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스쿨 인문교양특강]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주제: 구조와 사건으로 본 유신시대 ①

질곡의 현대사…오십대에 ‘원로’학자가 되다

“다칠까 걱정된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대학원생 시절, 현대사를 전공하겠다고 하니 지도교수로부터 돌아온 대답이다. 그는 유신과 광주라는 질곡의 세월을 경험하고 8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현대사 연구를 시작했다. 권력의 서슬 퍼런 감시에 그 말고는 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드물어 그리 많지 않은 나이(53)에도 현대사 분야에서는 ‘원로’에 속한다.

지도교수의 걱정과 달리 ‘크게 다치는’ 일 없이 지금껏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한 교수는 유신 40주년을 맞아, <한겨레>에 ‘유신과 오늘’이라는 글을 연재하고 있다. 유신시대라 불리는 박정희의 마지막 7년이 결과적으로 오늘의 한국사회 구조를 만들어냈다. 훗날 들어선 민주정권도 이때 만들어진 사회구조를 거의 바꾸지 못했다. 박정희가 존경받는 대통령 1위로 꼽히고, 딸 박근혜가 차기 대통령 유력 후보인 현실에서 유신은 엄연히 살아있는 과거다.

▲ 한홍구 교수는 박정희 유신 7년이 오늘 한국사회의 구조를 만들었다고 강조한다. ⓒ 허정윤
그러나 유신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지금 40대 이하에게는 좀처럼 실감하기 어려운 과거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나라 인구는 40대 이하가 약 2600만 명으로 총 인구의 절반을 넘는다. 한 교수는 유신의 현재성을 인식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거듭 강조했다.

“우리사회가 유신체제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1997년 대통령 선거입니다. 외환위기로 국가가 부도난 직후 선거가 있었죠. 부도 낸 세력에게 다시 정권을 맡기느냐, 아니면 다른 세력에게 정권을 맡기느냐,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권교체는 당연한 일이었어요. 또 한나라당에서는 이회창과 대통령 후보를 두고 경합하던 이인제가 경선에 불복해 탈당하고 대통령 선거에 나가 보수 유권자 500만표를 가져갔죠. 여기에 지역구도를 역이용한 DJP연합에, 김현철 스캔들까지 있었습니다. 이처럼 김대중은 선거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요인이 몇 가지나 있었는데도 이회창에게 1.6% 포인트, 40만 표 차이로 겨우 이겼어요. 유신의 망령은 여전히 한국사회를 떠돌며 우리의 무의식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진짜 ‘내란’의 시대

"유신 선포 이전,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따라 사회구조가 복잡해지면서 박정희는 그때까지 ‘미국식 민주주의’로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달았죠. 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는 박정희가 체질에 맞지 않는 미국식 민주주의라는 옷을 벗어 던지고 젊었을 때부터 익숙한 일본식 모델을 ‘한국적 민주주의’로 포장해 바꿔 입은 시기였어요. 유신체제가 불가피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실은 박정희가 권력 유지를 위해 일으킨 명백한 내란이었습니다."

헌법 기능을 정지시키고 내란을 일으켜 집권한 세력이 내란죄로 무고한 학생들을 처벌한 아이러니를 보여준 것이 1971년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 사건이다. 1971년 11월 중앙정보부는 서울대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모의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로 심재권, 이신범, 장기표, 조영래 4명을 구속했다. 당시 용의자 중 한 명이었던 김근태는 잡히지 않았지만 유신시절 내내 수배생활을 해야 했다.

사실 이들은 국가전복 같은 내란혐의와 거리가 멀었고, 박정희 독재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만들다 잡혔을 뿐인데도 검찰은 이들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후에 재판부는 반국가단체 구성과 예비음모 혐의는 무죄를 인정해 4명에게 각각 징역 1년6월에서 3년을 선고했다. 박정희 군사독재는 김근태와 그 동료들에게 내란음모라는 죄목을 뒤집어씌운 자들이 일으킨 진짜 내란의 시대였다.

▲ 강의에 집중하고 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학생들. ⓒ 허정윤
박정희와 이토 히로부미의 공통점

박정희 군사독재가 동시대 중남미 등 다른 나라에서 있었던 독재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박정희는 군복을 벗은 뒤 양복을 입고 독재를 했다. 이 말은 어찌되었든 선거를 치렀다는 뜻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미국이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 교수는 설명했다. 미국은 ‘군복 입은 독재’를 용인하지 않았다. 우리를 동서 냉전경쟁체제의 미국측 모델로 내세웠기 때문에 형식상 민주주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나마 남아있던 형식상 민주주의마저 뒤엎은 게 유신이었다.

