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양특강] 신형철 조선대 교수
주제 ① 어떻게 살 것인가: 운명에 대한 성찰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적힌 ‘세월의 책’을 발견한다. 책에는 그녀가 내일 경주마에 돈을 걸어 스무 배에 달하는 배당금을 받는다고 쓰여있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배당금을 걸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정해진 운명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평론가이기도 한 신형철 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는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나오는 일화로 강의를 시작했다.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돼 <몰락의 에티카>를, 자신을 대상으로 사랑의 실험을 진행하며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쓴 신 교수는 이제 '운명'을 성찰한다.

▲ 신형철 교수가 쓴 책 <몰락의 에티카>와 <정확한 사랑의 실험>. Ⓒ 교보문고

고대의 ’운명‘은 신이 ’결정‘

“사건의 발생을 확률적 문제로 환원해서 자기 탓을 하기보다 ‘신의 뜻’, 즉 ‘운명’으로 치부하는 것이 고통을 더는 방법이에요. 이렇게 운명의 존재를 믿는 게 고대 그리스인의 관점입니다.”

신 교수는 고대와 현대 ‘운명관’의 차이가 이야기의 차이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고대 그리스 이야기에는 신이 등장하는데 이는 신에 의해 운명이 ‘결정’됐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 현대에는 신이 등장하지 않는데 운명을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차이가 캐릭터 행동을 변화시킨다. 운명관의 차이가 인간의 선택 구조를 완전히 다르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운명’을 어떻게 정의했을까? 신 교수는 ‘성격이 곧 운명’이라는 고대 그리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인용하며 고대인들은 한 개인의 성격에 의해 운명이 만들어진다고 믿었다고 설명했다. 같은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하는 이유는 ‘성격’에 기인하며 그 결과가 ‘운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격을 고정불변한 것으로 본 건 아니다.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특강을 하는 신형철 조선대 교수. Ⓒ 이민호

‘비극적 영웅’ 오이디푸스 왕

신 교수는 그리스 신화의 왕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왕이 ‘오이디푸스 왕’이라며,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는 ‘운명’이라는 주제를 잘 드러낸다고 했다.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신탁이 내린 운명인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동침할 것’을 피하려 노력하는 오이디푸스가 결국 운명을 빗겨나가지 못하는 구조다.

이야기에는 자신과 결혼한 미망인 왕비가 자신의 어머니였음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가 왕비의 자결을 목격하고 왕비의 브로치를 뽑아 자신의 눈을 찔러 피를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오이디푸스와 코러스(상황을 보충 설명해주는 내레이터 역할)의 대화가 등장한다. 코러스는 ‘그 어떤 거리보다 멀리서 뛰어 덮친 신이 누구냐’고 오이디푸스에게 묻는다. 이 질문은 오이디푸스가 신으로부터 최대한 도망쳤음에도 신이 멀리서 날아와 덮쳤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결국 신들이 정해놓은 인간의 운명은 인간이 극복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고 신 교수는 설명했다.

“만약 오이디푸스가 신탁을 듣고도 떠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운명이 실현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내가 피하려고 했던 일이 피하면서 실현되는 것. 이게 고대 그리스 시대 사람들이 뼈저리게 느낀 운명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을 피하려 노력했지만, 그 과정이 결국 자신의 비극을 향해 스스로 가속 페달을 밟는 행위가 돼 버린 셈이다. 하지만 신 교수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에서 완전히 패배한 사람은 아니라고 말했다.

“코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눈을 찌른 것도 신탁이었냐며 묻죠.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가련한 나 자신’이 눈을 직접 찔렀다고 말합니다. 주체성을 드러낸 거죠. 눈을 찌르는 행위는 자신을 처벌하는 일종의 ‘자기 처벌’인데 오이디푸스는 사건의 주체가 자신임을 확인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결단을 내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 교수는 ‘인간의 크기는 불행의 크기로부터 드러난다’는 철학자 김상봉의 말을 인용하며 오이디푸스는 ‘비극적 영웅(tragic hero)'이라 말했다. 이는 보통과 다르게 처참하게 몰락하며 자신을 입증하는 태도를 보이는 영웅이다. 오이디푸스는 끔찍한 불행을 겪지만 ‘눈을 찌르는 행위’로 그것이 자신의 운명임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크기를 보여준 것이다.

