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금 논쟁, 교육의 공공성 높이도록 방향 잡아야
부실대학 구조조정과 명문대 지원이 능사 아니다

애초에 대학의 주인은 군주도 교수도 아닌 학생이었다.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불리는 이탈리아 볼로냐대학은 학생길드로 출발했고 최고관리기구는 학생총회였다. 총장의 피선거권은 ‘5년 이상 법학을 공부한 25살 이상 독신 학생’으로 돼 있었다. 볼로냐대학은 세계 대학 발달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60년대 대학가를 휩쓴 스튜던트 파워의 근원도 ‘볼로냐 정신’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최근 한국 사회를 흔들고 있는 반값 등록금 주장은 새로울 것도 없는 당연한 권리이다. 주식회사는 물론이고 택시까지 돈 낸 사람의 뜻대로 굴러가지 않던가. 각종 통계는 우리 대학생들이 선진국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등록금을 내면서 상당수가 최저 수준의 교육서비스를 받아왔음을 말해준다. 교육이 공공재임을 망각한 정부의 직무유기와 학벌주의에 편승한 대학의 등록금 무한 인상이 초래한 재앙적 결과이다.

학생들 집회로 뒤늦게 시작된 언론의 관심은 주로 등록금 인하와 부실대학 구조조정에 쏠렸다. 그러나 이대로 가면 등록금 반값 주장을 부분적으로 쟁취하는 대신 대학교육이 더욱 시장에 맡겨져 공공성을 더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신문 중에서는 그나마 <한겨레>와 <경향신문>이 대학교육의 공공성을 언급했으나 매우 부족한 분량이었고, 방향감각을 상실한 기사도 눈에 띄었다.

그런 점에서 <한겨레>가 28일 시작한 ‘등록금, 대학 공공성 강화로 풀자’ 시리즈는 너무나 굼뜬 대처가 아쉽긴 해도 상당한 기대를 걸게 한다. 언론의 의제활동은 어떤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해야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정치학자인 바크라크도 이슈화가 제대로 돼야 올바른 결정이 내려질 수 있다고 말했지만, 한국 언론은 종종 이슈화에 실패해 정책으로 성사시키지 못하거나 정책 왜곡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양극화, 저출산, 청년실업, 비정규직, 수도권 과밀과 균형발전, 토지·주택 문제 등 수많은 이슈들이 한국 사회를 시끄럽게 했으나 제대로 이슈화하는 데 실패했기에 이슈가 다시 잠복하고 문제가 증폭되는 양상을 되풀이해왔다.

 