유신은 헌법을 부정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헌법 1조 2항에 ‘주권재민원칙’이 있다. 유신헌법에는 주권은 국민에게 있지만 그 주권은 대표자를 통해 수행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2/3를 임명하고, 법률과 동등한 효력을 가진 긴급조치를 발동할 수 있었다. 대통령에게 입법권을 준 것과 다름없었다. 탱크가 동원되고 총을 든 군인들이 거리에서 행진했다. 유신체제에 비판적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는 기꺼이 폭력을 행사했다. 5•16 군사반란으로부터 11년 반 만에 박정희는 친위 쿠데타를 단행하여 다시 한번 헌정을 유린했다. 그러면서 종신집권의 길로 들어섰다. 한 교수는 역사의 큰 줄기를 파악하는 관점을 제대로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정희가 레닌의 책을 본떠서 쓴 책인 <국가와 혁명과 나>에는 재미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박정희는 이 책에서 5•16 군사반란이 조국근대화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모델로 제시한 이들이 메이지 유신의 지사들이었죠. 그 메이지 유신 지사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10월 유신도 이 ‘메이지 유신’에서 나온 말이죠.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와 박정희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10월 26일. 둘 다 같은 날에 총맞아 죽었죠. 친일파와 군사독재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근현대사는 그것에 대항해 싸운 역사였습니다. 역사란 이처럼 필연이 우연을 통해 살짝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납치 가담자 아들이 주한미대사로 부임

1972년 10월 26일 박정희는 유신 친위 쿠데타를 단행한다. 야당 의원들마저 잡혀가 고문을 당하는 현실에서 누구도 유신 반대를 외칠 수 없었다. 당시 선거기간 중 의문의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치료를 위해 일본에 가있던 김대중 홀로 반유신운동을 펼쳤다. 박정희는 김대중 입만 막으면 됐다.

“조폭 두목이 ‘저 놈 죽여라’ 지시하는 법이 없습니다. ‘나는 저놈만 보면 소화가 안 돼’, ‘나는 저놈만 보면 밥알이 곤두서’라고 사인을 주죠. 죽이라는 말을 안 해도 부하들이 알아서 합니다. 나중에 검찰이 ‘네가 시켰지’, ‘네가 교사했지’ 하면 그러겠죠. ‘나는 소화가 안 된다고 한 것뿐이라고.’ 원래 그런 겁니다. 박정희도 김대중을 죽이라고까지 지시한 것 같지는 않아요.”

▲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동아일보의 보도
김대중은 실제로 죽을 뻔했다. 납치 현장책임자였던 윤진원이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었다. 윤진원은 중정요원들에게 김대중을 넘기기만 하면 됐지만, 이들과 엇갈리면서 김대중을 떠맡게 됐다. 토막살인을 할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김대중을 죽였다간 탈이 날 것 같다는 생각에 윤진원은 김대중을 용금호에 실어 보내고 일본에서 잠적한다. 용금호는 그가 귀국할 때 밀항해서 오려고 대기시켜 놓은 배였다.

김대중 납치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지시를 받은 실무 총책임자 이철희가 윤진원을 일본 행동책으로 파견했으며, 실제 공작은 현지 중앙정보부원들이 수행했다. 당시 납치에 필요한 정보를 입수해 제공한 이가 일본 현지 중앙정보부 책임자이자 주일공사였던 김재권이다. 58년 KNA 비행기 납북사건 때 북한에 납치되었던 그가 십오년 뒤 납치에 가담한 것이다. 주한미국대사인 성 김이 그의 아들이다.

“성 김이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이 났을 때 신문에는 아버지가 김대중 납치사건에 관련이 있다는 정도로만 났어요. 관련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일본 책임자입니다. 그 사람이 입수한 정보를 갖고 가서 김대중을 납치한 거예요. 이건 우리가 문제 삼아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사가 피고인석에 서게 되는 유신의 사법체계

“유신 반대 운동이 일어나니까 서울법대 교수를 잡아다가 간첩으로 만들려 그랬어요. 저항하니까 고문했고 고문받다가 쓰러지니까 그 시신을 창 밖으로 던진 겁니다. 그러고는 간첩활동을 자백하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투신자살한 거라고 발표했어요. 이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은 유신 정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은 법정에서도 벌어졌다. 당시 재판장은 지금과 달랐다. 군인이 재판을 주도하고 법관들은 양 옆에 앉아 자문을 할 뿐이었다. 좌우 가장자리에는 칼을 찬 헌병들이 지키고 섰다. 유신헌법을 고치자고만 해도 영장 없이 체포해서 군사법정에서 징역 십오년 형을 때릴 수 있었다.

