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나] 안수찬 기자, 임실 치즈마을을 체험하다

▲ 안수찬(한겨레21 사회팀장)
마을정보센터에 들어서자 종이컵을 내온다. “시원한 요구르트 드세요.” 걸쭉한 그것을 단번에 마실 수는 없다. 숟가락이 없으니 떠먹을 수도 없다. 이거 마을 방문자에게 내는 수수께끼인가, 잠시 고민했으나 궁리 끝에 후룩후룩 ‘흡입’하여 먹었다. 나는 머리가 좋은 것이 확실하다. 작은 유가공 공장을 방문했는데, 아주머니가 요구르트를 사기컵에 담아 건넨다. “호호, 제가 지금 바빠서…. 치즈는 나중에 드릴게요.” 사기컵은 ‘흡입’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다시 후루룩. 마지막엔 혀로 컵 바닥을 훔쳤다. 이래도 날 시험할 텐가, 의기양양한 표정까지 지었다.

치즈를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관에서 다시 요구르트가 나왔다. 아, 제발! 속으로만 항의하고, 겉으론 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우아하게 ‘흡입’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무척 튼튼하고 야무진 ‘놈’으로 볼 일을 봤다. 너처럼 잘 생긴 녀석은 참 오랜만이다…, 잠깐 인사 나눴다. 전북 임실 치즈마을이 나에게 건넨 선물이었다.


유럽풍 낙농마을의 '환상'은 깨졌지만...

전북 임실 치즈마을은 치즈 체험 관광으로 널리 알려졌다. 지난해만 3만여 명이 마을을 다녀갔다. 한국 토종 치즈가 있다는 사실이 임실 치즈마을 덕분에 알려졌다. 그러나 3시간여 체험 방문 끝에 방문객들은 풀이 죽을 수도 있다. 치즈마을의 행정 지명인 전북 임실군 임실읍 금성리의 외양은 평범하다. 유럽의 낙농지에서 볼 수 있는 드넓은 초지, 한가로운 젖소, 쾌적한 취락, 낭만적 풍광 등은 이 치즈마을에 드물다. 비슷한 것이 없진 않지만, 스위스풍의 부유한 낙농마을을 상상하고 간다면 반드시 실망할 것이다.
 
치즈마을이 한국 치즈의 첫 발상지인 것도 아니다. 임실성당에 부임한 벨기에 출신 지정환 신부는 1967년 산양 두 마리의 젖으로 한국 최초의 치즈를 만들었다. 임실성당은 금성리가 아닌 임실읍 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가 기거한 곳도 금성리가 아닌 다른 마을이었다. 그의 제조법을 금성리 주민이 사사받은 것도 아니다. 지 신부가 만든 산양 치즈 자체가 이후 오랫동안 맥이 끊겼다. 산양을 키우는 사람도, 치즈를 만드는 낙농가도 임실군에는 없었다. 그러니 임실 치즈마을이 방문객에게 내놓는 진짜 수수께끼는 ‘떠먹는 요구르트, 숟가락 없이 먹기’가 아니다. 이 마을은 왜 치즈마을인가. 왜 치즈마을로 유명해졌나.
 
20여년 시행착오로 진화한 생산ㆍ분배방식

마을은 임실역 동쪽에 면해 있다. 임실역 앞에는 임실제일교회가 있다. 1960년대 이 교회에는 심상봉 목사가 있었다. 그는 지정환 신부와 함께 임실 지역 농촌 청년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바로 그 심 목사를 따르는 한 무리의 젊은 주민들이 오늘의 치즈마을, 즉 금성리에 살고 있었다. 그들이 사반세기에 걸쳐 가꾼 것은 치즈가 아니라 ‘공동체 민주주의’ 또는 ‘원시 공산주의’ 또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다.
 