마태복음 속 구원자 ‘예수’의 등장

신 교수는 ‘성경’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 없지만, 성경에 관심이 많고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중요한 텍스트를 읽지 않을 수 없어 성경 읽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에게 성경은 아주 오래전에 쓰인 문학작품과 같은 것이다.

그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설명하고 신약성경 가운데 특히 예수를 주인공으로 하는 텍스트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네 편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이 네 편 모두 예수님이 등장하고 출생해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일종의 평전 같은 형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요한복음을 제외한 나머지 세 편을 ‘공관복음’이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에 의해 쓰였지만, 기본이 되는 문서가 있어 같이 보고 썼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는 세 작품은 거의 비슷하지만 특히 ‘마태복음’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라는 존재가 가장 인간적이라고 할까요. 저한테 그렇게 느껴집니다. 인간적이란 게 뭐냐면 저는 예수를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사람마다 입장이 다 다르죠. 한 인간이 그것도 마구간에서 태어났잖아요. 신분이 높은 사람이 아니었죠. 그런데 그런 사람이 서른 살이 됐을 때 세상에 나왔죠. 세례를 받고 공생활을 시작합니다. 저는 이것을 한 인간이 어떻게 신적인 존재가 되었는가 하는 과정을 그린 문학 텍스트로 봐요.”

신 교수는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하기에 앞서 그 배경을 설명했다. 신약 이전에는 구약이 이미 있었고 당시 사람들은 구약의 예언들을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구약 예언서들에는 나중에 ‘메시아’ 즉 ‘구원자’가 도래해 백성을 구원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어 있었고, 그래서 자신이 예언자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러고 신약에서 나사렛이란 지역에서 살았던 ‘예수’라는 존재가 ‘메시아’로 나타난 것이다.

“이건 마치 이야기는 다 만들어져 있는데 주인공만 없는 상태에서 내가 주인공이야 하고 누군가가 나타난 거예요. 예언서에서 메시아의 희생을 통한 구원이 예언돼 있는데 예언이란 게 운명이잖아요. 누군가의 운명이 기록돼 있고 결정이 돼 있는 거죠. 이 운명은 비극적인 운명이에요. 이 운명의 주인공이 누가 되고 싶겠어요. 그런데 예수라는 존재가 내가 그걸 하겠다, 내가 그 주인공이 되겠다고 이미 이야기가 다 짜여 있는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간 거죠.”

신 교수는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서른 살 이후 공생활을 시작하고 제자 12명과 함께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일종의 ‘문학적 과장’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일으킨 기적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사람들의 존재와 삶의 구조를 완전히 바꿔버린 일들이다.

그러한 기적을 일으키면서 예수는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거기서 기존 지배세력과 담판을 짓는데, 이때 예수는 ‘대속’ 즉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인간들을 구원한다는 결말을 향해 다가간다. 신 교수는 이것을 마태복음의 ‘절정’으로 봤다. 그래서 문학작품의 구조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정말 잘 쓰인 작품이라는 것이다.신 교수는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서른 살 이후 공생활을 시작하고 제자 12명과 함께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일종의 ‘문학적 과장’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일으킨 기적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사람들의 존재와 삶의 구조를 완전히 바꿔버린 일들이다.

“예수님은 정해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거예요. 그 이야기가 끝까지 결말을 향해서 무사히 도달할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게 이 이야기의 결말이니까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십자가에 올라가셨죠. 그리고 그 죽음 때문에 온 세상이 다 바뀌어버렸잖아요.”

기독교는 원래 ‘사랑의 종교’

신 교수는 이어 예수가 남기고 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관해 얘기했다. 신 교수는 원수를 복수해야 할 존재로 보는 논리로는 이 지구상의 수많은 전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 고리를 끊어야 하는데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고 말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면 끊어지는 것이다.

