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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레이싱모델의 서러운 속사정
[현장] 배는 당기고 가슴은 내밀고 치아는 내보이며 당하는 ‘교수형’
2013년 04월 16일 (화) 11:43:30 이재윤 기자 jasmine_0208@naver.com

훤히 드러난 가슴골과 마네킹같이 쭉 뻗은 미끈한 다리. 동시다발로 터지는 수백개 카메라 플래시와 함께 수많은 남성의 시선이 그녀들의 몸을 훑는다. 인형 같은 눈으로 윙크하며 화답하는 그녀들을 선글라스 없이 자유롭게 탐닉할 수 있는 곳. 거기다 남자가 하지 말아야 할 3대 악취미 중 두 가지라는 자동차와 카메라가 최신형으로 모여 있는 곳. 연 100만명이 억대 수입 자동차와 레이싱모델을 보기 위해 방문한다는 모터쇼장이다.

지난달 29일부터 11일간 경기도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2013 서울모터쇼’에 105만명이 다녀갔다. 출품된 500여대 자동차의 안전관리부터 행사장 부스설치와 청소까지, 1만2천명의 비정규직 인력이 이번 서울모터쇼를 움직였다. 학업과 병행할 수 있는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구하다 모터쇼 의전업무를 맡았다. 열흘간 레이싱모델들과 함께 일하면서 행사장 뒤쪽에서 많은 대화를 했다. 그들은 '모터쇼의 꽃'으로 관객을 불러모으고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지만, 무대 뒤에서는 기진맥진한 '감정노동자'일 뿐이었다.

   
▲ 서울모터쇼가 열린 일산 킨텍스 전시장. 11일 동안 105만 명이 다녀갔다. ⓒ 2013서울모터쇼 공식 Facebook

기진맥진한 ‘꽃’들의 무대 뒤 풍경

“키 순서대로 서라”는 말에 신장 169.5cm의 모델 ㄱ(26∙여∙서울)씨는 앞에서 네 번째에 섰다. 커다란 귀걸이가 귀를 잡아당기고, 처음 신은 신발은 지나치게 꼭 맞아 두 번째 발톱이 엄지발가락을 찌른다.

"야 정신 차려 58분이야! 배에 힘주고 허리 쭉 펴고, 출발!"

에이전시 담당자의 쇳소리에 깜짝 놀라 움찔 어깨를 편다. 서른다섯 명 모델이 군살 없는 날씬한 다리로 또각또각 소리까지 맞춰 일렬로 걸어 나와 A사 부스를 빙 둘러섰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방송 목소리에 맞춰 양손을 배에 모으고 상체를 숙이며 4초, 2초간 정지, 3초간 고개를 천천히 든다. 목부터 허리 끝까지 일직선으로 펴야 한다. 총 네 번 허리를 굽혔다가 편 후 우향우. 다시 일렬로 전시장 밖으로 나가 휴게실로 돌아간다. 높은 구두를 신고 걷다 발목을 삐끗해 열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가시기 전에 누군가 소리를 지른다.

"A조! 각자 자기 차 앞으로 나가. 꾸물대지 말고 빨리 나가!"

그녀는 8천만원대 하늘색 세단을 배정받았다. 사람 옆에 차가 세워져 있는 건지, 차 옆에 사람이 선 건지. 자동차회사 관계자는 전시차에 묻은 지문이나 흠집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자세를 바꿀 때 저린 발목을 잠시 돌리는 데도 눈총을 준다.

   
▲ 피로에 지친 레이싱모델들은 잠시 쉬는 시간에 눈을 붙여 보려 하지만 드러누울 소파 하나 없다. ⓒ 이재윤

‘복부 근육이 당기도록 힘을 주고 괄약근을 조이며 엉덩이는 뒤로 뺀다. 양 귀 끝보다 어깨 끝 선이 뒤로 가도록 가슴을 앞으로 내민다. 두 다리는 벌어진 틈 없이 딱 붙인 상태에서 발이 안으로 모이지 않도록 하고, 손끝은 힘을 뺀다. 이제 마지막으로 치아를 여덟 개 이상 내보이며 환하게 웃기.’

경력 많은 모델은 교수형을 당했다고 상상하면 자세 잡기가 쉽다고 했다. 다섯 시간 가까이 정수리 끝에 실을 매달아 위에서 잡아당기듯, 직선으로 곧게 편 신체의 비결이다. ㄱ씨는 발가락이며 허리 어깨 목 등 온 몸의 뼈마디 위치를 느끼며 자세를 바로잡는다. 가끔 지나치게 힘을 줘 수축된 근육이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면, 오른쪽 다리를 축구공 차듯 발가락 끝부터 무릎까지 일직선으로 펴 앞으로 내딛는다.

