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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통 편지로 ‘우리말 바로쓰기’ 훈수
[단비인터뷰] 이수열 솔애울 국어순화연구소장
2017년 09월 20일 (수) 19:52:29 임형준 박경난 기자 feyenoord24@naver.com

지난겨울,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외쳤다. 국민주권을 강조한 말이지만, ‘우리말 지킴이’ 이수열(89) 솔애울 국어순화연구소장에 따르면 이 문장엔 문제가 있다. ‘~으로부터’는 영어의 프롬(from)을 번역한 잘못된 표현이고, 제대로 쓰자면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조문과 기사문장 등 일상에서 잘못 쓰이는 우리말을 찾아내 기꺼이 ‘잔소리꾼’ 역할을 하고 있는 이 소장을 지난 5월 27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 자택에서 만나고, 지난 20일 전화로 한 번 더 얘기를 나눴다.

지하철 가판대에서 신문 사들고 하루 시작 

안방을 겸한 서재에는 수십 년은 됐을 법한 진갈색 책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바로 이 책상이 국어순화연구소다. 책상 위엔 목침만큼 두꺼운 민중서림의 <국어대사전>과 가위로 오려낸 신문 기고문 두 장이 놓여 있다. 빨간 펜도 눈에 띈다. 이 소장은 “지하철 가판대에서 신문 두어 부를 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말했다. 2010년 이전까지는 집 근처 신문지국장들이 국어순화운동을 하는 이 소장을 돕는 의미에서 열 가지 신문을 그냥 넣어줬다고 한다. 하지만 지국장들이 하나 둘 바뀌면서 ‘공짜 신문’은 기대할 수 없게 됐다.

   
▲ 두꺼운 국어대사전이 놓인 책상에서 <단비뉴스>와 인터뷰하는 이수열 소장. Ⓒ 박경난

이 소장은 신문에 나온 영어투, 일본어투, 중국어투 등의 표현을 찾아 빨간 펜으로 고친 뒤 우편으로 해당 신문사에 보낸다. 언론사 기자 가운데 이 ‘빨간 펜 편지’를 받지 않은 이가 드물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정작 자신은 지금까지 모두 몇 통의 편지를 보냈는지 세어보지 않았다는데, <조선일보>는 한 기사에서 20여 년 간 이 소장이 편지 2만 통을 보냈고, 받은 사람은 약 5000명이라고 추산했다.

이 소장은 1928년 경기도 파주시 송라동(松羅洞)에서 태어났다. 솔애울 국어순화연구소의 ‘솔애울’은 송라동의 순 우리말로, 소나무 겨우살이라는 뜻이다. 그는 열일곱 살이던 1944년 교원자격 시험에 합격해 모교인 파주의 봉일천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를 받아준 교장은 “키가 자랄 때까지”라며 1년 남짓 교생 실습을 시켰다. 나이가 어린데다 키도 작아 학생인지 선생님인지 구별이 안됐다. 이후 중등교사 검정시험을 치러 서울·경기 지역에서 국어교사로 일하다 1993년 3월 서울여고에서 정년퇴임했다. 학교를 다닌 건 초등학교가 전부고, 독학으로 자격시험을 통과했으니 대학이나 대학원 교육은 받은 적이 없다. 그는 “남자로서 교사 생활을 47년이나 한 것은 거의 유일한 기록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사 많이 고쳐줬다’고 감사패도  

“학교에 있을 때는 시간도 없고 그렇게 관심이 없었는데, 퇴임 후에 신문을 보니까 잘못된 게 무척 많이 발견됐어요.”

이 소장은 교편을 내려놓은 뒤 우리말·글 바로잡기에 앞장섰다. 교사 시절 눈에 띄지 않던 오염된 우리말이 보였다. 국어학자 최현배(1894~1970)가 쓴 <우리말본>과 <표준국어대사전> 등을 보며 독학했다. 빨간 펜을 들고 매일 신문 10부를 읽으며 잘못된 부분을 고쳐 필자에게 보냈다. <한겨레>는 “그동안 기사 많이 고쳐줘서 초창기 신문 발전에 기여했다”며 1993년 3월 감사패를 줬다. 같은 해 한겨레문화센터가 세워졌다. 이 소장은 이곳에서 1995년 교열 강의를 시작해 12년째 이어오고 있다. 주로 출판사 편집자와 초·중학교 선생님들이 강의를 듣는다.
 