1987년, 심 목사에게 감화 받은 금성리의 세 식구가 ‘예가원 공동체’를 만들었다. 각자의 논밭을 모두 합쳐 함께 경작하고, 수입은 하나의 통장에 담아 공동 관리했다. 돈 쓸 일이 있으면 각자 알아서 인출했다.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썼다. 정확히 공산주의 방식이었다. 실험은 3년여 만에 실패로 끝났다.

1991년 마을의 13가구가 모여 ‘바른농사실천농민회’를 다시 만들었다. 친환경농업을 지향했다. 역시 몇 년 뒤 실패로 돌아갔다. 1994년에는 다시 마을의 6가구가 모여 ‘예가족 영농조합’을 만들었다. 친환경 유기농 퇴비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한 가구당 8천만 원 씩 빚을 남기고 1996년 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우리는 거듭 실패했다. 이 작은 마을에서 우리는 너무나 앞서 나갔다”고 주민들은 회고한다.
 
마을 청장년들은 2000년대 들어 중년 또는 노년이 됐다. 이들이 활로를 찾은 것은 ‘마을 체험’이었다. 젖소 7마리를 키우던 작은 낙농가가 1999년 작은 유가공 공장을 만들어 요구르트와 치즈를 생산했다. 오랫동안 잊혀진 ‘치즈’가 임실군에 다시 등장했다. 도시 생협 회원들에게 주로 팔았는데, 까다로운 도시인들은 ‘정말 유기농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했다. 이에 착안해 2005년 전국 최초의 ‘치즈 체험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2007년에는 또 다른 주민이 산양 네 마리를 분양받아 키우기 시작했다. 지 신부의 ‘산양’이 여기서 부활한 것이다.

그러니까 임실 치즈마을에는 한국 최초의 치즈인 ‘지정환식 산양 치즈’는 없다. 산양이 있고, 산양 요구르트가 있고, 치즈가 있고, 치즈를 만드는 젖소도 있지만, 산양 치즈가 없는 것은 확실하다. 임실군의 다른 마을에도 낙농가가 있고 치즈가 있다. 그러나 ‘다함께 살자’는 지정환 신부의 사상은 심상봉 목사를 매개삼은 금성리 주민들의 삶에만 도도하게 현존한다.

가난한 노인도, 망한 회사도 내버려 두지 않는다

방문객이 늘자 마을 주민들은 공동으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공동체·유기농·생협의 실험에 실패했지만, ‘치즈 체험’을 통해 그 모든 것을 되살리려는 더 거대한 실험이 시작됐다. 이들은 마을 복지 체계를 갖췄다. 마을 공동사업의 잉여금에서 아동복지, 노인복지, 장학기금 등을 마련해 쓰고 있다. 마을 노인들은 누구도 끼니를 거르지 않는다. 마을 회관에선 공동 기금으로 마련한 식사를 하루 두 끼씩 노인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한다.
 
마을에는 주민이 운영하는 4곳의 유가공 공장이 있는데, 최근 그 중 하나가 도산했다. 마을 주민들은 손실금의 일부를 마을 기금에서 충당하기로 결의했다. 마을 전체를 위해 일하다 개인사업에 손실이 생겼으니, 그 일부를 마을 공동체가 돕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이들은 잉여금의 일부를 임실군청에 ‘기부’했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게 아니라, 정부를 지원한 셈이다. 자신들보다 가난한 마을을 도우라는 취지다. 세상에는 이런 마을도 있다.

임실 치즈마을은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라 마을 스스로 보살피는 복지 시스템을 사상 처음으로 구현했다. 그들의 복지는 어린이·노인은 물론 도산한 마을 주민과 이웃 마을 주민까지 아우른다. 국가의 복지가 후퇴해도 치즈 마을의 복지는 전진하고 있다.

