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가정 양립’, 제도는 있지만 불이익 겁나 못 써
[가난한 한국인의 5대 불안 3부: 애 키우기 전쟁]

컴퓨터 시스템 관리직서 해고, 영어 학습지 교사로

중견 건설회사의 설계 부서에서 근무하다 지난해 겨울 3개월간 육아휴직을 냈던 이 모(38.여) 씨는 올해 2월 복직 후 이전과 업무가 완전히 달라져 당황했다. 그녀가 복직하겠다고 연락했을 때 회사 측은 “일할 자리가 없으니 다시 생각해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일을 계속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이자 일단 받아주긴 했는데, 설계 업무가 아닌 관리부서의 단순 문서 작업과 전화 상담 업무를 맡긴 것이었다.

전문 분야가 아닌 일을 맡길 수 있느냐며 항의하자 한 달 후 인사과에서 “사직서에 사인하고 나가달라”는 일방적인 통보가 왔다. 알고 보니 육아휴직 기간 중 해고는 엄격한 제재 대상이기 때문에 일단 복직시킨 후 해고 수순을 밟았던 것이었다. 정당한 사유와 30일 전 서면예고 없는 해고 역시 불법이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잘 알지 못했던 이 씨는 회사 측의 냉랭하고 강압적 분위기에 질려 사직서를 쓰고 말았다.
 
회사를 그만둔 후 이 씨는 열심히 재취업 자리를 알아봤지만 30대 후반 여성이 정규직 자리를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녀는 “나라에서 아기 낳으라고 밀어주어 안심하고 육아휴직을 냈는데, 이런 꼴을 당하니 억울해서 애를 부둥켜안고 한참 울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억울함을 구제할 길이 없는지 한국여성노동자회의 조언을 구하고 있다. 

6살, 4살, 2살의 세 딸을 두고 있는 차 모(38.여)씨는 2년 전만 해도 시스템엔지니어링 회사 전문직이었지만 지금은 학습지 방문교사로 일하고 있다. 차 씨가 다니던 회사는 주로 보험회사, 컨설팅회사 등 고객 기업의 컴퓨터 시스템이나 서버를 관리해 주는 곳이었는데 컴퓨터를 전공한 차 씨는 유명 외국계 보험회사의 시스템을 관리했다. 직원이 60명 정도인 회사에서 차 씨가 일하던 엔지니어 팀원들은 대부분 남자였다. 그러다 보니 출산 휴가를 요청한 게 차 씨가 처음이었다.

▲ 출판사에 근무하는 임신 7개월의 윤 모씨(31). 다음 달 육아 휴직에 들어갈 예정이다.                  ⓒ 박경현

첫 아이의 예정일에 맞춰 출산휴가를 신청했을 때, 회사는 법정 휴가인 90일을 무시하고 60일 만 쓰도록 허가했다. 그나마 출산휴가를 마치고 돌아가자 차 씨를 대하는 태도가 냉랭하게 변해 있었다. 회사 상황이 어려워졌다며, 차 씨에게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 아이가 출산예정일보다 늦게 태어나 출산 후 한 달 반밖에 쉬지 못한 상태였던 차 씨는 몸과 마음이 모두 괴로웠다. 일을 주지 않는 것은 나가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출산 전후를 합쳐 총 1년을 그 회사에서 일한 차 씨는 결국 퇴직금을 정산하고 퇴사했다.

그렇게 6년가량의 직장생활을 접었고, 이후 정규직 일자리는 찾을 수 없었다. 차 씨는 아이가 돌이 될 무렵까지 육아에 전념했지만 점점 커지는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워 영어학습지 방문교사 일을 시작했다. 결혼 전 캐나다에서 3년 간 공부했고, 컴퓨터 전공자로 전문직 생활을 6년여 한 차 씨지만 지금은 ‘특수고용직’으로 분류되는 비정규직으로 월 100만 원대의 수입을 올리고 있는 형편이다.

서울 강남구의 한 개인병원에서 간호사로 8년째 근무 중인 이 모(30)씨는 현재 임신 6개월이다. 오랫동안 근무한 만큼 이 씨는 병원에서 임신 출산에 대해 많은 배려를 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함께 근무하던 동료가 지난 2월 병원을 나가면서 이 씨에게 맡겨지는 업무는 오히려 늘었다. 강도 높은 수술실 업무는 물론, 새로 들어온 간호사를 교육하는 일도 그녀에게 맡겨졌다. 수술이 있는 날은 식사도 제 때 하기 힘들었다. 격무가 계속되면서 체력적으로 견디기 어려울 때가 많다.

▲ 아이를 안고 지하철을 이용하는 여성. 육아가 여전히 여성의 몫인 우리 사회에서 허울뿐인 육아제도는 여성들을 두 번 울리고 있다.                            ⓒ 박경현
이 씨는 이달 초 “출산 2개월 전부터 출산휴가를 받고 싶다”고 의논했지만 원장은 “다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했다. 이 씨 역시 병원 사정을 알기에 더 이상 얘기하는 것을 포기했다. 간호사가 넷뿐인데 이 씨가 빠지면 그 업무가 고스란히 다른 간호사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특히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이 수술실에 들어가기란 무리이므로 나머지 간호사들의 부담이 더 커진다.

