘배론성지’다. ‘배론성지’란 이름을 접하면 대부분 ‘배론이 천주교인의 이름을 딴 성지’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배론’은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순우리말이다.

▲ 피의 박해를 상기시키려는 걸까? 배론성지 입구의 단풍이 유난히 붉다. ⓒ 김강민

배론성지로 들어가는 골짜기는 입구가 좁아 그 안에 이런 숨어 살기 좋은 조그만 분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천주교인들은 숲 우거지고 흙 좋은 이곳에서 옹기를 구워 팔며 신앙을 유지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몰살을 당하다시피 했다.

배론성지는 순조, 철종, 고종에 걸친 천주교 탄압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천주교 성지는 많지만, 이곳처럼 여러 역사적 사건의 배경이 된 성지는 드물다. 천주교인이 아니라도 근대사에 관심이 있다면 둘러볼 만한 곳이다.

이곳은 역사적 중량감에 견주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교통이 불편해 도시 근교에 자리 잡은 천주교 성지들보다 찾는 이가 적지만 고즈넉해서 더욱 좋은 곳이다. 배론성지가 간직한 세 가지 슬픈 이야기를 전한다.

황사영백서 – 천주교 박해 고발과 대역부도죄

황사영(1775~1891)은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인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다. 조선왕조를 통틀어 십대 어린 나이로 진사시험에 합격한 넷 중 하나(다른 셋은 성삼문 김시습 맹사성)인 그는 처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했다. 1801년 순조의 수렴청정을 시작한 정순왕후는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에 나섰다. 신유박해로 일컬어지는 이때 이승훈(첫 영세자) 정약종(정약용 형) 주문모(첫 외국인선교사) 등 300여 신도가 처형됐고, 비슷한 숫자가 유배당했다.

▲ 황사영이 백서를 쓴 토굴인데 복원된 것이다. ⓒ 김강민

간신히 몸을 피한 황사영은 평민 천주교인의 도움으로 배론에 숨었다. 빈 옹기토굴에 들어간 그는 등불에 의지해 장문의 편지를 썼다. 비단에 작성했다 하여 백서(帛書)라 불리는 이 편지에는 한 줄에 110자씩 총 121행, 1만3천여 자가 빼곡히 적혀있다. 황사영은 독실한 신자인 황심을 통해 백서를 중국 천주교회 북경교구에 전달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백서를 접한 조선 조정은 경악했다. 그만큼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편지 내용은 크게 당시 천주교 사정,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순교, 교회재건책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제는 마지막 재건책이었다. 황사영은 ▲서양의 재정 원조 ▲서양인 신부의 조선 입국을 위한 중국 황제의 협조 ▲베이징교구와 긴밀한 연락 ▲청나라의 조선 복속 ▲서양 함대와 병력 파견 등을 제시했다. 정순왕후는 관련된 인물들을 모두 처형했고, 황사영은 능지처참됐다. 백서 원본은 교황청 박물관에 소장돼 있고, 배론성지에는 사본이 복원된 토굴 속에 전시돼 있다.

▲ 신자들은 화전을 일구고 이런 가마에서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했다. ⓒ 김강민

황사영백서에 대한 평가는 천주교계뿐 아니라 사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1894년 의금부 창고에 보관되어있던 백서를 발견한 뮈텔 주교는 “음모의 대부분이 공상적이고 위험천만한 것이며, 조선 정부가 필자에게 엄벌을 가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위정자들의 정치적 처신과 의중이 다분히 내포되어 있는 문초기록을 비평 없이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박사는 “당시 조선교회 지도자들은 ‘서양선박=선교사=신앙의 자유'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면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 요셉 신학교 – 초가삼칸에서 초•중•고 교육과정을

헌종 때까지 탄압일변도였던 조선의 천주교정책은 철종(재위 1850~1864)대에 이르러 잠시 느슨해졌다. 이 시기를 이용해 한국 천주교는 교리서적을 인쇄•보급하여 신앙심을 키우고 활발한 포교 활동을 펼쳤다. 1831년에는 조선교구가 설정되면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가 교구장으로 추대되었다.

