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칼럼] ‘위기를 성공으로 이끈 선전’… 진보언론 뭘 했는지
71%가 진보·중도인데, ‘좌로 쏠린 야권연대가 패인’?

▲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장

새누리당 이준석 비상대책위원이 ‘앵그리 버드’ 인형을 들고 박근혜 위원장 바로 옆에 앉아 개표방송을 보는 장면이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았다. 이에 앞서 홍준표 전 대표는 ‘홍그리 버드’로 분장해 새누리당의 ‘파격적 변신’을 홍보했다. 언론들은 ‘청년의 귀여운 행동’ 또는 ‘전 대표의 헌신’ 정도로 보아 넘겼으나, 두 장면에는 고도의 홍보선전술이 숨어 있다.

‘앵그리 버드’는 핀란드 게임업체가 만든 캐릭터로 ‘알을 훔쳐 먹는 돼지에게 화를 내는 어미 새’를 그린 것이다. 여기서 돼지는 기득권층을 상징한다. 원래 ‘부자 정당’ 하면 한나라당을 연상했는데, 새누리당은 그런 이미지에서 멋지게 탈출했다. 99%가 화를 내야 할 판국에 1%가 오히려 ‘앵그리 버드’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수세를 공세로 전환하는 적반하장의 수법이다.

파란색을 상징색깔로 삼던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개명하면서 유럽 등지에서 진보당을 상징하는 빨간색까지 차용해버렸다. 영국 노동당은 1900년 창당 이래 빨간색을 상징색깔로 써왔고 보수당은 파란색으로 맞서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레드 콤플렉스’를 피하기 위해 민주노동당이 주황색, 통합진보당이 보라색을 쓰는 사이, 보수정당이 마케팅 효과가 가장 크다는 빨간색을 선점한 것이다.

새누리당의 전략은 일단 전선을 복잡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1% 부자와 99% 서민의 현실이 너무나 다른 양극화 시대에 피아 구분마저 모호해진 것이다. ‘이념의 시대가 갔다’고 끊임없이 써댄 보수언론의 주장이 실현된 걸까?

<한겨레>와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대선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새누리당의 이념성향을 진보로 본 응답자가 25.4%에 이르고, 중도 19.3%, 모름·무응답 5.8%, 보수 49.5%로 나타났다. 이 점에 <한겨레> 보도(23일)가 주목하지 않았으나, 겨우 절반 정도만이 새누리당을 보수정당으로 바로 알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유권자의 이념성향은 진보(36.4%)와 중도(34.6%)가 보수(26.1%)를 압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진보 또는 중도인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데도 무조건 또는 무지로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계급배신’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번 총선 결과를 놓고 언론은 야권연대의 전략 부재와 지도부의 무능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나, 언론의 책임 또한 가볍지 않다고 본다. 정당의 정책 검증이나 후보의 정치적 자질 대신 이미지 선거를 부추긴 보수언론에 견주면 <한겨레>는 그런대로 선거 보도 원칙을 지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선 주자들 동선 위주 보도 행렬에서 열외가 없었다.

이미지 선거에서 발군의 실력을 뽐내고 득을 본 것은 박근혜 위원장이었다. 부모를 모두 총탄에 잃고 이명박 정권 실세 등 ‘마초’들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 당을 재건하기 위해 손에 붕대를 감고 전국을 뛰는 모습은 인기 드라마 주인공 이상이었다.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유세장에 들렀다가 나이 든 남녀 청중에게 ‘왜 박근혜를 지지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불쌍하잖아요.” 그것으로 ‘선거 끝’이었다. 스포츠스타든 정치인이든 팬이 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 좌우된다.

“제주해군기지, 한-미 에프티에이(FTA), 모두 자기들이 시작해놓고 말 뒤집는 야당에게 어떻게 나라를 맡기겠습니까?” 박 위원장의 연설 내용은 전국 어디서나 거의 똑같았고 그가 던진 메시지는 그의 내면적 깊이나 한국 사회 주요 이슈에 대한 소신을 제대로 알 수 없을 만큼 단순한 것들이었다.

 

 

한명숙·문재인 등은 노무현 정부의 적장자들이었으니 참여정부의 업적만 물려받을 게 아니라 과오에 대해서도 반성하고 선거에 임하는 게 옳았다. 그런 절차 없이 선거판에 그 이슈들을 끌어들인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야당 지도부가 강원·충청도를 소홀히 한 채 한명숙 대표가 제주도를 두 번이나 방문한 것은 상대방 선거운동을 도와주는 격이었다. <한겨레>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제주해군기지 문제를 계속 이슈화했는데, 옳고 그름을 떠나서 총선 국면에서는 보수표 결집을 부추겼을 가능성이 높다.

말이나 이미지를 장악하면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강제력 없이도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게 헤게모니 싸움이다. 나치 선전상 괴벨스가 말한 대로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 괴벨스는 “위기를 성공으로 이끄는 선전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예술”이라고 말했는데, 지금 한국 상황을 보고 한 말처럼 들릴 정도다.

언론들은 ‘유권자가 차려준 밥상을 야당이 차버렸다’고 비판하지만, 언론 역시 ‘차려진 밥상’ 보듯 선거판을 읽은 느낌이 든다. <한겨레>는 9일치 신문에 정치전문가 패널 28명 중 22명은 민주통합당, 5명은 새누리당이 제1당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고 보도했다. 결과적으로 오보가 됐는데 보수층 결집에 기여했을 수도 있다.

여론조사나 전문가조사에 의존하는 판세분석 보도는 왜곡된 여론을 더욱 증폭시키거나(밴드왜건 효과), 불리해 보이는 쪽으로 표를 결집시키는(언더독 효과) 현상을 초래하기 때문에 선거를 통한 ‘진정한 민의’ 수렴에 장애가 된다. 어느 정도 흥미롭게 보도하는 게 신문의 숙명일지 몰라도 <비비시>(BBC)나 국내외 극히 일부 신문이 판세보도를 삼가려는 노력을 눈여겨봤으면 한다.

진보언론 보도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보수정당이 다시 의회를 장악하면 계속될 한국 사회의 퇴행현상을 절실하게 설명해주지도 못했고, 의회권력이 교체됐을 경우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어떻게 나아질지 그려주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막판에는 ‘김용민 막말 파문’을 최대 이슈로 만들려는 보수언론에 맞서 ‘문대성’과 ‘김형태’ 이슈를 대서특필했는데, 부작용은 정책선거의 완전실종이었다. 재벌·언론·사법개혁과 양극화 해소 등을 향한 대중의 열망도 함께 사라졌다.

야당의 선거 패인 분석에서는 ‘중도가, 좌로 쏠린 야권연대 지지를 주저했다’는 식의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 포함된 기사들(16일치, 총선 평가 토론회 등)이 나왔다. ‘정권심판론 피로증이 패인’이라는 시각과 ‘안철수 이외 대안 없다’는 ‘주술적’ 전망도 있었다. 그런 패인 분석은 일리가 있지만 향후 야권연대와 '정권심판론’ 자체가 위축돼서는 안 될 것이다. 선거 사상 초유의 ‘야당심판론’이 대선에서도 먹혀들 가능성이 있다. 진실을 말한 패배자가 비판받는다면 괴벨스식 ‘정치예술’은 앞으로도 우리 정치판을 휘저을 것이다.


 

* 이 기사는 <한겨레>와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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