이 씨가 병원에서 처음으로 임신한 경우라 병원 내 누구도 출산휴가나 육아휴직 제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원장은 3개월의 출산휴가가 곧 육아휴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법정 출산휴가 기간과 휴가 급여까지 이 씨가 일일이 알아보고 실장과 원장을 설득한 후에야 출산휴가를 약속받을 수 있었다. 그나마 출산 예정일 한 달 이내에 상황을 봐서 휴가에 들어가기로 했다. 실장은 육아휴직까진 아마 어려울 것이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이 씨가 꼭 육아휴직을 해야겠다면 병원은 대체 인력을 구할 것이라고 했다. 이 씨는 다른 간호사가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 육아휴직이 끝난 후 자신이 병원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법대로' 썼다간 승진 불이익에 퇴직 압력 

“법적으로는 다 보장이 되어있는 건데 왜 이렇게 출산휴가 하나 쓰기도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병원 사정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에요. 3개월 출산휴가도 이렇게 눈치가 보이는데, 육아휴직은 또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현재 우리나라의 산전후휴가는 90일이 보장되어 있고, 육아휴직도 만 6세 이하 자녀를 두었다면 어머니, 아버지가 각 1년씩 쓸 수 있다. 부모가 모두 일을 하고 있다면 한 아이를 기르는 데 총 2년의 육아휴가를 쓸 수 있는 셈이다. 사업주는 육아휴직자에게 매달 출산 전 임금의 40%(최저 50만원에서 최대 100만원까지)를 지급하도록 돼 있다. 대신 근로자가 30일 이상 육아휴직을 하고 복직 후 30일 이상 근무했을 경우, 고용보험에서 사업주에게 육아휴직 기간 중 매월 20만 원씩을 계산해 지원한다.

그러나 이런 제도와 현실은 간격이 크다. 육아휴직으로 인해 권고사직 등 인사 불이익을 받는 여성들이 부지기수다. 한국여성노동자회 ‘평등의 전화’가 지난 2010년 1월부터 2011년 4월까지 접수한 상담 건을 분석한 결과 출산·육아휴직 관련 노동 상담이 940 여 건으로 전체 상담 수의 30%를 차지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배진경 사무처장은 “산전후휴가와 육아휴직이 법상으로는 잘 정비돼 있지만 현실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며 “휴직과 함께 승진이 불가능해지거나 해고당하는 피해 사례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상담 사례를 들어보면 사측이 대체인력을 쓰는 대신 팀 인력을 감축하겠다고 주장해 여성 노동자가 육아휴직을 쓰기 어렵도록 부서의 분위기를 조장하거나, 간접적으로 퇴사를 암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을 쓴 여성근로자에겐 인사고과에서 최하위 등급을 줘 승진이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 출산을 위한 휴가를 이용하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여성들이 동료들의 눈치와 퇴직 압력을 느낀다고 답했다. ⓒ 박경현

취업 포털 잡코리아가 지난 1월 여성 직장인 162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이런 현실이 드러난다. 직장 여성의 54.7%가 산전후휴가 사용 시 `직장 상사나 동료들의 눈치가 보인다’ 고 응답했다. 퇴직 압력이나 인사 상의 불이익, 실제 퇴직을 경험한 경우도 24.4%나 됐다. 육아휴직은 압박이 더 심해 `상사나 동료들의 눈치가 보인다’가 59.2%, `육아휴직 신청 시 퇴직압력이 있다’가 20.6%였다. 자유롭게 신청이 가능하다는 응답은 11%에 불과했다.

고용노동부의 자료에 의하면 여성 육아휴직자는 2008년 2만8790명, 2009년 3만4898명, 2010년 4만1736명으로 지난 해 처음 4만 명을 넘었다. 그러나 이는 지난 해 산전후휴가를 사용한 근로자 7만5700명 대비 55.1%에 해당하고, 만 6세 이하 자녀를 가진 전체 대상자로 범위를 넓히면 육아휴직 사용자 비율은 훨씬 낮아진다. 더구나 출산휴가조차 제대로 찾아 쓰기 어려운 비정규직 여성근로자의 경우 육아휴직은 ‘그림의 떡’일 분이다. 남성 직장인의 경우도 제도는 있지만 실제 육아휴직을 쓰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올해 1분기 육아휴직자 1만4165명 중 남성 육아휴직자는 273명으로 약 2%에 불과하다.

