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섭의 미디어스타]
박 앵커의 공명음은 학창시절부터 돋보였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습관적으로 틀어놓은 라디오 뉴스를 들으면서 앵커 흉내를 냈고, 이때부터 일찌감치 아나운서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의 목소리는 중․고교 수업시간에 자주 낭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훈련되었다. 특히 고교 국어시간에 선생님은 유독 목소리가 우렁차고 전달력이 좋은 박혜진에게 대표로 자주 책을 읽게 했다. 맑은 목소리가 교실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고 한다. 방송으로 진로를 잡은 데는 9살 많은 언니 지영 씨의 영향 또한 적지 않았다. 지영 씨는 1989년 ‘미스 춘향 선’에 당선된 뒤 같은 해 MBC 19기 공채 탤런트가 됐다.
그는 스타의 반열에 선착한 선배 김주하, 입사 동기 최윤영 앵커의 휴가나 출장 기간에 종종 <뉴스데스크>의 '대타 앵커'로 투입됐다. 그러면서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박혜진의 모두가 사랑이에요>(표준FM), <MBC 줌인 게임천국>(TV), <우리말 나들이>(라디오), <생방송 화제집중>(TV))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맡으면서 방송 감각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중 2004년 11월 <MBC 주말 뉴스데스크>의 앵커로 발탁됐다.
‘잘 할까’하는 초심자에 대한 우려는 금방 사라지고 “MBC에서 뉴스 전달력과 장악력이 가장 뛰어난 여성 앵커”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후 자연스럽게 평일 <MBC 뉴스데스크>로 자리를 옮겨 2009년 4월 개편 때까지 뉴스 앵커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다른 구성원들의 사기를 고려해 특정인에게 후한 평가를 잘 하지 않는 MBC 고위 간부들도 ‘박 아나운서는 클래식한 분위기에 목소리가 우렁차고 명확한 데다 외모도 신뢰감을 주어서 공영방송 뉴스 앵커로서 적격’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최고의 앵커 자리에 오른 것이 뛰어난 목소리나 외모 덕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뉴스를 자기 것으로 완전히 소화하려는 끈질긴 노력이 숨어있었다. 그는 앵커가 되기 전부터 매일 여러 신문의 뉴스를 주제별로 비교하며 꼼꼼히 읽고, 시사감각을 기르기 위해 관련 서적을 뒤졌다고 한다. 뉴스 아이템과 원고가 올라오면 현장 기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의문점을 낱낱이 풀고, 전달자로서 중심을 어떻게 잡아야할지 고민했다. 취재 경험이 없는 앵커이기에 더더욱 노력했다고 한다. 이런 소통 때문에 MBC 기자 들 중에 그의 팬이 된 사람들도 적지 않다.차분하고 정제된 성품과 자기관리도 그가 신뢰받는 앵커로 자리 잡는 데 한몫했다. 그는 다른 젊은 방송인들과 달리 이 곳 저 곳에 얼굴 내미는 일을 철저히 자제했다. 뉴스 외의 일에는 자신의 초상(肖像)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상업적 어필은 더더욱 금기시 했다. 사생활 관리 역시 철저했다. 여러 매체의 인터뷰 요청에도 잘 응하지 않았다. 방송담당 기자들이 ‘지나친 신비주의가 아니냐’는 불만을 쏟아낼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프로다운 앵커가 되려는 ‘근성’과 언니의 후광을 극복하고자 했던 ‘오기’가 숨어있었다고 한다.
그는 언론사의 구성원으로서, 뉴스를 자신의 심장과 영혼처럼 여기는 앵커로서, 공정하고 독립적인 방송에 대한 소신을 분명히 해서 주목받았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MBC 노조의 ‘방송장악 저지 파업’을 지지하는 입장을 뉴스를 통해 간결하게 설명하고 파업에 동참했다. 그의 클로징 멘트는 뜨거운 논란 속에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징계를 받기도 했다.
박 앵커는 결국 신경민 앵커와 함께 <뉴스데스크>를 떠났지만 그에 대한 시청자의 기대는 여전하다. 그는 멋진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뤘고 신혼의 행복과 안정감을 바탕으로 더 좋은 뉴스, 제 몫을 다하는 공영방송을 만들기 위해 재충전에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박 앵커의 특장인 공명음을 달리 풀이하면 ‘함께 어울리는 소리’, ‘시청자와 소통하고 교감하는 소리’다. 지금 그는 멋진 컴백을 준비하면서, MBC 표준FM ‘박혜진이 만난 사람’을 통해 시청자들과 ‘공명’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김정섭 / 성신여대 방송영상저널리즘스쿨 원장, 전 경향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