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피난민들의 찜질방 26박
떠나온 아이들도 ‘연평도야 미안해’

 

▲ 임대아파트로 이주하기 위해 찜질방을 떠나는 연평도 피난민들. Ⓒ 서동일

‘연평도 주민이 총알받이냐?’

27일 만에 찜질방을 떠나 임대아파트로 이주하는 연평도 ‘피난민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지긋지긋한 찜질방을 떠나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또 임시거처로 옮겨가는데다 해상사격훈련으로 북한이 포격을 재개하는 게 아닌가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연평도에는 생계 때문에 떠나지 못한 가족과 친지들이 남아 있다.

인천시가 두 달간 거주하도록 주선한 김포 임대아파트로 이주하는 연평도 주민들은 19일 짐을 싸면서도 “남북한이 이렇게 대치하면 우리는 언제 연평도에 돌아가 일을 하겠느냐”며 생계 걱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연평도 주민이 총알받이냐.’ ‘생존권을 보장하라.’ 떠나는 찜질방 벽에 걸린 현수막들은 그들의 소망이 무엇인지 압축적으로 말해주고 있지만, 남북이 드센 체하는 치킨게임을 벌이는 와중에 주민들의 안전과 생계는 뒷전으로 밀린 지 오래다.

▲ 피난민들로 북적대던 찜질방. Ⓒ 서동일

비좁고 시끄럽고 냄새나던 찜질방 26박의 악몽

여럿이 함께 자는 것은 ‘1박2일’도 힘든데 연평도 주민들은 수 백 명이 26박을 함께했다. 무엇보다 공간이 좁아 찜질방과 수면실, 탈의실은 물론이고 복도에도 얇은 침구나 좁은 매트를 깔고 ‘억지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생활공간은 각종 용품과 먹을거리, 빨래 등이 바닥과 벽에 마구 널려있어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소음도 심했고 공기도 너무나 탁했다고 한다.

조기이주를 원했지만 행정당국은 계속 늑장을 부렸다. 이주 전전날인 17일 오후 찜질방에 들렀을 때도 피난민 300여명은 인천시에 항의시위를 하러 갔다. 화이트보드에는 주민투표 결과가 아직 남아있었다. 투표인수 504명, 찬성 391표, 반대 104표, 무효 9표. 김포 아파트 이주에 관한 찬반투표 결과였다.

노인과 아이들만 남은 찜질방은 더욱 스산했다. 정명녀(83) 할머니는 “이곳으로 온 뒤 단 한 번도 밖에 나간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아들은 핸드폰을 사준 뒤 볼일을 보러 다니지만 할머니는 핸드폰을 다룰 줄 모른다. 액정화면에는 부재중 2통, 문자 메시지 22통이 찍혀있었다. 

 ▲애들이 남긴 낙서에도 연평도의 안전에 대한 소망이 담겨있다. Ⓒ 서동일

 “6.25 때도 연평도는 피난처였는데...”

박선비(85) 할머니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이야기를 나눌 때 몇 번씩 되묻곤 했지만, “포 소리는 귀가 먹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박 할머니 집은 유리창이 모두 깨졌고, 건넛집은 담벼락이 모두 무너졌다. 그는 "6.25때 피난 간 곳이 연평도였고 거기서 낳은 아들이 이제 쉰일곱인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고 한탄했다.

주민들은 8~12명씩 임시가구를 형성해 임대아파트에 분산수용된다. 독거노인은 그들끼리 모여 입주한다. 이사 풍경도 특이했다. 버스는 8대가 왔지만 화물트럭은 2대뿐이었다. 경황없이 연평도를 탈출하느라 짐을 챙길 여가도 없었고 이렇게 피난생활이 길어질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다만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헤어지는 순간을 아쉬워했다. 엄마 손을 잡고 찜질방을 나서던 차서정(9) 양은 “찜질방 생활이 어땠느냐”는 질문에 “친구들이 많아서 재밌었다”고 답해 엄마의 웃음을 자아냈다. 서정이는 그동안 영종도에 있는 학교에 다녔는데 아이들은 모두 같은 학교에서 방학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아이들도 두고 온 연평도가 걱정되는 듯, 커다란 낙서판에는 ‘연평도야 미안해’, ‘연평도야 잘 회복되렴’ 등의 글귀가 쓰여 있었다.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4기생으로 입학 예정인 서동일 씨가 보내온 사진과 글을 추가 취재와 데스크를 거쳐 기사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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