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봉하마을 노무현 사저 설계자 정기용의 삶, ‘말하는 건축가’

개발이 삶을 집어삼키고, 건축이 대자본의 하수인이 된 시대. 김성희 등의 <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 따르면 1961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추진하면서 주민 12만 명이 경기도 광주로 강제 이주했고, 황무지였던 그곳에 하루 수십 명이 굶어 죽는 거대 난민촌이 형성됐다. 서민 아파트를 짓겠다던 83년 서울 목동 재개발은 고급 아파트단지로 계획이 바뀌면서 투기판으로 변질됐고, 주민 3만여 명이 저항하는 과정에서 3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지난 2009년 1월에는 망루에 오른 서울 용산4지구 철거민을 진압하기 위해 특공대가 투입되면서 철거민 다섯과 대원 하나가 숨졌다. 재개발 재건축이 제물로 삼은 ‘생명’이 한 둘이 아니다. 

▲ 자본에 의한 무자비한 도시건축은 숱한 생명을 앗아갔다. ⓒ 말하는 건축가

몰인정한 토건의 시대에 어쩌면 그 ‘앞잡이’로서 떡고물을 즐길 수도 있는 건축가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건축은 인간의 문제를 담는 것이므로 윤리적이어야 하며, 건축가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묻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 사람이 있었다. 

“사람과 삶 없이는 건축도 도시도 없다.”

70년대 말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건축가 정기용이 ‘새마을운동’의 구호아래 ‘갈아엎고 지어 올리는’ 도시개발에 열을 올리던 세태를 보며 던진 말이다. 그는 사유지에 세워지는 건축물이라고 해도 결국은 ‘지구 위’에 세워지는 것이므로 건축은 태생적으로 공공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건축은 개인의 작품에 국한되지 않는 ‘윤리적 실천’으로 다뤄야 한다는 게 그의 믿음이었다.

▲ 사람과 자연을 소외시키지 않는 공공건축을 지향한 정기용 건축가. ⓒ 말하는 건축가

지구상의 모든 건축물은 공공성을 갖는다

‘건축은 거기 깃들이는 사람과 자연을 소외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그의 평생 작업 속에 구현됐다. 그는 시골사람들의 생활습관을 반영해 남녀가 짝•홀숫날 번갈아 사용하는 목욕탕을 지었고, 관중석에 근사한 등나무 그늘이 있는 공설운동장을 만들었고, 시공부지에 원래 있던 나무를 살리려 가운데가 뻥 뚫린 도넛모양의 도서관을 설계했다. 10년에 걸쳐 완공된 전북 무주군의 무주공공프로젝트와 문화방송(MBC) 사업으로 순천, 김해 등 6곳에 세운 ‘기적의 도서관’, 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봉하마을 사저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 등나무로 그늘을 만든 공설운동장과 나무 주위로 빙 둘러 만든 도서관은 자연을 배려한 정기용의 건축철학을 보여준다. ⓒ 말하는 건축가
지난해 3월 11일 대장암으로 작고한 그의 마지막 1년 3개월을 다큐멘터리로 담은 영화가 지난달 8일 개봉됐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정재은 감독이 만든 <말하는 건축가>다.
영화 속에서 정기용은 끊임없이 말한다.

“건축은 원래 거기 있던 사람들의 요구를 공간으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건축은 쓸 사람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 건축은 '쓸 사람에게 물어봐야 된다'는 신념을 지닌 정기용에게 말은 또다른 설계과정이다. ⓒ 말하는 건축가 
사실 오랜 투병으로 쇠약해진 노건축가의 음성은 성대결절로 가래가 끓고, 거칠고, 낮아서 듣기가 편치 않았다. 휴대용 마이크도 그의 잦아드는 목소리를 살려내기가 힘겨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기용은 ‘말하는 건축가’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영화 초반, 2년 만에 다시 찾은 무주에서 공설운동장을 둘러싼 등나무 옆에 볼썽사납게 설치된 태양열 집열판을 보고 거친 욕을 내뱉는다. 재생에너지를 만든다며 설치한 태양열 판이 오히려 등나무로 갈 해를 가린다며 “녹색을 망치는 게 무슨 녹색성장이냐”고 분개했다. 

