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신고리원전 공론화위원회와 숙의민주주의

   
▲ 손준수 기자

‘예송논쟁’, ‘기사환국’ 등은 조선시대 붕당 간의 대립을 보여준 사건이다. 관료들은 훈구파와 사림파,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 벽파와 시파 등 편을 나눈 채로 붕당정치를 해왔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붕당간의 대립이 서로를 견제하여 균형잡힌 여론을 형성시킨다는 긍정적 측면을 강조한다. 하지만 붕당사림들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패하면 죽거나 관직을 잃었다. 연좌제로 후손들에게까지 피해가 가기 때문에, 논쟁을 할 때 상대를 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 조선시대는 붕당 간의 대립이 잦았다. ⓒ 영화 <남한산성> 갈무리

지금은 왕정시대가 아닌 민주주의 사회지만, 상대를 적대시하는 모습은 여전히 우리사회에 남아있다. 야당의 한 대표는 “친북좌파는 박멸대상이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영남과 호남, TK와 PK, 친박과 비박 등 편 가르기는 멈출줄을 모른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런 적대시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다수결을 절대원칙으로 하는 대의민주주의는 적대관계를 심화시키는 주요한 요인이다. 소수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고 다수의 의견만 채택되는 것이 다수결 원칙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기 보다는 자기 편 숫자를 늘리는 데 집착하게 된다. 툭하면 나오는 ‘보이콧’은 다수결로 결정되는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불참통보만이 유일하게 독단을 막는 수단이 된 것이다. 이러한 대의민주주의의 약점으로 인해 헌법을 유린하고 국격을 떨어뜨린 대통령이 당선됐으며,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해치는 ‘블랙리스트’가 등장했다.

다수결로 귀결되는 대의민주주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숙의민주주의’의 한 모습이 한국사회에서 실험적으로 도입됐다. ‘신고리원자력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그것이다. 숙의민주주의는 ‘승자독식(winner takes all)’의 게임원칙보다 소수의 의견까지 반영하여 합의를 도출시키는 과정이다.

국가중대사인 에너지 수급정책을 두고 국민 500명이 참여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이를 정책결정에 반영하는 과정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숙의민주주의 사례다. 소모적인 논쟁을 줄이기 위해 이해관계가 얽힌 전문가의 참여를 제한했고, 국민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공론장을 만들었다.

30년 동안 탈핵을 의논한 독일에 비해 3개월 만에 결론을 내린 점이 성급하다는 의견도 많다. 검증되지 않은 자료가 비전문가인 국민들의 합리적인 판단을 가로막는다는 의견도 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 지난 5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서울시민 미세먼지 대토론회'의 모습. ⓒ 손준수

이번 신고리원자력 5·6호기 공론화위원회에서 나온 아쉬운 점을 보완하는데, ‘디지털기술’은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지난 5월 서울시가 진행했던 ‘미세먼지 시민 대토론회’는 디지털기술 이용의 좋은 사례다. 서울시는 미세먼지 관련 정책을 수립하면서 3000명의 시민들을 한 곳에 모아 의견을 들었다. 시민들은 의견을 자유롭게 말했으며, 서울시는 컴퓨터와 통신을 활용해 실시간으로 발언의 팩트를 체크했다. 정책 수립 이후에는 시민들이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디지털기기를 이용해 정책이행 여부를 지속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 사례는 신고리원자력 5·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아쉬운 점을 보완해 숙의민주주의가 자리를 잡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버마스는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의사소통 행위에 기초한 공론장(public sphere)과 시민사회가 그 대안이다”라며 숙의민주주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숙의민주주의는 다당제, 개헌 등 커다란 과제가 산적한 한국 민주주의가 성숙하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진전시키는 방법론이 될 것이다. 그동안 한반도에서는 오랜 시간동안 적대적 논쟁이 자릴 잡았으며, 다수결이라는 도구의 합리성에 취해 의사소통의 합리성은 부재했다. 신고리원자력 5·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실험이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론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편집 : 이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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