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8백여 개 조명등 켜놓고 ‘전력난 시대, 우린 몰라요’

10일 오전 10시 전국 곳곳에서 재난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겨울철 전력 사용이 급증해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대규모 정전 사태에 대비하는 훈련 경보였다. 공공기관의 위기 대응 체계를 점검하는 훈련이지만, 민간에서도 함께 절전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사람들은 일부 조명등을 끄거나 습관적으로 틀어놓은 TV나 컴퓨터를 끈다. 또 트위터나 카카오톡 등에 절전하자며 글을 올리고 리트윗하기도 한다. 굳이 절전 캠페인을 하지 않더라도 서민들은 전기를 아끼는 게 습관이 된 이가 많다.

충북 제천 대형매장들 낮에도 ‘불야성’

그러나 절전을 하자는 국민적 캠페인에 미동도 하지 않는 곳이 있다. 충북 제천시를 예로 들면 중앙통인 의림대로에서도 현대병원 앞 사거리에서 청전동주민센터에 이르는 지역이 대표적인 ‘전력 과소비 지역’이다. 최근 몇 달 사이에도 삼성 전자랜드 등 대기업 계열 대형 매장들이 줄줄이 들어서 제천의 신흥 쇼핑 거리가 된 곳이다.

강추위가 계속되면서 대규모 정전사태인 ‘블랙아웃’이 올지도 모르는 전력비상 상황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곳의 가전매장과 휴대폰 매장들은 한낮인데도 수백 개씩 전등을 켜놓고 있다.

 ▲ 삼성디지털프라자 2층 천장을 가득 메운 형광등이 가전제품매장을 밝히고 있다. ⓒ 이성제

삼성디지털프라자는 1,2층 합쳐 대략 660㎡(200평) 넓이 매장에 형광등이 866개나 켜져 있다. 2층 천장에는 형광등이 한 줄에 20개씩 17줄이 촘촘히 배열돼 있다. 제천에 사는 최은화(38•여)씨는 서비스 순서를 기다리고 앉았다가 너무나 밝은 조명등을 쳐다보더니 “이렇게까지 전력을 낭비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오후 1시인데도 매장 안은 바깥처럼 밝아 보였다. 

휴대폰 몇 대 전시해놓고 전등은 수백 개

맞은 편 LG전자베스트샵이나 하이마트도 상황은 비슷하다. 베스트샵은 일정한 간격으로 박힌 삼파장 전구 말고도 형광등만 17줄에 32개씩 544개가 불을 밝히고 있다. 베스트샵 한 직원도 “많기는 많다”며 “반은 꺼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근처 휴대폰 전문 매장도 마찬가지다. 고작 휴대폰 몇 대 전시해놓고 매장 전체에 밤낮없이 전등을 켠다. 삼파장 전구가 가로 14개, 세로 17개씩 238개가 박혀있다.

▲ 제천시 중앙통 의림대로 청전동 주민센터 근처 가전제품매장과 핸드폰 매장 위치도와 매장별 조명등 수. ⓒ 이성제

이곳 대형 매장들이 소비하는 전력은 얼마나 될까? 가전매장과 휴대폰 매장 각각 세 곳, 완구 매장 한 곳을 일일이 둘러보며 형광등과 전구 개수를 세어봤다. 형광등이 2500여개, 삼파장 전구가 1150개 정도. 사무실에서 주로 쓰는 형광등 32w와 삼파장 전구 20w로 소비전력을 계산해보면, 시간당 103kwh(103,000wh)가 이곳 7개 매장에서 빛으로 사라지고 있다. 400w짜리 전기 난로 250개를 밤낮으로 켜놓는 것과 같은 전력낭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본사지침에 전국매장 동일…절전 동참 어려워

‘블랙아웃’ 걱정은 딴 세상 일인가, 왜 매장마다 전기 절약할 생각을 전혀 못할까? 제천 삼성디지털프라자 박원규 점장은 회사 지침에 따라 불을 밝힐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매장관리인에 불과한 점장이 홀로 나서서 조명을 끄고 절약에 동참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판매점으로 디지털프라자가 전국에 360개 정도 있고, 매장 시설이나 인테리어는 본사 시설운영담당 부서가 맡습니다. 운영기준 지침이 있고요. 전자매장의 조도(빛 밝기)는 실내조명기준에 따라 정해집니다. 점장이 나서서 매장을 운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리할 뿐이죠.”

2011년 8월 14일치 <서울경제> 기사를 보면, 하이마트, 디지털프라자, 베스트샵, 전자랜드 등 전자제품 전문점은 전국적으로 885곳이 영업중이었다. 회사마다 매장을 늘려가는 추세라서 지금은 1천곳이 훨씬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매장 인테리어나 조도(빛밝기) 규격이 회사지침에 따라 정해진다면, 매장 1천여 곳이 과잉조명으로 엄청난 전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밖에 휴대폰 매장 등 과잉조명을 일삼는 판매점들을 포함하면 엄청난 전력손실이 밤낮없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불 밝히기 경쟁된 손님 모시기 싸움

물론 시설이나 특정 활동에 따라 필요한 조도가 다르다. 정부에서는 한국산업규격 조도기준(KS A 3011)을 마련해 공공시설, 공장, 사무실, 병원, 상점 등 시설에 따라 적정 밝기를 정해놓았다. 사무실이나 도서열람실은 최소 150lx에서 최대 300lx사이를 유지하도록 했다. 상점의 경우 최소 600lx에서 최대 1500lx사이다. 규정 범위를 지켜야 장시간 활동을 하더라도 눈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 한국산업규격 조도기준. ⓒ 이성제

문제는 전자제품매장과 휴대폰 매장의 밝기가 과하다는 점이다. 에너지시민연대 차정환 국장은 “매장을 조사하다 보면, 휴대폰 매장은 조도가 1500lx에서 2000lx까지 나온다”며 “매장마다 불필요하게 불을 밝힌다”고 말했다. 그는 “따로 조사한 적은 없지만 전자제품매장 역시 지나치게 강한 조명을 쓴다”고 덧붙였다.

“매장마다 불을 밝히는 것은 광고효과 때문입니다. 밖에서 보면 눈에 띄니까요. 그러나 소비자가 매장 안에 들어서면 눈이 적응을 해서 밝다는 것을 못 느낍니다. 불을 밝힌다고 판매에 딱히 좋은 것은 없습니다.” 

정부가 나서서 규제 서둘러야

판매촉진을 위해 매장들이 경쟁적으로 조도를 높이는 것은 사실 모두가 손해를 보는 ‘치킨게임’이나 다름없다. 모든 매장이 조명을 과하게 밝히면 호객에도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조명비용은 결국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광고효과 때문이라면 매장끼리 협의해서 경쟁적인 불 밝히기를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 제천의 중앙통인 의림대로를 마주하고 들어선 대형 매장들이 앞 다투어 '불 밝히기'에 나섰다. ⓒ 이성제

전력비상 시대에 정부도 빛 공해와 관련한 야간 조명만 규제할 게 아니라 관련 법규를 개정해서라도 상점의 조도를 규제할 필요가 높아졌다. 정부와 한국전력이 가정용 전기에 대해서는 요금을 대폭 올려 전력소비를 줄일 것을 강요하다시피 하면서 막상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대기업에는 싼값으로 전기를 공급하면서 꼭 필요하지도 않은 전력소비를 눈감아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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