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겨울

▲ 박진우 기자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데 옆 칸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 화장실은 천장이 뚫려 있나?' 행여 억울한 오해를 받을까 마음이 불편해 일을 서두른다. 어영부영 화장실을 나오는데 동기 여학우 둘과 마주친다. "오빠, 여기 여자 화장실이야!"

뒤를 돌아보니 정말 문에 'WOMEN'이라 쓰여있다. 적잖이 당황하여 제자리를 몇 바퀴 맴돌았다. 두 바퀴쯤 돌았을 때 조금 마음을 추스르고 사과한다. 그리고 억울한 사람이 흔히 그러듯 진상 규명을 시도한다. 바로 옆 남자 화장실 문에는 두 팔을 약간 벌리고 서 있는 남성이 그려져 있다. 아마 술기운에 약간 벌린 두 팔을 치마로 착각했나 보다. 뭐라 적극적인 해명을 하기도 전에 여자 화장실 문이 닫힌다. 아직 당혹감의 쓰나미가 진정되지 않았지만 한 올 남은 이성의 끈은 우선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내가 왜 이리 갈피를 못 잡고 허둥대지? ‘취업준비생’ 주제에 좋은 언론사에 취업한 선배들 모임에 온 탓일까?

동문회는 한창 진행중이다. 졸업생들이 기수별로 무대에 나가 자신을 소개한다. 이런 자리에서는 튀지 않는 게 미덕이라고 어릴 때부터 배운 탓에 대부분 앞사람 포맷에 내용만 바꾼 소개가 이어진다. "안녕하세요, X기 누구입니다. 현재 Y신문 Z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어디 근처에 오면 연락하세요." 거의가 ‘취준생’인 우리 테이블의 관심은 Y였다. 술이 점점 들어가고 ‘취준생’들은 누구나 알 만한 회사가 등장할 때면 뜨끈한 울렁임을 느낀다. 이내 동문회장에는 속물적 흥미와 동경, 질투와 허영심, 그리고 각자 잃어버린 것들이 미러볼 불빛처럼 뒤섞여 구석구석을 비춘다. 활기찬 모습을 띤 서러운 공기는 아무도 모르게 취준생의 호흡에 스며든다. 아직 당혹감의 쓰나미가 가라앉지 않았는데.

▲ 취준생의 겨울은 더 춥다. ⓒ flickr

다음 날 어느 언론사 필기시험이 있어 금방 동문회장을 빠져나왔다. 서류전형에 합격하면 주어지는 필기시험 기회에 적게는 백 명, 많게는 천 명이 응시한다. 몇 차례 면접을 거쳐 최종 합격하는 인원수는 한자리다. 수백 대 일 경쟁률은 마치 '대왕고래의 몸길이는 30m다'라는 사실처럼 비현실적이다. 시내버스 3대를 이어붙인 크기의 동물이 바닷속을 휘젓고 다니는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듯, ‘취준생’에게 구직이라는 현실은 비현실로 느껴진다.

계절은 어느덧 겨울,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이 더욱 을씨년스럽다. 언젠가 구직에 성공해 동문회에 돌아오면 어떤 기분일까? 쓰린 경험을 지우고 나면 우리에게 남는 건 무엇일까?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곽호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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