그는 2007년 이후 서울시가 역점사업으로 추진한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주저하지 않았다. 디자인플라자는 당시 국내외 유명 건축가 4명씩 총 8명이 설계 경연을 벌였고, 이라크 출신의 영국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최종설계자로 선정돼 오는 7월 완공될 예정이다. 정기용은 하디드의 건축이 동대문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고 역사를 고민하지 않은 ‘파괴적 건설’이라고 비난했다. 자본과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추진된 ‘건설’은 인간을 위한 ‘건축’과 다르다고 그는 목청을 높였다.

▲ 정기용은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가 권력과 자본을 앞세운 '서울시의 자존심' 건설이라고 일갈했다. ⓒ 말하는 건축가 
그렇다면 정기용 자신은 어떻게 ‘인간을 위한 건축’을 실천했을까. 90년대 중반 무주군수가 그에게 ‘농촌에 맞는 건축’을 부탁했을 때, 그는 제일 먼저 동네 주민들을 만나러 다녔다. 일 년에 몇 번 버스를 대절해서 대전으로 단체 목욕을 다닌다는 주민들의 이야기에서 홀숫날은 남탕이 되고 짝숫날은 여탕이 되는 전국 유일의 면사무소 목욕탕이 탄생했다. 96년부터 10년간 무주군청과 공설운동장, 향토박물관 등 30여 채의 공공건물을 지은 무주프로젝트는 이런 식으로 지역의 ‘삶’과 ‘자연’ 그리고 ‘문화’를 고스란히 살려냈다. 

영화에 등장하는 정기용의 동료와 비평가들은 “정기용이 건축 설계를 잘하는 건축가는 아니다”고 회고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는 ‘국외자(아웃사이더)’였던 그에게 건축학적 완결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면사무소 목욕탕 앞에 모여 앉은 동네 주민들의 느긋하고 평화로운 풍경이 그가 설계한 건축의 최종안이 아니었을까. 정기용은 건축의 본질을 알기에 건축을 숭배하지 않았고, 볼거리 보다 두고두고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인생을 위로하는 건축, 자연으로 돌아가는 건축

<말하는 건축가>는 건축 예술에 관한 다큐멘터리임과 동시에 한 건축가의 마지막 나날을 담은 휴먼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정기용은 급격히 쇠약해진 몸으로 강원도 춘천의 자두나무집에 간다. 딸을 잃고 ‘아무도 없는 곳에 숨어살고 싶다’는 지인을 위해 10년 전 지어 준 그 집에서 정기용도 위로를 받았다. 나지막한 지붕은 주변의 논밭과 조화를 이루고, 마당 한 편 주인 딸의 무덤과 집안 구석구석을 고루 감싸는 햇빛은 기력을 잃고 그 안에 기대앉은 사람들은 따스하게 어루만졌다.

작고하기 며칠 전 침상에 누운 채 기용건축 직원들과 나간 봄나들이에서 ‘말하는 건축가’는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고맙습니다. 나무도 고맙고, 바람도 너무 고맙고, 하늘도 고맙고, 공기도 고맙고,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 건축학적 완결보다는 인간과 자연을 위한 건축을 위해 헌신했던 '말하는 건축가' 정기용은 지난해 3월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자연으로 돌아갔다.  ⓒ 말하는 건축가 
이제 돌아가야 할 순간이라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슬프지 않고, 그저 모든 것이 고마운 노건축가. 그의 마지막이 왜 그토록 평화로웠는지는 영화의 마지막, 무주 주민들에게 건축 재료로 아끼던 흙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건축은 영원하지 않거든요. 어느 정도 쓰고 또 사라지고 새로 짓고. 근데 사라질 때 현대 건축의 문제는 그게 다 쓰레기가 된다는 거예요. 근데 흙 건축은 사라질 때 깨끗하다. 왜? 그냥 흙으로 돌아가 버리니까. 어디로 가져갈 필요도 없이, 그 자리에서 그냥 흙으로 돌아가는 그런 깨끗한 죽음을 가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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