스웨덴은 육아휴직 사용률 90%, 남성도 의무적으로 쓰게

▲ 불광역에 붙어 있는 산전후휴가 장려 캠페인 포스터. ⓒ 박경현
한국여성노동자회와 한국노총, 한국YMCA전국연맹 등 10개 단체가 연합한 ‘일·생활 균형을 위한 직장문화 바꾸기 캠페인단’은 지난 5월부터 ‘눈치 보지 말고 산전후휴가를 쓰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축하해, 90일을 응원할게’ 캠페인이 그것이다. 직장에서 임신한 동료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산전후휴가 시 업무분담과 출산 후 복귀를 적극적으로 돕자는 등의 내용이다. 시민들도 캠페인 홈페이지를 통해 포스터를 찍은 사진이나 캠페인 손엽서를 든 ‘인증샷’을 올리며 호응하고 있다. (http://www.facebook.com/act90days)

그러나 이런 캠페인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현장에서 법을 무시하는 기업이 많은데 제대로 제재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현행법 상 사업주가 육아휴직을 거부할 경우 5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게 돼 있다. 산전후휴가 혹은 육아휴직 기간과 이후 30일 이내에 근로자를 해고하는 사업주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실제 처벌이 이뤄지는 경우는 드물다. 처벌을 피하기 위해 기업들은 육아휴직을 사용하려는 근로자에게 사직서를 쓰도록 강요하거나, 복직 후 타 부서 혹은 집에서 먼 지방으로 발령을 내 스스로 회사를 그만두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근로자가 사직서를 쓰면 해고가 아닌 자의적인 퇴사로 처리돼 법적으로 구제받는 데 불리해진다. 한국여성노동자회 배 사무처장은 “산전후휴가와 육아휴직을 주는 게 손해라는 인식이 기업에 만연하다”며 “월차와 같이 산전후휴가와 육아휴직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복지제도가 잘 돼있는 스웨덴의 육아휴직 사용률은 90% 가량 된다. 최대 480일(16개월)까지 가능한 육아휴직을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유롭게 나누어 쓸 수 있다. 특히 남성의 육아휴직도 의무화돼 부모 중 어느 한 쪽이 반드시 60일은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쓸 수 있는 육아휴직 기간이 14개월로 줄어든다. 지난 2008년 7월부터는 남녀가 육아휴직을 절반(240일)씩 쓰면 최대 1만3500크로나(약 214만원)의 세금을 감면해주어 ‘부모 공동육아 문화’를 장려하고 있다.

강력하고 현실적인 인센티브로 기업 문화 바꿔야

한국여성노동자회는 기업 현장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출산육아 관련 휴가제도를 정착시키자는 취지로 지난달 29일 ‘일과 생활의 균형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다. 발제를 맡은 한지영 이화여자대학교 젠더법학연구소 연구원은 “남성돌봄권을 현실화하기 위해 기존 1년의 육아휴직기간에 3개월의 배우자 할당 기간을 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우자 할당제는 남성의 육아휴직 사용을 의무화하는 것이다. 한 연구원은 또 “임금손실 때문에 육아휴직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없도록 현재의 정률 급여 비율을 단계적으로 상향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발제자인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비정규직 여성의 모성보호를 위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박 연구위원은 “비정규직 여성의 계약 기간이 산전후휴가 중 만료될 경우 휴가기간이 끝날 때까지 자동으로 계약 연장이 되도록 하는 규정이 필요하다”며 “다만 이로 인해 비정규직 여성의 채용을 꺼리거나 계약기간을 단축하는 등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대책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사회학)는 “기업 문화를 바꾸는 캠페인을 통해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친(親)가정 기업에게 세제 혜택과 같은 인센티브를 주는 장려책이 먼저 도입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기업을 상대로 친가정 순위를 매겨 이를 사회적으로 공개함으로써 기업들이 이미지 제고를 위해 노력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일ㆍ생활균형을 위한 직장문화 바꾸기 캠페인 발대식(2011.05.04)에 참석한 광주여성노동자회 회원들. 캠페인을 통해 사회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출산휴가제도 정착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센티브 등과 같은 장려책이 우선 도입돼야 할 것이다.

현재 여성부는 김 교수의 제안과 비슷한 취지의 ‘가족친화 인증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그 효과는 아직 미미하다. 여성근로자를 위한 탄력적 근무제, 자녀출산·양육 및 교육지원 등을 시행하고 있는 기업을 지정해서 우선적으로 정부 정책자금 지원 혜택을 주는 제도인데, 2008년 도입된 후 2010년까지 약 25개 기업, 기관이 인증을 받았다. 그러나 2009년 말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가족친화지수 측정 및 분석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공공과 민간의 1200개 조직 중 민간기업의 9.3%, 공공부문의 18.2%만이 이 제도를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증제도를 알더라도 이득이 별로 없어 인증을 신청하지 않는다고 답한 기관도 있었다. 가족친화인증 기업이 되면 5년간 인증표시를 사용할 수 있고, 중소기업청과 노동부의 각종 지원사업에 가점을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있다. 그러나 이런 인센티브가 기업 활동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해 참여를 이끌어내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가족친화지수’ 측정결과를 보면 전체 1200개 기업·기관의 가족친화지수는 100점 만점에 평균 49.2점에 불과했다. 특히 국내 전체 보육시설(3만5550개) 중 직장 보육시설은 370개로 전체의 1% 수준, 국 ·공립 보육시설은 1917개로 전체의 5.4%에 불과했다. 좀 더 강력한 정책 추진 의지와 현실적인 인센티브가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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