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월드] 돌봄 서비스 예산 줄어 고립되는 약자들

“전 더 이상 시민이 아니에요. 정부 정책 때문에 문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됐어요.”

영국인 엘리 채프먼(39·여)은 관절이 과도하게 꺾이는 ‘과운동성 증후군’이 있는 장애인이다. 걸핏하면 넘어져 다치기 때문에 활동보조인 없이는 옷을 입거나 집안일을 하는 것도 어렵다. ‘사회적 돌봄(social care)’ 제도가 축소돼 지원 받을 수 있는 시간이 주 44시간에서 22시간으로 줄어든 2016년 말 이후, 엘리는 관절이 탈구된 채 활동보조인이 올 때까지 5시간이나 바닥에 누워있던 날이 있을 정도로 삶이 무너졌다.

활동보조인 지원 줄어 침대에서만 생활  

더구나 지난 3월부터는 1년에 1만3천 파운드(약 1880만원)이던 활동보조인 지원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있다. 보조금 지급이 중단된 후 엘리의 건강은 더 나빠졌다. 방 밖으로 나가기 힘들어 침대에서만 지낸다. 편안한 잠자리여야 할 침대가 그에게는 어수선한 식탁이자 사무 공간이 됐다.

▲ 침대 위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엘리 채프먼. © <가디언> 영상 갈무리

‘요람에서 무덤까지’ 시민들의 전 생애를 책임지겠다던 영국 복지 제도는 옛날이야기가 됐다. 2010년 총선에서 승리한 보수당은 자유민주당과 연립정권을 구성해 긴축재정을 본격화했다. 2007~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의 여파로 재정 적자가 심해진 탓이다. 이후 7년 간 이어진 긴축정책에 따라 복지는 지속적으로 축소됐다. 얼마 전에는 조기 총선을 앞두고 ‘치매세’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보수당이 집을 가진 노인들의 요양비 부담을 높이는 내용으로 노인 복지를 손질하려 하자 노동당이 ‘치매세’라는 딱지를 붙인 것이다.

<가디언>에 장애인 관련 칼럼을 쓰는 자유기고가 프란시스 라이언은 “복지 축소 과정에서 특히 장애인들이 잊히고 있다”고 강조했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사회적 돌봄 제도 이용자 중 3분의 1은 장애인이다. 그러나 뉴스에서 복지 문제를 다룰 때 화두가 되는 것은 노인 일색이고, 장애인 문제는 관심권에서 벗어나 있다. 라이언은 “정치인들에게 노인은 환심을 사고 싶은 유권자지만, 장애인들은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치부된다”고 설명한다.

▲ 영국 언론은 사회적 돌봄 제도를 거론할 때 주로 노인 이미지를 이용한다. © flickr

라이언은 또 영국 사회가 ‘취약한 성인(vulnerable adult)’과 같은 모호한 단어로 장애인을 지칭하면서 이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회피한다고 비판했다. 라이언은 ‘취약하다(vulnerable)’는 표현이 국가의 의무를 개인에게 떠넘길 때 사용돼 왔다고 지적했다. 사지마비 환자가 ‘약한’ 이유는 걸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활동보조인 제도를 이용할 수 없도록 정부가 사회적 돌봄 예산을 축소했기 때문이라고 라이언은 꼬집었다.

라이언은 “활동보조인 없이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들이 (지원 축소 후) 건강이 더 나빠지거나 집에만 갇혀 있어 우울증을 얻게 됐다는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장애인들은 독립적으로 살 권리도 위협받고 있다. <보건서비스 저널(Health Service Journal)>에 따르면 영국 내 공공의료서비스 지역위원회 37곳은 장애인 1만3천명을 그들의 의지와 관련 없이 시설로 보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상자는 자택 요양 서비스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장애인들이다.

한국은 장애등급제가 걸림돌

국내에서는 지난 19대 대통령 선거 사전투표 때 시설미비로 장애인들이 참정권을 제한당한 사례가 있었다. 사전투표소가 건물의 2층 혹은 3층에 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어,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2017대선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 다르면 전국 사전투표소 3,516개 중 18.3%인 644개 투표소가 장애인이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있었다. 서울의 경우 전체 424곳 중 37.7%인 160곳이었다.

우리나라는 장애인복지에 지출하는 재정규모도 작다.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2016년 OECD 국가 평균 장애인복지 지출 규모는 GDP 대비 2.19%였지만 우리나라는 0.49%로 4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OECD 30여개 회원국 중 뒤에서 세 번째다.

▲ 지난 4월12일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19대 대선, 돌봄사회를 요구한다!’ 구호와 함께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 참여연대

지난 2014년 장애인 송국현(53)씨가 불이 난 집에서 대피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던 중 숨졌다. 송씨는 장애인 시설에서 23년을 지낸 후 자립했지만 ‘종합3급 장애인’이라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받을 수 없었다. 그가 숨진 후 장애등급제 폐지 요구가 거세졌다. 장애등급제란 장애 유형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그에 해당하는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인데, 등급과 복지서비스가 장애인 개인의 특수성과 다양성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이정훈 정책실장은 “장애등급제는 등급마다 복지 서비스를 천편일률적으로 제공하는데 1급을 받아도 필요 없는 서비스가 있다. 그러나 장애등급제는 이를 다른 서비스로 바꿀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고 장애인들이 필요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개인별 맞춤지원 체계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이 약진함에 따라 영국 장애인의 복지가 다시 회복될 수 있을지, 문재인 정부의 집권으로 국내 장애등급제가 폐지될 수 있을지, 당사자들은 아마 마음 졸이며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기사 원문 링크]

‘I was a citizen, now I’m nothing’: disabled readers on life under austerity
The social care crisis hits disabled people hard. So why are they forgotten?


IS, 히잡, 국제유가, 그렉시트, 브렉시트, 스위스 국민소득, 인종갈등, 미국대선, 일대일로, 지카 바이러스, 사드, 북핵... 외신을 타고 매일 쏟아지는 뉴스 소재다. 이를 제대로 모르면 현대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어렵다. 나아가 무역, 안보에서 생존을 보장받기 힘들다. 인류역사가 제국주의 시대로 변모한 이후, 자본과 권력은 국경을 넘어 세계로 뻗는다. 냉혹한 국제 정치, 경제 무대에서 자본(Capital)과 힘(Hegemony)의 논리를 제대로 꿰뚫어야 하는 이유다. 단비뉴스는 <단비월드>를 통해 국제사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표면적인 움직임과 그 이면의 실상을 파헤친다. 난마처럼 얽힌 우리 앞의 과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세계평화와 인류 행복을 증진하는 열쇠를 얻기 위해서다. (편집자)

 편집 : 이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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