자발적으로 일하고 공평하게 나누고 마을은행도 운영 

복지제도와 별개로 소득분배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마을 입구에서 치즈 체험관까지 방문객을 실어 나르는 경운기가 있다. 환갑이 넘은 할아버지들이 몬다. 방문객들은 치즈 체험관에서 치즈 얹은 빵을 먹는다. 뒤쪽 주방에서 환갑이 넘은 할머니들이 음식을 준비한다. 다른 할머니들은 마을 곳곳의 쓰레기와 잡초를 치운다. 마을 운영위원회는 이 노인들에게 하루 1만~4만원의 일당을 지급한다. 도시의 지자체가 진행하는 ‘노인자활근로’와 비슷하지만, 확연히 다른 것이 있다. 치즈마을 노인들은 ‘스스로 의논해’ 차례를 정해 일한다. 돌아가며 일하는 마을 노인들은 항상 웃고 있다.
 
마을에는 ‘자치 농협’도 있다. 주민이 키운 감자·양파 등을 수매해 마을 공동 매장에서 판매한다. 주민에겐 안정적 수익을 제공하고, 판매는 마을 차원에서 책임진다. 복지 예산을 제한 나머지 마을 기금은 ‘마을 은행’ 역할을 한다. 주민 누구나 사업 아이템을 내놓으면, 기금운영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자금을 대출받는다. 수천만 원의 자금은 이자 없이 원금만 10년에 걸쳐 나눠 갚는다. 마을 식당, 민박센터 등이 이런 방식으로 지어졌거나 지어질 예정이다. 대신 그들은 수익의 5%를 마을에 낸다. 그 돈으로 다른 주민의 사업자금을 댈 것이다.

2009년 한 해 동안 마을 주민들은 공동사업으로 9억2천여만 원을 벌었는데, 이 가운데 62.5%에 달하는 5억7400만여 원이 이런 방식으로 치즈마을 주민에게 직접 ‘소득 형태로’ 분배됐다. 나머지 잉여금은 복지기금 및 마을은행자금 등으로 쓰인다.

새벽 3시까지 논쟁하는 작은 마을의 민주주의

이런 일이 가능한 바탕에는 민주주의가 있다. 마을 운영위원회는 2년마다 한 번씩 위원장을 선출한다. 모두 14명의 이사와 2명의 감사가 이사회에 참여해 주요 사안을 결정한다. 주민 75명으로 이뤄진 총회는 최고 결정 기구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과 미성년자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주민이 마을 운영위원회 총회에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회의는 저녁 7시에 시작해 새벽 2~3시 무렵까지 이어진다. 주민들은 직접민주주의를 지향한다.

마을 주민들은 요즘 한창 논쟁 중이다. 주민 개인의 창의성을 존중해 더 많은 ‘개별 사업’을 북돋울 것인지, 공동 사업으로 공동의 소득을 높이는 쪽에 더 신경 쓸 것인지가 마을의 최근 화두다. 내부 논쟁이 제법 치열하다. 낙농 사업이 마을의 부가가치를 높였지만, 이제는 논밭에서 농사짓는 다수 주민을 위한 ‘새 농촌 패러다임’ 개발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 논쟁에 이르러 치즈 마을 주민들은 21세기형 공동체 자본주의 모델을 궁리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공동체를 꿈꾸며 시골로 들어간 사람들이 전국 곳곳에 적지 않다. 그러나 치즈마을은 그런 ‘귀농 공동체’와 별 상관이 없다. 마을 정착 시점을 언제로 볼 것인지에 따라 다르지만, 223명 주민 가운데 200명 이상이 1990년대 이전부터 마을에서 나고 자란 토착민이다. 주민들을 이끄는 지도급 인사들 가운데 고학력자나 명망가는 아예 없다. 투박한 농촌 주민들이 한국 민주주의의 첨단을, 그것도 20여 년 동안 줄기차게 걸어왔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됐다. 그들처럼 잘생긴 민주주의 시민을 일찍이 만나지 못했다. 전북 임실 치즈마을이 이번 여름, 나에게 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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