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용산참사 25시간의 기록 ‘두 개의 문’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 그로 하여금 당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히 ‘생각 없음(thoughtlessness)’이었다.”

 

▲ 망루 농성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경찰 특공대원들. ⓒ '두 개의 문' 캡처

용산 다큐 <두 개의 문>이 대중영화 100만과 맞먹는 독립영화 관객 1만 명을 개봉 8일 만에 돌파해 <워낭소리> 이후 최단기간 흥행기록을 세웠다. 지난 달 21일 개봉 뒤 한 달 만에 누적관객수 5만(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 7월 20일 기준 53,028명)을 넘어선 화제작인 동시에, 일반적인 흥행작들과 달리 누리꾼의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뉘는 문제작이다.

‘두 개의 문’ 앞에 선 ‘우리 안의 아이히만’

영화의 묵직한 메시지를 곱씹기 위해 다시 극장을 찾는 관객도 더러 있다는 <두 개의 문>을 보면서, 한나 아렌트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떠오른 건 왜일까? 뉴요커지 기자였던 아렌트가 나치전범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통해 진실에 다가간 것처럼, 김일란 홍지유 감독 역시 생존 철거민에게 유죄를 판결했던 법정기록을 바탕으로 용산참사의 실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수 백만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아이히만이 도착적이고 가학적인 괴물이 아니라 자상하고 평범한 가장이었듯, ‘그날’ 농성자들을 진압하러 ‘그곳’에 투입된 특공대원들도 누군가의 훌륭한 아들이자 남편, 아버지여서?

“그렇다면 내가 맡은 일을 불성실하게 처리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당신이 하는 일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낄 수 없다는 말이오?”
“만일 내가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으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입니다."

 

▲ <두 개의 문>은 경찰의 과잉진압이 참사를 불러왔다고 설명한다. ⓒ 연분홍치마

<두 개의 문>에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맴도는 것은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평범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악은 도덕적 죄가 아니라 자기 일에 묵묵히 복무하는 평범한 인간의 무감각이다.’ 아이히만이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직업인으로 주어진 명령에 복종했던 것처럼, 망루에서 발생한 첫 번째 화재로 잠시 후퇴했던 대원들은 위험을 느끼고도 다시 명령이 내려지자 진압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악이 일상의 평범함을 가장해 벌어졌다고 해도 결코 용인될 수는 없는 법. 김형태 변호사가 특공대원에게 무리한 진압임을 직감하고도 왜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는지 추궁하는 장면에서 돌아온 대답은 ‘그날 그곳’에 악의 평범성 이상의 무엇이 더 동원됐음을 짐작하게 한다. 옥상에 나 있던 ‘두 개의 문’ 가운데 어느 것이 망루로 통하는지조차 미리 파악하지 않았던 성급한 진압. 현장에서 느낀 위험성을 보고할 틈도 없이 예고된 화염 속으로 대원들을 재차 투입했던 이기적 진압. 크레인 기사의 잠적으로 애초 계획과 달리 컨테이너 하나로 강행했던 무리한 진압. 

‘악의 평범성’을 동반한 ‘적개심’

그날의 작전은 토끼 몰리듯 옴짝달싹 못한 망루 속 철거민은 물론, 위험을 뻔히 알고도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던 특공대원들에게도 ‘과잉진압’이었던 것이다. 영화 <두 개의 문>은 용사참사에 대한 사회적 심판에서 가해자였던 경찰특공대원들이 진짜 가해자인지 되묻고 있다. 그날 그곳에는 불복이 쉽지 않은 상명하복 체계에서 악의 평범성이 작동했고, 대원들은 ‘적개심을 명령 받았다’.

2년 여에 걸친 법정공방과 대법원 판결에서도 결국 밝혀내지 못한 발화점은 어쩌면 악의 평범성을 동반한 그 ‘적개심’이었으리라. 진압현장에 있었던 대원의 증언대로 ‘지옥’과도 같았던 2009년 1월 20일 새벽, 남일당 망루와 컨테이너, ‘두 개의 문’ 앞에 있던 모두가 피해자였다.

 

▲ 영화는 특공대원의 증언을 중심으로 용산참사의 진실을 드러낸다. ⓒ '두 개의 문' 캡처

평론가와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얘기하면서 빼놓지 않는 것이, ‘억압당하는 자’의 목소리를 전면에 내세우던 기존 다큐멘터리와 달리 <두 개의 문>은 ‘억압하는 자’의 목소리를 통해 진실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억울하다’는 철거민의 낮은 소리 대신, 특공대원의 증언과 명령을 내리는 수뇌부의 육성으로 공권력의 엄혹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두 개의 문>이 다큐멘터리 영화의 새로운 문법을 시도한 것에 대해 김일란 감독은 “생존을 위해 오히려 위험한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철거민의 메시지를 굳이 강요할 필요가 없었다”며 “용산참사는 관객에게 목격자의 경험을 주는 걸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두 개의 문>은 기록 그 자체로, 관객에 별다른 설득이 필요 없을 만큼 그날의 진압이 무자비했음을 증명한다.

