멎은 줄 알았던 ‘유신의 심장’이 뛰고 있네
[저널리즘스쿨 인문교양특강]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주제: 구조와 사건으로 본 유신시대 ②
32년 전 오늘, 유신이 끝난 게 아니었다
"유신이 시작된 1973년에 태어난 사람들이 올해 마흔입니다. 제가 태어나기 40년 전에는 삼일운동이 있었어요. 제게 삼일운동이 그렇듯, 지금 세대에게 유신은 상당히 먼 시대 이야기처럼 들릴 겁니다. 하지만 삼일운동이 내 삶에 미친 영향보다 여러분의 삶에 유신이 미친 영향은 더 큽니다."
“아직도 애국가가 나오면 무의식 중에 몸이 멈춥니다. 그럴 때마다 내 몸이 유신이 기억하고 있음을 느끼죠.”
한 교수는 지금 시대에 유신을 말하는 것은 단순히 지나간 역사를 들추자는 것이 아니라, 오늘 대한민국의 인권과 개인의 자유를 신장시키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유신시대를 수배자로 떠돌아야 했던 김근태 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지난해 세상을 떠났고, 그를 고문한 이근안은 그해 인터뷰에서 자신의 고문 기술을 ‘하나의 예술’이라고 표현하며 자신의 행위를 ‘애국’이라고 주장했다. 그 시대 민주열사가 김근태 하나가 아니듯, 그 시대 자칭 ‘애국자’들은 이근안 하나가 아니었다. 그 시절은 수많은 김근태가 수많은 이근안에게 고통받고 짓눌리던 시대였다. 유신은 수많은 ‘이근안’들이 없었다면 하루도 유지될 수 없는 체제였다.
과거 높은 곳에서 이근안의 ‘예술’행위를 조장하고 감상한 이들은 아직도 높은 곳에 자리하며 ‘빨갱이’ 운운하고, 그들의 ‘공주님’은 보수진영의 대통령후보가 되었다.
유신시대에 중•고교 시절을 보내고 1980년 광주항쟁을 겪으며 한국 현대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한 교수. 그가 기억하는 유신시대는 어떤 모습일까?
감성이 용인 될 수 없던 시대
“당시 권력은 얼마나 친절했는지, 우리가 태어난 이유까지도 정해줬어요. 1968년 박정희는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면서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우리 출생의 의미를 규정해 버렸죠.”
이 시기 박정희는 병영국가 대한민국의 총사령관이었다. 일본 군국주의 사고방식을 가진 박정희의 눈에 자유를 추구하고 젊음을 노래하는 젊은이들이 맘에 들 리가 없었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 사력을 다해야 할 이때, 젊은이들이 ‘긴 머리에 짧은 치마 입고, 조개 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노는 모양새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을 터이다.
중앙정보부는 청년문화를 검열하기 시작했다. 금지곡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이유를 갖다 붙였다. 양희은의 ‘아침이슬’은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라는 가사가 김일성의 적화통일을 찬양한다며,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는 월북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금지하는 식이였다. 유신정권은 금지곡 대신 ‘유신의 찬가’ ‘나의 조국’ 등 건전가요를 만들어 배포했다. 한 교수는 이 노래들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지금도 가끔 흥얼거리게 된다고 했다.
이 시기 청년문화는 군사정권뿐 아니라 운동권에서도 미움을 받았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1천여명 학우들이 잡혀간 마당에 통기타나 튕기고 있는 이들이 곱게 보일 리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대학언론인 고려대 <고대신문>이나 서울대 <대학신문>은 ‘대학생들이 비판적 정신을 잃어버리고 외래 스타일에만 빠져 있다’고 비판하며 이들을 ‘버터에 버무린 깍두기’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시대가 우울하다고 젊은이들이 울상만 짓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죠. 김민기의 곡은 시대의 고민이 녹아있기도 했고요. 하지만 독재자와 싸우다 보니 저항하는 학생들도 경직돼 버렸어요. 독재의 또 다른 피해죠.”
여느 시대가 그렇듯, 70년대 젊은이들도 기성세대와 충돌되는 가치관을 지녔다. 게다가 그들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있던 세대였고, 그들의 부모는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였다. 암울한 시대와 갑갑한 현실에서 이들이 찾은 탈출구는 ‘새로운 감성’을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문화’였다. 하지만 유신은 이들을 억압하고 탄압했고, 젊은이들도 자신들의 새로운 감성을 스스로 규제했다. 유신 시대는 안과 밖으로 ‘젊음’이 무시되어야 했다.
철벽을 균열시킨 19살 여공의 죽음
대학에서 학생들의 젊음이 무시되고 있을 때, 공장에서는 어린 여공들의 젊음이 시들어가고 있었다. 70년대 한국 최대 가발 수출업체였던 YH무역에는 집안의 생계를 짊어진 어린 여공들이 몰려들었다. YH무역은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 경영난에 빠졌고 여공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활동하자 별안간 폐업을 선언했다. 피 같은 월급을 떼인 여공들은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서울 신민당사 안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경찰이 이들을 강제 연행하고 취재하던 기자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에게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는 등 아수라장 속에서 여공 한 명이 사망했다. 그녀는 19살의 6년차 노조대의원 김경숙이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발포명령을 내렸죠. 옆에 있던 차지철은 한술 더 떠 ‘캄보디아에선 200만 명을 죽여도 문제 없었다’며 맞장구 칩니다. 김재규는 ‘큰일 났다’ 싶었던 거죠. 김재규는 박정희가 판단력을 잃었다고 봤어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김재규의 말도 그래서 나온 걸 겁니다.”
박정희의 계엄령에 부마항쟁은 단시간에 진압되지만, 채 일주일도 안 돼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을 맞는다. 권좌에 앉아 죽음을 맞은 박정희는 다른 의미로 ‘종신 집권’의 꿈은 이룬 셈이다.
역사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유신시대가 만든 또 다른 비극은 양심적인 보수주의자, 합리적인 자유주의자들의 씨를 말렸다는 겁니다. 유신을 찬양하던 사람들은 문공부장관이 되고, 후배 기자들을 검열하던 논설위원들은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지식인들이 무너진 것이죠.”
보통 유신시대는 1972년 박정희의 죽음으로 끝났다고들 하지만, 유신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유신의 권력자들은 권력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은 여전히 ‘빨갱이’로 몰리기 일쑤다. 이 또한 유신이 남긴 국가보안법적 세계관 때문이라고 한 교수는 설명했다.
지금 그 ‘유신의 공주’는 여당의 대통령후보가 되었다. 박근혜에게 박정희 시대의 과거를 물으면 ‘역사에 판단을 맡기겠다’고 답한다. 이에 한 교수는 ‘역사에 판단을 맡긴다’는 말은 함부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말은 전봉준이나 김재규 같은 사람들이 형 집행을 앞두고 하는 말이지, 현재 모든 권력을 틀어 쥐고 있는 사람들이 함부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에 대한 판단은 당대 민중이 하는 겁니다.”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학기 <인문교양특강II>는 이주헌, 이권우, 한홍구, 장승구, 김진석, 신형철, 정희준 선생님이 강연을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의를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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