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김상윤

▲ 시민들이 광장에서 마음껏 영화를 즐기고 있다. - 영화 <씨네마천국> 중 한 장면

영화 <시네마 천국>에는 영사(映寫)기사인 알프레도가 영사기의 빛을 분산시켜 광장에 ‘야외 극장’을 만드는 장면이 있다. 돈이 없어 영화관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다. 시민들은 마치 천국에 온 것처럼 행복하게 영화를 즐긴다. 악덕 업주는 종업원에게 영화표의 반값이라도 받아오라고 시키지만, 아무도 돈을 내지 않는다. 광장은 계급과 권력을 떠나 시민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는 ‘열린 공간’이기 때문이다.

광장이 ‘열린 공간’인 것은 그곳이 원래 비어 있기 때문이다. 비어 있어야 사람들이 모이고, 그들은 이야기로 광장을 채운다. 사람들은 광장에서 신변잡기부터 사회, 정치문제까지 온갖 이야기를 나눈다. 산책을 하거나 때로는 음악을 연주하고, 사회에 불만이 있을 때에는 항의집회를 열기도 한다. 광장은 문화의 생산지인 동시에 소비지이며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예술작품’으로 담아내는 화폭이다. 

지난해 서울 광화문 앞에 들어선 광장은 아직도 진정한 의미의 ‘광장’이 되지 못하고 있다. 화려하게 솟구치는 분수와 갖가지 조형물, 그리고 화단이 한데 어우러져 종합예술작품처럼 눈길을 끌지만 그뿐이다. 사람들은 그저 포토라인에 서서 사진을 찍거나 차를 타고 지나가며 광장에 갇힌 사람들을 바라보는 게 고작이다. 골목에서 나온 사람들이 편안하게 대화하거나 몸을 부대낄 공간은 없다.

서울시는 ‘문화행사만 허가한다’며 시민들의 참여와 광장의 기능을 극도로 제한해왔고 시의회가 개정한 조례조차 집행하지 않고 있다. 관리인이 주인 행세를 하는 셈이다. 시민들의 자발적 행동은 질서라는 명분으로 권력의 감시 아래 제약된다. 또 다른 ‘광장’인 서울광장에서도 진보단체의 집회와 추모행사는 대부분 불허되고, 서울시와 중앙정부의 관변행사가 주류를 이뤄왔다. 

광장을 개방하지 않는 것은 그곳에서 ‘이야기’와 담론이 만들어지는 것을 권력이 원치 않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광장이 ‘축제’와 ‘저항’의 공간이기를 원하지만, 서울시는 ‘전시행정’과 ‘권력’의 공간이기를 바란다. 광장이나 공공장소에서 공포감에 휩싸이는 광장공포증(Agoraphobia)을 개인이 아닌 국가가 느낀다. 지난해 촛불의 기억은 시민들의 민주적 의견 표출이 아니라 국가전복의 비정상적 행동으로 각인되어 있다. 국가는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이 자신들만의 이야기로 채워지는 ‘관변광장’으로 남기를 원했다.

▲ 김상윤 기자
광장은 누구나 멈춰 서서 대화를 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시장처럼 흥정과 타협이라는 사회적 훈련을 통해 공동체의 결속을 지탱하는 힘이 넘쳐야 한다. 근대 이후 권력으로부터 시민권을 확보하게 된 것도 이러한 광장의 기능 덕분이다. 간혹 이익집단과 갈등 표출의 현장으로 오용되는 경우도 있으나 그렇다 한들 광장 자체의 의미가 변질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은 광장은 충돌과 화해가 교차하는 곳이다.

<시네마 천국>의 광장은 시민의 것이지만, 중간중간 ‘주인’이 나온다. 광장을 배회하며 “광장은 내 거야”라고 외치는 광인이 바로 그다. 허나 어느 누구도 그에게 시비를 걸지 않는다. 영화 속 그곳처럼 광장은 그런 미치광이조차도 포용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 이 칼럼은 '광장'을 제시어로 쓴 글을 교수님이 첨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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