조국 교수 “진압 매뉴얼도 무시한 무관용 원칙”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한 극장에서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한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조국 교수는 “영화 속 어느 경찰 경감이 ‘협상과 중재가 과연 경찰의 영역이었나’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현재 우리나라는 강력한 형벌로써만 법질서를 유지하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경직된 공권력 집행이 이명박 정부의 ‘무관용 원칙’과 무관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 영화 상영 직후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왼쪽부터) 홍지유 김일란 감독, 조국 교수, 이송희일 감독. ⓒ 정혜아

“용산참사에는 형사정책상의 무관용 처리와 재판과정의 불합리성이라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불법점거 상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일명 ‘단•무•지’식으로 처리했다는 점이죠. 망루에 오르기까지 농성자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무엇을 요구하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는 불법을 저질렀으니 그저 축출 진압되어야 한다는 식인데 이 무관용의 형사처리가 과연 옳은가 말입니다. 또 시민은 부당한 경찰진압이나 공무집행에 대해 거부할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돼 있지만, 용산재판은 경찰진압이 절대적으로 합법적이었다는 전제하에 진행됐다는 점입니다. 검찰은 재판 초기 불리한 수사기록 삼천여 쪽을 제공하지 않는 불법을 저질렀는데도 말이죠.”

그는 불법점거를 진압하는 데도 매뉴얼이 존재하지만 용산참사에 동원된 경찰들은 그 기본적인 절차조차 밟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일차적으로 정보과 형사가 점거자대표를 만나 교섭을 시도하면서 농성현장의 상황을 파악하고 정보를 모으는 과정, 협상이 여의치 않을 경우 전문경찰인력이 농성당사자의 가족이나 지인들을 통해 불법점거를 그만두도록 회유하는 단계, 그리고 마지막이 일명 ‘강성인자’들을 진압할 경찰특공대를 투입하는 단계라는 것이다. 강제적 진압은 필연적으로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말 그대로 최후에 동원되는 수단인데, 용산의 경우 전 단계가 생략된 채 농성 하루 만에 특공대원들이 진압에 나선 것이다. 

 

▲ 철거민 5명과 특공대원 1명의 목숨을 앗아간 남일당 망루 진압. ⓒ '두 개의 문' 캡처

 

관객들의 각성 “국민은 정부에 얼마나 더 관용해야 하나?”

김일란 감독은 ‘두 개의 문’이라는 영화제목이 성급했던 그날의 진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지만 “관객들 앞에 놓인 두 개의 문이기도 하다”고 했다. 목격한 진실에 개입할 것인가, 방관할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시민들이 언제까지 관용할 수 있는지’ 묻던 영화 속 용산참사대변인의 마지막 말은 지금 두 개의 문 앞에 서있는 관객들에게 의미심장하다. 법과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이유로 이명박 정부는 국민에게 관용하지 않는데, 국민은 정부에 얼마나 더 관용할 수 있을까?

지난 20일 오후 8시 남일당 건물터에서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의 제안으로, 2010년 1월 이후 다시 촛불이 모인 것이다. 유가족과 철거민, 시민 등 400여명(경찰 추산 230여명)은 2시간 동안 촛불을 밝히며 ‘두 개의 문’의 진실을 요구했다. 시민들은 구속 철거민의 8•15사면을 촉구하는 '청와대 엽서보내기 운동'에 동참했고, 진압 작전 최고지휘관인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에 대한 고발장 150여장을 작성했다.

참사현장 인근 극장에서 <두 개의 문>을 본 시민들이 남일당 터를 찾아 헌화하는 등 영화가 흥행할수록 관객들의 자발적 추모행동은 늘고 있다. 남일당 건물과 함께 ‘두 개의 문’은 사라졌지만, 영화를 통해 다시 ‘두 개의 문’ 앞에 선 시민들은 현장을 보고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무엇이 그리 급했을까?’ 남일당 건물 일대 용산4구역은 지난해 초 철거가 마무리됐지만, 추가분담금 문제로 사업추진이 지연돼 아직도 빈터로 남아있다.

 

▲ 영화 <두 개의 문>을 본 시민들의 자발적 추모행동이 이어지고 있다. ⓒ 연분홍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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