“이 논리를 적용한 영화를 많이 만든 사람이 김기덕 감독이에요. 김기덕 감독 영화를 보면 여성이 피해자 남성이 가해자, 성폭행을 했다 매춘부로 만들어서 팔아버렸다 하는데, 여성 쪽에서 그 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은 페미니즘 관점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죠. 그런데 이게 그냥 종교 수준의 논리를 얘기하고 있는 거라고 김기덕 감독은 그렇게 말하겠죠. 아마 나름대로 논리가 있겠죠.“

신 교수는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서 스스로 고리를 끊어버렸기 때문에 그 뒤에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가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최근 동성애와 관련해서 소위 몇몇 보수 기독교계에서 ‘동성애자들을 몰아내라’고 시위하잖아요. 사실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제가 바깥에서 볼 때 그거는 기독교를 배반하는 거에 가까워요. 왜냐하면,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기 때문이죠. 사랑이 왜 위대한 사랑이냐, 사랑할 수 있는 걸 사랑하는 것은 하나도 위대하지 않죠. 내가 내 아내를 사랑하는 게 뭐가 위대해요. 나한테 너무 쉬운 일이지. 내가 사랑할 수 없는 대상, 나랑 너무 달라 그래서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은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위대한 거죠.”

▲ <그을린 사랑>은 이야기 구조가 ‘오이디푸스 왕’에 가깝다면 <콘택트>는 ‘마태복음’에 가깝다. Ⓒ 이민호

이어 신 교수는 영화 두 편을 소개했다.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 감독이 만든 영화 <그을린 사랑>과 <콘택트>다. 그가 보기에 <그을린 사랑>은 이야기 구조가 ‘오이디푸스 왕’에 가깝다면 <콘택트>는 ‘마태복음’에 가깝다. 전자는 자신이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고, 후자는 자신의 역할을 미리 알고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오이디푸스 왕이나 마태복음은 옛날이야기잖아요. 그래서 제가 아까 이 이야기들 안에는 운명이 그냥 주어져 있다, 신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건데 현대 서사물에서는 신이 그 이야기 안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펼쳐지려면 뭔가 다른 요소가 그 역할을 해줘야 해요.”

신 교수는 그 역할을 하는 것이 <그을린 사랑>에서는 ‘레바논 내전’이라는 배경이고 <콘택트>에서는 ‘외계’의 존재라 말했다. ‘역사와 외계’가 바로 신을 대체하는 기능을 하면서 이야기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현대의 ‘운명’은 ‘믿음’의 문제

신 교수는 ‘현대의 운명론’으로 넘어가 ‘현대의 운명’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문제일 뿐이라고 정의했다. 이어 어떤 이야기를 운명으로 믿게 되느냐에 따라 현대적 운명은 ‘비극적 의식’과 ‘윤리적 의식’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비극적 의식은 ‘나에게 왜 고통이 주어질까?’ 고민하는 것인데 이는 왜 고통이 찾아오는지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더 고통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태의 유가족 입장을 보면 ‘왜 하필 내 아이가 죽어야 하는 거지’라는 답을 하게 되죠. 현대의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하필 그 배에 타고 있었다는 것은 확률적 문제일 뿐이다’라는 이성의 답을 내놓습니다. 그러면 고통은 더 커져요. 피할 수 있는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오히려 그건 다 신이 뜻한 바가 있어서 내 아이를 일찍 데려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덜 괴로울 수 있지 않을까? 이게 ‘섭리’입니다.”

신 교수는 우리가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더 고통스럽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고통의 이유를 찾으려 한다고 말했다. 제삼자 처지에서 보면 신의 뜻, 즉 신이 정한 운명이라고 보는 것이 어쩌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윤리적 의식’은 내 앞에 선택지가 놓여있을 때 ‘아 이걸 하는 게 내 운명인가보다’라고 생각하면서 그 일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소명’을 말한다. 이는 내가 부름을 받았다고 느끼고 어떤 선택을 피하지 않고 맡았을 때, 내 삶의 의미를 더 높이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신 교수는 설명했다.

‘비극적 의식’을 보여주는 ‘욥기’

‘비극적 의식’에 관한 텍스트로는 ‘욥기’가 있다. 욥기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고대 이야기다. ‘욥’은 ’죄 없이 고통받는 자’의 대명사다. 고대부터 사람들은 신이 있는데, 왜 고통이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죄를 지은 사람이 고통을 받으면 인과응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죄 없는 사람들도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고통의 문제, 악의 문제,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는 신의 존재에 대한 강력한 반론 근거가 됐어요. 그래서 무신론자 중에는 ‘신이 죄 없는 사람이 고통받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인데, 악이 사람들을 괴롭힌다면 그 신은 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무능한 존재다’라는 논리가 성립하게 되는 거예요. 또 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그냥 내버려 두는 거라면? 그 신은 선한 게 아니라 악이라는 논리가 도출됩니다. 여기서 이런 신을 왜 믿어야 하지라는 의문이 성립되는데 기독교는 이것에 대한 반론으로 ‘신정론(theodicy: 변신론)'을 만들어요. 1700년대 라이프니츠라는 철학자가 만든 말이에요.”

