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윤지원

▲ 윤지원 기자
초등학교 1학년때 나에 대한 담임선생님의 애정은 유별났다. 그는 유독 말랐던 나를 ‘코스모스 코스모스’라고 부르곤 했다. 그럴 때면 다른 아이들 앞에서 난 괜스레 으쓱해졌다. 어느 날 선생님은 수업 중 갑자기 칠판에 당시 내 아버지 회사 이름을 썼다. 분필로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쓴 뒤 나를 바라보며 말없이 웃었다. 다 커서 안 사실이지만 그날 오전 내 어머니는 선생님 책상에 돈봉투를 두고 가셨다. 선생님의 이상한 행동은 봉투에 적힌 회사 이름을 칠판에 씀으로써 돈 잘 받았다는 표시를 한 것이었다.

내가 처음 경험한 선생님의 관심은 위선이었다. 사람들이 위선을 유독 싫어하는 것은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정체를 알 수 없으니 눈 뜨고 당하기 십상일 테고, 그런 경험의 누적이 위선자를 증오하는 마음으로 유전됐을 것이다.

위선은 특히 정치와 손잡는 일이 아주 흔하다. 미국의 리무진 리버럴, 네덜란드의 살롱 사회주의자, 폴란드의 커피숍 혁명가, 프랑스의 샴페인 좌파...... 소수를 위하는 듯하지만 정작 자신은 특권층에 소속되어 그 권리를 누리는 정치적 위선자를 혐오하는 레토릭들이다. 

1970년대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흑인과 백인을 융합할 목적으로 공립학교의 흑백공용 통학버스 운행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아이들은 사립학교에 다니게 함으로써 흑인과 섞이는 걸 피했다. 21세기 초 미국의 환경운동가들이 교통수단 이용 캠페인을 벌이며 자신들은 SUV나 운전수가 모는 리무진을 타고 다녀 비판을 받은 적도 있다. 이렇게 사상과 말이 삶의 실제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 위선자들에게 시민들은 격분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강남좌파’는 억울하게 혐의를 뒤집어쓴 듯하다. 조국 교수, 유시민 전 장관, 정동영 의원의 공통점은 모두 특목고의 부당함을 설파했다는 것이고 이들 자녀가 모두 특목고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강남좌파’란 꼬리표가 달렸다. 하지만 특목고생 자녀가 있다고 그런 교육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위선적이라는 논리는 엉성하다.

‘강남좌파’라 낙인 찍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결국 ‘특권층으로 살면서 왜 서민 운운하냐’는 거다. 하지만 자기 계급이익에 몰입하지 않고 없는 이를 위하고 대변하는 것이 욕먹을 일인가? 그들 논리대로라면 ‘자본론’을 쓴 마르크스도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으니 위선자이고, 귀족 출신이면서도 전 재산을 팔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회영도 영락없는 위선자다.

힘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위해 힘쓰고,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위해 베풀고, 배운 자가 못 배운 자를 위해 발언할 때, 세상은 조금씩 살만한 곳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기득권층이 요즘처럼 무상급식이나 반값 등록금 등을 포퓰리즘으로만 몰아붙인다면 세상은 더 살기 힘든 곳이 될 수밖에 없다.

‘강남좌파’는 기득권층에 속하면서도 대중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사람들이다. 기득권층이 보면 배신자요 위선자일지 몰라도 민중에게는 믿고 의지하고 싶은 호민관 같은 존재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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