“민청학련 재판 때 학생들을 변호하던 강신옥 변호사가 변호를 하다 욱했어요. 그러면서 뭐라고 했냐면 ‘내가 변호인이라서 변호를 하지만 애들이 무슨 잘못이 있느냐? 내가 학생이었으면 똑같이 했을 거다’. 그랬더니 다음 번 재판부터 거기서 재판받게 했어요, 진짜로.”

‘변론이 문제가 돼 변호인이 끌려나가거나 변론이 제지당하고 두들겨 맞은 적은 있지만 다음 번 재판부터 재판을 같이 받으라는 적은 세계 사법사상 없었다’는 말에 강의실 곳곳에서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 교수는 “그게 유신 체제”라며 “유신 체제를 복잡하게 이해하지 말고 과연 저게 불가피했을까, 저게 왜 불가피했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북파 간첩이 만든 1차 인혁당 사건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이 집단사표를 낸 ‘항명파동’은 1964년 9월 10일 각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반공 사상 투철한 공안부 검사들이 인혁당 사건이란 걸 기소해야 하는데 중앙정보부가 ‘두들겨 패서 만든’ 진술로는 도저히 사건 구성이 안 된다며 양심적 기소 거부를 하다 결국 전원 사표를 낸 것이다. 마지막 순간 한 명이 중앙정보부에 보고하러 사라진 까닭에 뉴스는 결과적으로 오보가 됐다. 사라진 한 명은 중앙정보부 쪽으로 가서 출세했다. 한홍구 교수는 “이게 인혁당 사건의 전부”라고 말했다.

▲ 1974년 4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 연루자들이 법정에서 형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 경향신문 
1964년의 1차 사건과 74년의 2차 사건으로 인혁당 사건은 나뉜다. 1차 사건에서 최고 쟁점은 인혁당이 간첩을 만들었는지 여부였다. '간첩이 중심이 돼서 조직된 인혁당이 결성을 보고하러 북에 갔다’고 중앙정보부는 발표한다.

“간첩이 있었어요. 무슨 간첩이냐? 남파간첩이 내려와서 조직하고 올라간 게 아니라 남측 정보기관이 북으로 침투시킨 북파간첩이었던 거죠. 사건이 터졌을 때 그 사람이 북에 있었던 건 맞아요. 그런데 남한 간첩으로 북한에 올라갔던 거라고. 중앙정보부는 아무개가 북에 있다니까 덜컥 간첩이 (인혁당을) 조직했다고 발표한 거예요.”

인혁당 사건이 떠들썩해지자 북파간첩을 관리했던 중앙정보부 요원이 직접 자기가 간첩을 북에 침투시켰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이렇게 실체 없는 인혁당 조직은 10년 뒤 박정희의 입을 통해 재등장한다. ‘인혁당은 간첩이 조직한 거야’, ‘국가보안법으로 사형시키면 될 거야’… 연초 정보부처를 순시하다 문공부 강당에서 박정희가 고래고래 지른 말은 바깥에 있던 기자들도 다 들을 수 있었다. “얼마나 악을 썼으면……”하고 말꼬리를 흐리던 한 교수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지난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가 인혁당을 언급했습니다.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희생된 분들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그런데 이건 본의죠. 살의죠. 유신체제에 있었던 사법살인입니다.”

그 새벽의 사법살인, 2차 인혁당 사건

2차 사건의 당사자 인혁당재건위는 공소장에도 없는 조직이었다. 인혁당재건위 서울지도부에 준하는 단체, 경북지도부와 부산지도부에 준하는 단체 등 세 반국가단체의 사람들을 묶은 것뿐이다. 특무대 중사 출신 하재완이 적은 이북 방송 녹취록을 돌려 본 것이 실체의 전부였다. 한 교수는 이 때 7.4남북공동선언으로 통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는데 이북에서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해 이 사람들이 방송을 들었던 거라고 말했다.

“기소유예감이거나 엄하다 해도 반공법으로 징역 6개월, 1년 정도 살았으면 ‘이 양반들 고생 좀 했구나’ 했을 사건을 정권이 위기에 몰리니까 어마어마한 사건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기소된 사람들에게 일년 동안 면회도 금지되었다. 대법원 사형 판결이 선고된 뒤 다음날 면회시켜주겠지 했는데 사형은 새벽 4시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새벽에 일어난 사법살인에 8명이 무고하게 목숨을 잃었다.

“이자들이 사형시킨 다음에 가족들에게 시신을 돌려주지 않았어요. 강제로 화장시키려 했죠. 가족들이 난리를 치고 영구차를 가로막고 그랬습니다. 막다 막다 도저히 안 되니까 젊은 신부님이 차 앞에 드러누웠어요. 근데 차가 그냥 타고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그 신부님이 30대부터 지팡이를 짚고 다녔죠. 문정현 신부입니다. 지금도 (강정마을에서) 싸우고 계시죠.”