1853년 교구장 직무대행 메스트로 신부는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신학교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베이징교구를 거쳐 교황청 승인을 받은 그는 배론에 첫 신학교를 세웠다. 독실한 신자로 조선인 회장이었던 장주기(혹은 장낙소)의 초가삼칸이 교실이었다. 이 신학교는 초•중•고 교육이 어느 정도 체계적으로 실시된 조선 최초의 근대적 학교다. 철학과 신학을 중심으로 지리학과 의학 등 다양한 학문을 가르쳤다. 1861년 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성 요셉을 주보성인으로 모시면서, 학교 이름도 성 요셉 신학교가 되었다.

▲ 초가삼칸이 전부인 성 요셉 신학교. 추녀 밑에 전시된 사진을 토대로 복원된 것이다. ⓒ 김강민

천주교 세력 확장에 큰 보탬이 되리라 기대됐던 성 요셉 신학교는 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위기에 직면했다. 1866년 대원군의 명으로 병인박해가 시작됐다. 조선에 있던 프랑스 신부 12명 중 9명을 포함해 8천여 천주교 신자들이 학살됐고, 학교도 폐쇄됐다. 신학교는 19년 뒤 강원도 원주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란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성 요셉 신학교는 배론의 천주교인들에 의해 보존되다가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뒤 사진과 도면을 참고로 다시 복원됐다.

병인박해 당시 신학교와 관련되어 죽은 인물은 6명이다. 교장 푸르티외 신부, 라틴어 교수이며 라틴어-한국어 사전 저자인 프티니콜라 교수가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사형됐다. 장주기 주임은 일단 몸을 피한 뒤 다른 교인들의 피해를 염려하여 자수했다가 효수되었다. 유 안드레아, 권동, 김 사도요한 등 신학생 3명도 목숨을 잃었다.

최양업 신부 – 곧 성인이 될 ‘땀의 순교자’

1836년 조선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모방 신부는 조선어를 할 줄 아는 조선인 신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목숨을 걸고 신부의 길을 걸을 소년들을 선발했다. 이들이 김대건, 최방제, 최양업이었다. 증조부부터 천주교를 믿은 독실한 신자 집안에서 태어난 최양업은 당시 열다섯 살이었다.

▲ 최양업 신부의 일대기를 새겨놓은 ‘최양업 신부 조각공원’. ⓒ 김강민

이듬해 마카오로 간 최양업은 1842년까지 신학을 공부한 뒤 8년간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삼엄한 경비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1849년 마레스카 주교에게 사제 서품을 받으면서 김대건에 이은 두 번째 조선인 신부가 된 최양업은 요동에서 중국인을 대상으로 포교하다가 그 해 12월 압록강을 건너 마침내 조선 땅을 밟았다.

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최양업은 이듬해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프랑스인 신부가 자유롭게 활동하기 어려운 여건에서, 그는 삼남지방을 돌며 고해성사를 듣고 미사를 주관했다. 11년간 조선에 산재한 129개 공소를 도는 강행군을 지속했다. 과로에 시달리던 그는 경신박해(1860년)가 일어나자 숨어 지내다가 이듬해 6월 주교에게 사목활동을 보고하기 위해 상경하던 중 문경에서 병사했고 배론성지에 묻혔다.

▲ ‘노아의 방주’와 ‘배론’이라는 지명을 되살리기 위해 배를 본떠 지은 대성당. ⓒ 김강민

먼저 죽은 김대건은 처형당했기에 ‘피의 순교자’라 하여 1984년 요한 바오로2세가 방한했을 때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사목활동 중 병사한 최양업은 순직으로 분류되어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천주교인들은 그를 ‘땀의 순교자’로 부르며 애도했다. 2001년 한국 시복시성운동의 하나로 2004년 최양업을 비롯한 124명의 교인이 교황청에 시복청원되었다. 별다른 차질이 없으면 그들도 2년 안에 성인 반열에 오를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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