빨간 펜을 든 지 20여 년이 지났는데 대중매체에 나온 잘못된 표현들이 많이 줄었을까.

“(바뀐 걸) 별로 느끼지 못해요. 예를 들어 ‘~하기 전까지’라고 하는데 이런 말이 없어요. ‘하기 전’이라고 해야 해요. ‘~하기 전까지’라는 말이 어디 있어.”

이 소장의 우리말 강의가 이어졌다. “대표적인 게 ‘정체성’인데 정체성이라는 말은 없다”며 “‘정체’로 써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체는 명사지만, 어느 특정한 사물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모든 사물의 본질을 뜻한다. 그러므로 개성이나 인간성처럼 그 사물의 본질을 뜻하는 ‘성(性)’을 붙여서 정체성이라고 하면 ‘본질의 본질’로 겹말이 된다는 설명이다.

“국회선진화법이 아니라 선진국회법”

이 소장은 교과서마저 잘못된 표현으로 가득하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우리 글 갈고 닦기: 국어 교과서 다시 써야 한다>(1999)를 냈다. 이 소장은 “문학 교과서에 ‘조선후기 문학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갑오경장 이전까지의 문학이다’라고 하는데 ‘임진왜란부터 갑오경장까지’라고 하거나 ‘임진왜란 이후 갑오경장 이전’으로 하나씩 써야한다”고 설명했다. 법 이름에도 문제가 있다. ‘국회선진화법’은 ‘선진국회법’이라고 써야 맞는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선진화(先進化)에서 ‘선진’이 ‘앞서 나아감’이고 ‘한다’를 취해서 ‘선진한다’는 자동사가 되므로 선진화란 지극히 단순한 상식에도 어긋나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 이수열 소장은 “국회선진화법이 아니라 선진국회법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박경난

이렇게 우리말 바로잡기를 하는 수고에 감동하고 고마움을 표한 사람도 많았다. 정종섭 전 행정자치부 장관은 자신이 낸 책과 함께 “글에 나타난 잘못을 지적해줘서 고맙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성낙인 서울대 총장도 “(신문 칼럼에 대해) 지적을 받을 때마다 부끄럽다”며 편지를 보내왔다.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는 2005년 2월 2일 <국민일보>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우리말을 바로 쓰게 하려는 그 열정과 노고는 보훈처 같은 정부의 서훈기관에 기록되어야 마땅하다”며 “선생의 깊은 지식과 열정은 우리말의 소금”이라고 이 소장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모두가 고마워한 것만은 아니다.

“어느 중학교 교장이 (90년대 중반) 세계일보에 연재한 글이 있어요. 내가 고친 것을 보내줬더니 편지가 왔어요. ‘편집국에서도 안 고친 글을 당신이 뭔데 자문 지도하는 것처럼 고쳤느냐’고. 그걸 내가 또 고쳐서 보내줬더니 욕을 하며 항의 전화가 왔어요.”

이 소장은 편지에 “교장 선생님이 글을 올바르게 쓰고 말씀을 올바르게 하셔야 선생과 학생이 본받을 거 아니냐”고 썼다고 한다.    

‘감사한다’와 ‘고맙다’의 차이

이 소장은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잘못된 표현을 잡아냈다. 우선 김 대통령 취임 전에 이경재 당시 특보에게 편지를 보내 ‘취임사를 쓸 때 유의할 점’을 조언했다. 그런데 실제 취임사를 보니 전혀 반영되지 않아, 잘못된 부분 30여 곳을 골라냈다. ‘기존 내용-고친 표현-설명’으로 3단 표까지 만들어 “문민정부가 하는 일에 실망과 분노를 주체할 수 없다”며 <한겨레>에 보냈다. 최인호 당시 교열부 편집위원이 ‘한국말병과 대통령 취임사’라는 칼럼을 통해 이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낙연 국무총리는 인터뷰 기사를 썼다. 그때부터 언론에 이 소장 이름이 오르내렸다.