박정희의 언론장악은 현재진행형

▲ 1960년 4월 12일 부산일보가 보도한 김주열 열사의 사진.
“이게 그냥 장학회 사건이 아니에요. 언론을 가진 겁니다. <부산일보> <부산문화방송> <한국문화방송> 언론 3사를 빼앗은 거예요.”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은 1960년 4.19혁명 발발의 촉매였다. 고 김주열 열사의 사진이 <부산일보>를 통해 보도되었고 <부산문화방송>이 3.15의거를 생중계하면서 혁명이 전국으로 확산됐다. 그때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는 혁명 속에서 언론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당시 부산일보 주필로 있던 황용주도 언론 장악에 한몫 거든다.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인 그는 국영방송과 정부기관지 말고 정부 편들어줄 민간 언론이 필요하다며 박정희를 꼬신다.

박정희 정권은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이준구에게 <경향신문>을, 김지태에게 부일장학회를 넘겨받았다. <한국문화방송> 주식 100%, <부산문화방송> 주식 65.5%, <부산일보> 주식 100%를 소유한 부일장학회는 ‘5.16장학회’였다가 박정희가 죽고 난 뒤 ‘정수장학회’로 이름이 바뀐다.

그런데 정수장학회가 현재 소유한 <한국문화방송> 주식이 100%가 아닌 30%인 이유는 무엇일까? 71년 대선 당시 김대중은 5.16장학회를 가리키며 박정희가 몇 천억대 재산을 가졌다고 비판했고 그 소리가 듣기 싫었던 박정희는 선거 뒤 기존 <문화방송> 자본금 3억원에 재벌들한테 뜯어 마련한 7억원을 더해 10억원짜리 회사로 만든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5.16장학회는 준 국가재단으로 있었습니다. 정권 잡은 전두환이 <문화방송> 주식 70%를 빼앗아 <한국방송>에 줬다가 방송문화진흥회에 넘겼고, 남은 30%를 박정희 유족들에게 준 겁니다. 박정희, 육영수 두 양반은 동전 한 닢 낸 적 없습니다.”

<한국문화방송> 자본금은 여전히 10억원이다. 상장되면 시가총액이 10조원, 많이 잡아서 20~30조원은 될 거라며 한홍구 교수는 정수장학회가 지분을 소유한 이상 <문화방송>은 공영방송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95년 김영삼 정권 때 이 문제를 풀려고 했으나 그걸 막기 위해 박근혜가 이사장으로 전면에 나서면서 해결되지 못한 채 있다. 

▲ 고(故) 김지태 씨 소유였던 정수장확회는 현재 부산일보 주식의 100%, 문화방송 주식의 30%를 소유하고 있다.
박근혜가 물려받은 재산은 얼마나 될까? <문화방송>이 상장될 경우 주식 30%를 가진 정수장학회는 적어도 3조~6조 정도를 갖게 된다. 여기에 <부산일보> 소유권까지 생각하면 정수장학회만 해도 수조원이다. 한 교수는 “영남대가 대구시내와 외곽에 백만평 가까운 땅을 갖고 있고 육영재단은 서울시내 어린이 대공원을 소유했다”며 “대공원 4만평 땅이 개발된다 치면 4~5조원이 되고 공시지가로 묶여있는 것만 쳐도 1조원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재단”이라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청렴한 지도자입니까? 집권할 때 낡은 가옥 한 채 갖고 있던 장군이 18년 집권 뒤 자녀들에게 십조원대 재산을 관리할 수 있게 물려줬다면 이거야말로 한강의 기적이죠.”

한홍구 교수는 “정수장학회 문제는 재산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한국 언론이 어디로 가느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독립한 <경향신문>은 정수장학회에 토지사용료를 내고 있으며 빠져 나오지 못한 <부산일보>는 숙명적 여당지가 됐다. 편집국장 선출제를 따내며 편집권 독립을 이룬 <부산일보>지만 지난 11월 30일 사장의 독단에 윤전기가 멈췄다. 박근혜 비판 기사가 실리자 사장단이 신문 발행을 막은 것이다. 그 뒤 제2의 편집권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편집국장이 잘리는 등 사태가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올해 초 KBS MBC YTN <연합뉴스> <국민일보> <부산일보> 등 한국 언론 여섯 곳이 한꺼번에 파업을 했잖아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 뿌리가 정수장학회, 곧 박정희의 언론 장악에 있는 겁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학기 <인문교양특강II>는 이주헌, 이권우, 한홍구, 장승구, 김진석, 신형철, 정희준 선생님이 강연을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의를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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