왼발이 앞으로 나가며 오른발 복숭아뼈를 스치고 지나는 것을 반복해, 우아하게 일곱 발자국을 내디뎌 차의 반대편으로 선다. 걸어가며 재빨리 팔찌를 반대편 팔로 옮겨야 한다. 차와 가까운 쪽 팔 액세서리가 차에 흠집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과장된 웃음을 짓는 사이, 업체 관계자가 시험감독하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두리번거리며 지나간다. ‘아차! 시선 처리 애매하게 하지 말라고 했지.’

감기와 화상을 동시에

차에 손을 얹으니 철판의 찬 기운이 온몸에 전해진다. 중년 남성과 외국인, 교복 입은 학생들이 앞으로 지나가자, 겨울 명동 한복판에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서 있는 듯하다. 허벅지부터 가슴까지 사방에서 노골적으로 훑는 사람들의 시선이 몸속을 뚫고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강렬한 조명이 무대위로 쏟아지지만 춥다. 허리 쪽 얇은 의상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온몸이 떨린다.

“계속 춥고 콧물이 나요. 코감기, 목감기 두통약을 하루에 서너 알씩 먹어요. 병원 다녀오면 근무 시간 빠진 만큼 일당에서 깎이고, 다른 차에서 2교대 하는 친구 셋이 휴식시간까지 쪼개 3교대로 제 차에 서야 해요.”

모델 ㄴ(29∙여∙서울)씨는 휴게실로 들어오자마자 담요를 둘렀다. 관람객이 코트와 패딩을 입고 전시장을 방문할 정도로 실내 온도가 낮지만 그녀는 맨 살을 드러낸 채 한 시간 동안 서 있었다. 노출이 많은 옷 때문에 감기를 달고 살지만, 몸 군데군데 화상을 입었다. 자동차를 비추는 강렬한 LED 조명 때문이다. 팔 위쪽이 벌겋고 따끔거려 겉옷을 입지 못할 정도다. 조명을 옮겨달라고 요청했지만, 관계자는 차의 크기와 형태에 맞춘 조명이라 불가능하다고 했다. 에이전시 관계자 역시 자외선차단제와 연고를 주며, 차 앞뒤를 왔다 갔다 움직이라고 할 뿐이다.

그렇다고 교대 중간 중간 쉬는 공간이 안락한 것도 아니다. 나무로 지은 전시 부스 뒤편 외벽과 2층 사이, 못이 드러난 나무판자 벽에 등을 대고 앉아야 한다. 창문이 따로 없는 여자 휴게실은 채 마르지 않은 페인트와 향수, 음식 냄새가 뒤섞인, 무대 뒤 먼지 쌓이고 어두운 창고다.

   
▲ 레이싱모델을 비롯한 진행요원 50 여명이 사용하는 휴게실. 창문이 따로 없어 덜 마른 페인트와 향수, 음식 냄새가 뒤섞여 있는 곳이다. ⓒ 이재윤

창고에 들어설 때 맡은 역한 냄새 탓에 점심 생각도 사라졌지만, 다음 근무를 위해 조금이라도 먹어둬야 한다. 투명한 랩을 벗겨, 차가운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밥과 반찬을 일회용 나무젓가락으로 떠 입안에 밀어 넣는다. 이불을 둘러쓰고 돗자리 깔린 바닥에 쪼그려 앉아 먹는 도시락이 뭐 맛있으랴. 대부분 먹는 둥 마는 둥 도시락을 박스 안에 던져두고 좁은 공간에 몸을 맞부딪혀 눕는다.

킨텍스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대화역 주변 모텔은 서울모터쇼 기간에 행사스텝과 모델들로 만원이다. 셋이서 2인실을 써야 한다. 두 자동차 회사만 새벽 네 시 반에 출근해야 전문가가 메이크업과 머리 손질을 해주기 때문에, 대부분 모델들은 스스로 단장한다. 스프레이를 뿌려 딱딱하게 굳은 머리카락을 닦아내는 데만 한 시간 반 이상 걸린다. 저녁을 먹고 모텔로 돌아오면 여덟 시지만, 다른 사람들 씻는 것을 기다리면 마지막 사람은 열두 시가 넘어야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다.

모델계약은 ‘을’도 못 되는 ‘병’…임금은 비밀로

보통 모델 에이전시는 모터쇼가 열리기 3개월 전쯤 모델을 선발한다. 모델이 자신의 신체 사이즈와 얼굴, 전신 사진을 메일로 보내면, 자동차 회사 직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면접이 진행된다. 최종적으로 자동차 회사가 차량에 맞는 모델을 선택하면 에이전시와 계약이 이뤄진다.