집권세력은 이미 등록금을 일부 깎아주고 대학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선에서 대강의 정책조율을 끝낸 듯하다. 진보진영 일각에서도 반값 등록금 주장은 대학에도 진학하지 못하는 계층을 무시하는 처사이기에 ‘분배 정의에 반한다’고 말한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대학 등록금이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다는 원가개념에서 보면 정부가 일부 지원을 한다면 반값 언저리가 적정가격일 수 있다. 대학들은 건물 짓는 비용까지 원가에 포함시키려 하겠지만, 세칭 명문대학들이 초호화판으로 짓는 건물은 대학의 학문적 성취나 양질의 교육과는 관련이 없다. 재벌들이 지어준 건물이 많은데, 그들이 세금을 제대로 내고 정부가 예산을 분배했더라면 명문대학에만 재벌빌딩들이 즐비하게 들어서지 않았을 터이고, 그 돈을 장학금으로 돌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등록금 인상을 선도하는 서울의 일부 대학들을 방문해보면 샹들리에와 대리석으로 건물 안팎을 장식하고 교수연구실 가구도 원목으로 들여놓아 대기업 중역실을 방불케 하는 데가 꽤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 초청으로 객원연구원으로서 그의 연구실을 처음 방문한 날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한국 교수연구실 절반 정도 되는 공간을, 그것도 두 교수가 함께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선진국, 특히 유럽에서는 교육을 공공재로 보고 국가가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대신 대학의 공공성을 강하게 요구한다. 런던대학에 다니면서도 케임브리지에 6년간 살면서 누렸던 가장 큰 이점은 ‘퍼블릭 렉처’라 부르는 공개강좌를 듣는 거였다. 특히 다윈 칼리지 공개강좌는 학문 분야가 다른 세계적 석학들이 초청돼 한해는 ‘갈등’, 다음에는 ‘생존’ 등을 주제로 연강을 하는데 늦게 도착하는 시민은 다른 강당에서 영상강의를 들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유럽 대학들이 지역사회와 국가에 대한 공적 서비스를 늘리게 된 데는 역사가 있다. 대개 귀족·성직자 학교로 출발한 대학들은 지역사회와 갈등관계에 놓이게 된다. 케임브리지에서 ‘가운(gown) 대 타운(town)’의 대립은 살인사건이 여러 번 발생할 정도로 심해지면서 유화책으로 대학 시설을 개방하고 시민 공개강좌를 열었다고 한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한국의 ‘젊은 석학들’을 서울 강의실로 초청해 개설한 ‘인문교양 특강’과 ‘사회교양 특강’ 같은 무료 공개강좌도 그것을 흉내 냈다. 보람을 느끼지만 스쳐가는 분노도 있다. ‘서울에서는 국립대학인 서울대가 해야 할 일인데 지방 사립대가 여기 와서 왜 이러나’ 하는 것이다. 서울대를 비롯한 국립대학 법인화는 사실상 사립화를 의미하는 것이니 이익 나지 않는 일을 꺼려 공공성은 더욱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한국 대학들은 국가와 사회로부터 각종 배려를 받으면서도 대부분 지역사회와는 그야말로 ‘담장을 둘러치고’ 배타적으로 존재한다. 대학 내 주차장도 손님에게는 비싼 요금을 받고 교수들은 주인이랍시고 공짜 또는 할인가격에 사용한다. 이름하여 '수익자 부담 원칙'. 내가 등록금을 내고 다닌 모교에 볼일이 있어 들어갈 때도, 내가 세금을 내 운영되는 국립대학에 들어갈 때도 주차요금을 물라고? 도대체 누가 대학의 주인인가? 공공성 확보는 정부가 대학을 지원할 때 주요 변수로 고려해야 한다.

부실대학에 대한 정부 지원을 줄여 구조조정을 촉진하겠다는 발상에도 공공성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대학 경영부실은 학생 잘못이 아닌데도 그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는 점, 실용전문교육에 치중하는 4년제 또는 전문대학들이 일차적으로 피해를 보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차라리 실업계 고교와 대학의 전문교육에 예산을 지원하고, 교육과 취업 사이에 불일치가 심각한 대학에는 지원을 줄이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적성을 고려하지 않고 간판을 따려 진학하는 학생은 명문대학에 더 많다. 부실한 사립대학은 폐교할 게 아니라 국공립화가 적절한 대안이다. 국공립 대학을 줄이겠다는 교육당국의 발상은 대학의 공공성을 결정적으로 훼손할 것이다.

학벌사회 타파는 교육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근원 처방이다. 수많은 문제들이 거기서 비롯되는데도 내 기억으로는 한국 언론이 그 의제를 연중 기획물 정도로 심층보도한 적이 없다. 이번에 시작한 시리즈에도 한번 다루기로 계획이 잡혀 있지만 단 1회 기사로 표시만 낼 일이 아니다. 그것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뜨거운 교육열을 식히고 교육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가장 중요한 시도가 될 것이다. 교육에 침투한 경쟁지상주의와 시장주의도 걷어내야 한다. 시장주의자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애덤 스미스까지 공공교육은 기부금에 의존하거나 시장원리에 맡기지 말고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이 기사는 <한겨레>와 동시에 실리지만, 일부 내용이 보완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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