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시간

▲ 고륜형 기자

영화 <어벤져스>의 주인공 퀵 실버의 주제가는 <Time in a bottle>이다. 시간을 자유자재로 멈출 수 있는 주인공에게 유리병 속에 시간을 넣어 영원을 얘기하는 <Time in a bottle>은 얼핏 안성맞춤으로 비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주인공은 시간을 멈추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보다 몇백 배 빨리 움직일 뿐이다.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깨어나 보면 죄수는 탈옥했고, 간수의 열쇠는 사라졌다. 병 속에 담긴 영원의 시간은 주인공이 공간을 활보하는 것과 정반대다.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엘 디아블로 역시 유리병을 지녔다. 자신의 능력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는 화가 나면 온몸에서 불을 뿜는다. 철제 드럼통 안에 스스로 갇힌다. 일종의 자기통제다. 화를 딱 한 번 통제하지 못한 그는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아내와 자식을 불로 태워 죽인 것. 고통 속에 사는 그는 아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손바닥 위에 불 영상을 띄운다. 춤추는 불의 여인은 곧 숨이 막혀 쓰러진다. 유리병 속에 갇혔기 때문이다. 유리병 속은 죽음이란 영원을 만드는 공간이다.

▲ 제한된 공간 속 시간은 흐를 수 없기에 영원하다. ⓒ Joemonster

<어벤져스>와 <수어사이드 수쿼드>의 유리병은 영원을 그린다. 하나는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놓을 수 있는 공간, 다른 하나는 죽음이란 영원을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유리병은 각자의 소원이 담긴, 시간이 제한된 밀폐 공간이다. 시간은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 시간은 공간을 압박하고 공간은 시간을 가둔다. 제한된 공간에서 시간이 멈추는 아인슈타인의 시공 개념이다. 유리병 속 행운의 편지가 ‘언젠가’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는 희망은 그래서 의미를 갖는다. 제한된 공간 속 시간은 흐를 수 없기에 영원하다.

‘동짓달 기다 긴 밤의 한가운데 허리를 베어내어 님 오시 날 밤 굽이굽이 펴리라’라고 노래하는 황진이의 시조는 영원의 시간을 꿈꾼다. <Time in a bottle>을 작곡한 짐 크로스(Jim Croce)와 같은 심정이다. 그는 아내가 임신했을 때 ‘시간을 유리병 속에 넣을 수 있다면, 첫 번째로 하고 싶은 일은 시간을 모아 너와 함께 보내고 싶다’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비록 채 1년도 안 돼 비행기 추락 사고로 숨지면서 이승에서의 시간이 멈춰버렸지만... 이육사는 <광야>에서 내달리는 산맥들과 바다를 읊는다. 무한히 펼쳐진 광야에서는 시간이 무한대로 흐른다. 일제강점기 시대적 고통으로 멈춰버린 시간. 육사는 저항시 <광야>를 통해 민족의 노래를 무한대로 펼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박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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