이번 서울모터쇼에 참가한 세 개 차량 브랜드 모델 여섯 명이 공개한 계약서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갑’에 해당하는 자동차 회사명은 아직 ‘선정 중’이며, 사업자등록번호와 전화번호가 없고 대표이사 서명도 없다. 대금 지급 기한 또한 쓰여있지 않다. 계약서상 ‘을’인 에이전시로부터 임금 관련 사항만 간단히 듣고 ‘병’인 모델들은 따로 계약서를 살펴볼 시간도 없이 5분만에 계약을 끝낸다.

“잘못된 거 따져봤자 돈 못 받으면 게임 끝이야. 일 끊기면 수입이 0원인데. 모델 일은 인터넷 공지로 안 뜬다고. 에이전시 연락이 내 돈줄이야. 에이전시 말에 ‘왜요’라고 토 달면 안돼. 여기선 에이전시 눈 밖에 나면 바로 일 끊겨.”

아역으로 시작해 경력 15년차 모델 ㄷ(28∙여∙부산)씨 말대로 몇 안 되는 레이싱모델 에이전시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 모델이 한 곳에서 마찰을 일으키면 다른 에이전시에서도 일하기 힘들다. 그 때문에 모델들은 에이전시의 부당한 임금 협상과 산업재해에 침묵할 수밖에 없다. 경력 10년차 모델 ㄹ(29∙여∙경기)씨는 임금을 책정할 때 뚜렷한 기준이 없는 것이 불만이지만, 그녀가 항의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열흘간 차 앞에서 사진 찍는다기에 더 묻지 않고 200만원에 계약했지. 해도 너무하지. 10년차 모델이랑 신입한테 어떻게 같은 돈을 주냐? ‘일 페이’ ‘총 페이’ 말만 복잡하지 금액은 같잖아. 내가 여기 서서 뭐 하고 있는 건지. ‘갑•을•병’이 아니라 내가 병신이네.”

   
▲ 먼지 많은 창고에 돗자리를 깔면 그곳이 휴게실이 되지만 제대로 쉴 수도 없다. 전시장을 울리는 스피커가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 이재윤

에이전시는 ㄹ씨에게 경력에 따라 임금이 차등지급된다고 했지만, 모델 10년차와 경력이 없는 만 19세 모델이 같은 돈을 받았다.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을 했지만, 서울모터쇼 모델들의 임금은 경력과 모터쇼 경험 횟수와 무관하게 180만원에서 1100만원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이마저도 모델들끼리 친해지고 나서야 알게 됐다. 임금 관련 사항은 비밀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임금 관련 사항을 잘못 발설했다가는 계약 규정 위반으로 ‘해고’를 당할 수 있다.

일 없으면 실업자…유럽에선 실업수당까지

현재 우리나라 레이싱모델은 비정규직 노동자 중에서도 ‘특수형태근로종사자’로 분류된다. 자동차회사들은 에이전시를 통해 위탁∙촉탁 형식으로 모델들을 고용하고도 노동법상 책임을 회피한다. 모델들의 임금은 자동차회사가 지불하는 대금에서 에이전시가 중간 마진을 얼마나 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모델은 에이전시가 자동차회사에서 어떤 조건으로 얼마를 받았는지 알 수 없다.

모든 임금은 현금으로 지급돼 소득신고 또한 불투명하다. 경력 7년차 모델 ㅁ(24∙여∙서울)씨는 “세금이나 보험, 소득신고 같은 것은 따로 해본 적이 없다”며 “다만 에이전시에서 임금을 지급할 때 계약한 총 임금에서 세금(원천징수세) 3.3%를 뗀다고 하지만 사실은 알 수 없다”고 했다. “아프거나 사고당하면 번 돈을 병원에 다 쓴다”는 한씨 말대로 서울모터쇼에서 만난 28명 모델 중 보험에 가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일이 끊겨 수입이 없는 모델에게도 실업수당을 지급한다. 지난 10개월간 507시간 이상 근로하며 세금을 냈다면 최대 8개월간 실업 수당을 받는다.  독일, 네덜란드 역시 창작예술인을 위한 사회보장법에 따라 모델도 일반 직장인과 같은 수준의 사회보장제도, 건강보험, 노령연금의 혜택을 받고 있다. 외국의 모델은 복지혜택뿐 아니라 건전한 생산활동을 하는 직업인으로 존중받는다.

수천개 조명이 빛나는 모터쇼장의 서러운 인생이 어디 레이싱모델뿐이랴. 근로계약서도 없이 수많은 방문객이 다녀간 화장실을 행사 내내 청소하는 아주머니부터, 전시된 차에 지문이 묻을까 연신 세정제 묻힌 걸레로 닦는 청년까지. 반짝 행사에 고용된 1만2천여 특수형태 근로종사자들의 열흘은 2013 서울모터쇼의 표어 ‘자연을 품다, 인간을 담다’를 무색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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