   
▲ 이낙연 국무총리가 동아일보 기자 시절 이 소장을 인터뷰하고 쓴 기사.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이 소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감사합니다”라고 한 부분을 거론하며 ‘감사하다’가 잘못 쓰이는 경우가 많음을 지적했다. ‘감사한다’는 고마움에 감동해서 사례함을 뜻하는 자동사다. ‘도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는 자신이 감사하는 행위를 대단하다고 치켜세워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는 것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대신 ‘도와주신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맞다는 설명이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쓰려면 ‘도와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라고 써야 옳다는 것이다.

헌법, 우리말로 고쳐야 할 이유

지난 탄핵 정국에서 <대통령의 말하기>(윤태영)와 <대통령의 글쓰기>(강원국)라는 책이 인기를 모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말’이 문제가 됐던 탓이다. 이 소장은 박 전 대통령의 화법에 대해 “중3 수준도 못 된다”고 단언했다. 박근혜 정권이 즐겨 쓴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말도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비정상’이 목적어이기 때문에 ‘비정상을 정상화한다’로 고쳐야 맞는다는 주장이다. 같은 맥락에서 ‘위험의 외주화’는 ‘위험을 외주화한다’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도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한다’로 고쳐 써야 바른 문장이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복수의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원에게 의견을 구하자 ‘위험의 외주화’라는 표현을 써도 문제가 없다고 답했다.

   
▲ 이 소장은 국어 순화 활동을 하며 저서도 여러 권 냈다. Ⓒ YES24, 인터넷 교보문고, 구글북스

이 소장은 “헌법에도 외국어투가 남발한다”고 언짢아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대한민국 헌법>(1999)도 발간했다. 전문에 나오는 ‘전통에 빛나는’이라는 말은 ‘전통으로 빛나는’으로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제15조 ‘모든 국민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진다’는 ‘모든 국민에게 직업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로 바로잡았다. 이 소장은 자신의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표현으로 적힌 헌법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게으르고 무관심하기 때문”이라고 개탄했다. 그는 영어투, 일본어투, 중국어투가 점령한 헌법이 ‘국치(國恥)’라고 꼬집었다. 이 소장은 지난 7월 15일 정세균 국회의장에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대한민국 헌법>을 보냈지만 “김영란법을 위반한다”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젠 힘들어 그만 둘 생각   

이 소장은 1999년부터 월간지 <신문과 방송>에 ‘우리말·글 지키기’를 1년 정도 연재했다. 교열기자들이 그걸 읽고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교열기자협회의 초청을 받아 강의도 했다. 틀리기 쉬운 표현을 정리한 책 <우리말 우리글, 바로 알고 바로 쓰기>(1994)와 <이수열 선생님의 우리말 바로 쓰기>는 교열기자들 사이에서 '교본'으로 통한다. 한글학회는 2004년 이 소장을 '우리말글 지킴이'로 위촉했다.

기자들이 우리말을 올바르게 쓰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이 소장은 자신의 책 <이수열 선생님의 우리말 바로 쓰기>를 집어 들고 “이런 거 읽어야죠”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제 힘이 들어 이 일을 곧 그만 둘 것”이라고 했다.

   
▲ 이수열 소장은 “건강이 나빠져 이 일을 곧 그만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박경난

“언덕 올라가다가 허리를 다쳤더니, 처음에는 죽는 줄 알았어요. 치료는 받고 있는데 허리를 다친 게 신경에 영향을 주는지 다리에 힘이 없어요. 자꾸 비칠비칠 허고.”

책상 옆에 있는 손바닥만 한 바구니에는 편지 세 통이 있었다. 언론사 기자와 대학 교수에게 보낼 편지였다. 그는 “한 번 보낸 사람한테는 또 안 보내기로 했다”고 말했다.


 편집 : 김미나 기자

[임형준 기자]
단비뉴스 편집부장, 지역농촌부, TV뉴스부, 시사현안부 임형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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