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광촌의 발레리노와 ‘마초’ 아버지, 그리고 게이 친구
[씨네토크] 김조광수 감독과 <빌리 엘리어트> 다시보기

▲ 지난 18일 제천영상미디어센터에서 '연출자의 의도가 숨어있는 장치들'이란 주제로 김조광수 감독의 강연이 열렸다. ⓒ청풍영화동호회
“TV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니까 표현 가능한 부분들이 있어요. 이른바 ‘영화적인 장면들’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한 번 봐서는 찾기 힘들어요. 영화를 처음 볼 때 이야기 흐름을 따라갔다면, 두 번째는 감독이 어떤 상상력으로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는지 생각하면서 그런 장면들을 찾아보는 것이 더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영화 <조선명탐정>의 제작자인 청년필름대표 김조광수 감독이 지난 18일 충북 제천시 제천영상미디어센터에서 청풍영화동호회 회원들과 만났다. ‘연출자의 의도가 숨어있는 장치들’이란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함께 본 뒤 김조 감독이 강의하고 질문에 답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와니와 준하> <후회하지 않아> <올드미스 다이어리(극장판)> <친구 사이> 등 화제작들을 연출한 그는 “감독의 상상력이 총동원되는 장치들을 찾아내기 위해 한 영화를 두세 번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빌리 엘리어트>를 빚어 낸 두 개의 줄거리 

▲ <빌리 엘리어트>는 탄광촌에 사는 소년 빌리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발레리노로 성장하는 이야기다. ⓒ 영화 <빌리엘리어트> 한 장면
“영화에서 두 가지 플롯(plot•줄거리)이 처음부터 끝까지 잘 진행되고, 그게 하나로 조화롭게 만나도록 하기가 정말 어려워요. 그런 면에서 <빌리 엘리어트>는 두 가지 플롯이 개별적으로 가면서 마지막에 하나로 만나는 아주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해요.”

<빌리 엘리어트>는 탄광촌에 살면서 발레를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소년 빌리가 발레리노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김조 감독은 이 영화가 ‘빌리의 발레이야기’를 주된 줄거리(메인플롯)로, ‘빌리를 받아들이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작은 줄거리(서브플롯)로 했다고 설명했다. 영화 속에서 개별적으로 진행되던 두 개의 플롯이 아버지와 형이 빌리의 공연을 보러 가는 장면으로 자연스럽게 버무려졌다는 게 그의 해설이다. 김조 감독은 “잘 만든 영화들은 대개 플롯이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또 하나의 서브플롯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며 “이렇게 여러 플롯이 진행되면서 영화가 풍부해지고, 이것들이 영화 속에서 잘 만날 때 영화의 완성도가 높아진다”고 말했다.
 

▲ 김조광수감독은 빌리의 주변환경에 주목했다. 사진은 탄광노동자인 빌리의 아버지와 형. ⓒ 영화 <빌리엘리어트> 한 장면
“만일 빌리에게 누나가 있었다면 빌리와 공감대를 가질 수 있었을 테죠. 그러나 이 영화는 형을 배치해 둠으로써 가족 중 누구도 빌리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설정했어요. 그런 상황들이 자연스럽게 감동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조 감독은 또 이 영화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빌리라는 캐릭터가 놓인 ‘환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빌리는 ‘철의 여인’ 대처 수상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행하던 당시에 파업으로 저항하던 탄광 노동자의 가정에서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마초(남성우월주의)적인 아버지와 형,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함께 산다. 김조 감독은 “이 영화는 1980년대 영국 사회가 갖고 있던 사회적인 문제들을 여러 캐릭터(인물) 안에 잘 녹여서 드러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평범했던 빌리가 발레리노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갈등 끝에) 빌리를 받아 들이게 되는 형과 아버지,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다가 커서 게이가 되는 친구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변화하고 성장해 나가는 각각의 캐릭터를 통해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했다고 봅니다. ”

▲  아버지가 발레를 반대하자 격동적으로 춤을 추는 빌리, 김조광수감독이 "가장 영화적인 장면"이라고 꼽은 장면이다. ⓒ 영화 <빌리엘리어트> 한 장면
김조 감독은 ‘빌리가 아버지와 싸운 뒤 미친 듯 춤추며 가는 장면’을 가장 이 작품에서 영화적인 장면이라고 꼽았다. 봄 거리에서 춤을 추며 가던 빌리가 벽에 부딪혀 돌아서면 겨울이 되어있는 장면이다. 그는 “영화 <노팅힐>에서 휴 그랜트가 거리를 걷는 동안 배경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 다시 봄이 되는 영상과 비슷하다”며 “한 장면만으로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 영화이기에 가능한 표현”이라고 말했다. TV가 스토리에 집중하는 반면 영화는 그 이상의 시각적인 상상력과 쾌감을 보여줘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성적소수자이기에 더 잘 볼 수 있는 것들

“우리나라 영화에서 동성애자는 보통 희화화 되어서 표현돼요. 아니면 폭력적으로 그려지거나. 그러나 <빌리 엘리어트>에서는 주위에 게이 친구 캐릭터를 두고 크게 부각시키지 않음으로써 조용히 성적소수자를 지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  <빌리 엘리어트>의 숨은 장치들을 설명하는 김조광수 감독. ⓒ청풍영화동호회

최근 동성 연인과의 결혼을 발표한 김조 감독은 자신이 성적 소수자이기에 영화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고 말했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빌리의 게이 친구를 유심히 보게 됐다고.

“여성성이 강한 친구가 흑인 남성과 같이 빌리의 발레 공연을 보러 옴으로써 게이가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 커플에 대해 영화 속에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죠.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표현함으로써 성적소수자를 자연스럽게 지지한다고 생각해요. 인종도 마찬가지고요.” 그는 또 사람들이 흔히 발레리노나 여성적인 일을 하는 남자들을 게이로 생각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게이가 아닌 평범한 빌리를 내세움으로써 그런 편견을 깨고 있다고 덧붙였다. 

청중 가운데 한 명이 “성적 소수자기에 영화에 도움이 되는 점이 있냐”고 묻자 김조 감독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보는 것 이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밑바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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