‘신정론’은 세상에 죄가 없는 자가 고통받는다면 ‘아니야, 죄가 있는 거야. 결국에는 다 인과응보야’라고 변호하는데 ‘욥기’는 이런 논리에 있어 최초이자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신 교수는 말했다.

욥기에서 ‘욥’은 하느님과 내기를 한 사탄으로부터 ‘어떤 고통을 받아도 신의 편에 설 것이라는 믿음’을 시험받는데 먼저 가축이 죽고 다음으로 자식들이 죽고, 마지막으로 욥 자신이 끔찍한 병에 걸리게 되는 시험이다. 결국, 욥은 하늘을 원망하게 된다.

▲ 욥의 친구들은 인과응보의 논리로 그의 죄를 말한다. 하지만 ‘죄 없는 자의 대명사’ 욥은 수긍하지 못한다. ‘신’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누가 욥을 참회케 할 수 있을까? Ⓒ 윌리엄 블레이크

이때 세 명의 친구가 욥을 위로하기 위해 나타나 ‘분명히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하느님께서 너에게 벌을 주신 거야’라며 인과응보의 논리로 말한다. 하느님이 아무런 이유 없이 너에게 벌을 주었을 리 없으며, 원망하고 질문하면 이게 죄가 된다는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청년 ‘엘리후’가 이야기에 끼어듭니다. 엘리후는 친구들은 이 고통이 욥에게 주어진 결과라고 얘기하는데 이건 고통의 시작이라고 얘기해요. 왜 고통을 주시는지 하느님께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게 이 고통의 메시지라고요. 그러니까 고통의 의미를 스스로 생각하고 답을 찾아야 하며, 고통은 처벌이 아니라 신의 전언이라고 설파하죠.”

이후 욥 앞에 나타난 신은 왜 고통을 주는지 답은 내놓지 않고 ‘나는 신이고 너는 인간이라는 사실’만 강조한다. 신은 바다와 땅, 온갖 사물을 다 보는 전지전능함을 몇 페이지에 걸쳐 말하는데 결국 욥은 신 앞에 무릎을 꿇으며 회개한다.

“욥기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인 ‘신의 뜻은 인간이 물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 삶 속 고통의 의미에 대해서 스스로 답을 찾아라’고 하는 것은 신앙을 갖고 있지 않다면 공감하기 어려울 수 있고요. 결국, 고통을 왜 느껴야 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신의 무능과 악함을 의심하는 데서 나아가 감정의 끝에서 오히려 신을 받아들이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거죠.”

▲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으로 ‘소명’을 깨닫게 된다. Ⓒ 교보문고

윤리적 의식, 문재인의 <운명>

‘윤리적 의식’에 관한 텍스트로는 문재인 대통령의 <운명>이 있다. 신 교수는 윤리적 의식에서 운명은 ‘소명’인데 문재인 대통령의 삶도 이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운명>에 “노무현 당신은 죽음으로써 홀가분해졌을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 때문에 꼼짝달싹 못 하게 됐다”며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 수 없고, 민주주의와 진보를 위해 내가 필요하다면 결정해주십시오”라고 썼다. 문 대통령은 이게 내 운명이고, 숙제를 마무리해야 해야 하기에 소명을 감수하고 정치에 나서겠다는 윤리적 결단을 내린 것이다. 정치가 기질적으로 안 맞는다면서 떠났던 문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을 겪고 정치에 복귀한 이유다.

“지킬 약속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그게 행복일 겁니다.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있으니까요. 그게 없는 사람의 삶이 제일 비극적인 게 아니겠어요? 운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와 연결돼 있습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17년 2학기 [인문교양특강]은 정희진 김한솔 신형철 나영석 이택광 유진룡 김종철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편집 : 박진홍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