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예속

▲ 고륜형 기자

왜 대중은 마치 그것이 자신의 행복이라도 되는 양 스스로 예속을 욕망하는가? 스피노자가 던진 질문이다.

자연계에는 열역학 법칙이 있다. 열로 치환되는 에너지가 어디에 얼마만큼, 어떻게 이동하는지 설명하는 법칙이다. 이 중에 제 2법칙, 엔트로피의 법칙이 있다. 엔트로피(S)라고 하는 무질서의 척도를 나타내는 법칙이다. 에너지는 자연 상태에서 무질서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방 안에 책을 쌓아두면 점점 어지럽혀지는 것과 같다. 무질서는 자연 현상이다. 하지만 인간은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는 존재다. 밥이라는 연료를 먹고 방 정리를 한다. 무질서한 방을 다시 깨끗이 청소하는 일은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는 일이다.

엔트로피를 거스르는 일은 에너지가 많이 든다. 방 청소를 해야 한다는 기획과 실제로 방을 정리하는 행동이 필요하다. 에너지를 먹고 엔트로피를 거스르는 일을 한다. 무질서를 질서로 바꾸기 위해 많은 열량과 에너지, 혹은 노력이 필요한데도 방 청소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금 지나면 다시 무질서해지기 마련인데 말이다. 이유는 쾌적한 느낌 때문이다. 인간은 쾌적한 환경에서 살 때, 좀 더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낀다. 환경과 결부된 인간 본연의 생존 본능 때문이다. 엔트로피를 거스르는 일은 힘들지만 자유의지는 인간 본연의 능력이다.

방 청소를 하지 않으면 편하다. 고민도 필요 없고 힘들게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포기하면 편하다. 대중이 스스로 예속되길 원하는 이유도 자유의지를 포기하면 편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예속된다는 건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나의 의지를 맡기는 것이다.

▲ 왜 대중은 마치 그것이 자신의 행복이라도 되는 양 스스로 예속을 욕망하는가? 스피노자가 던진 질문이다. ⓒ Flickr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히틀러와 같은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인물에게 대중은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면서 나의 자유의지를 맡겼다. 자유의지를 포기한 그들은 대신 생존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른 민족을 멸종시켜 경제적 경쟁자를 제거하고 일자리를 확보함으로써 보다 나은 삶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자민족의 우월감과 ‘하나’라는 일체감 그리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명분도 얻을 수 있었다. 자유의지를 포기한 대가는 달콤했다. 달콤함이 곧 행복인 줄 알았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자유의지를 한 사람, 혹은 한 국가에게 내맡긴 결과는 참혹했다. 행복인 줄 알았던 보상들은 국제적 피해보상과 영영 회복할 수 없는 국가적 불명예로 돌아왔다. 인간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게도 했다. 무질서로 흘러가게 된 결과다. 자유의지를 포기한 무질서는 인간 파괴를 가져온다.

개인을 규정하는 것은 자유의지다. 엔트로피를 거스르는 능력은 인간임을 입증하는 일이다. 헌법에 신체의 자유와 직업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을 명시한 것도 인간 본연의 자유 의지를 보장하기 위함이다.

인디언 속담 중에 ‘사람의 마음에는 양심이라는 세모가 있다’고 한다. 사람이 잘못된 일을 할 땐 그 세모가 돌아가는데, 마음이 아프고 어딘가 찔리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그 세모의 각진 모서리가 마음을 찌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나쁜 일을 반복하면 세모는 점점 닳아 동그래진다. 세모가 원이 되면 사람은 점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마음이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엔트로피를 거스르는 일은 힘이 든다. 에너지가 필요하고 연료가 필요하다. 자유의지를 포기한 인간은 편하다. 예속은 편하다. 하지만 인간이길 입증하는 자유의지를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에 불행하다. 생존을 보상받는 대가로 불행을 행복이라고 눈 가리고 있을 뿐이다. 독일의 나치 밑에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행동한 사람이 있었다. 비록 그들의 자유의지가 물질적 불행을 가져왔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한 행복은 보상받지 않았을까.


편집 : 민수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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