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삶의 터전 지키는 이들의 서울형 도시재생

남산도서관을 끼고돌면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동네가 나온다. 그 아래로 2013년 만든 보행로 데크를 끼고 가파른 길이 하나 보인다. ‘해방촌 오거리’이다. 아찔한 경사와 복잡한 주변 환경 때문에 주민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를 고쳐 보행자 친화도로로 만들자는 움직임이 거세다. 주체는 도시재생 주민협의체. 방법은 ‘해방촌 오거리 디자인 아이디어 설계 공모전’을 통해서다. 이곳만이 아니다. 해방촌에서는 작년부터 낙후된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마을 공동체를 복원하는 ‘서울형 도시재생’ 사업이 활발히 펼쳐진다. 이 덕에 남산 아래 첫 동네 잠잠하던 해방촌이 오랜만에 활기에 차 넘친다. 25일, “찾아가는 현장 시장실”의 일환으로 박원순 시장이 해방촌 곳곳을 누비며 지역을 지키는 이들의 삶을 보듬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 현장을 함께 다녀왔다.

▲ 25일 오전 8시부터 해방촌을 찾은 박원순 시장. ⓒ 윤연정
▲ 일대를 돌아보면서 공공영역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논의. ⓒ 윤연정

내가 사는 곳을 ‘내 공간’으로 느끼며 일상 나누는 삶

해방촌 성당에서 다사리 협동조합이 만드는 ‘전통장’. 된장과 고추장에 쓸 콩을 직접 재배하는데다, 장을 직접 담가왔던 어르신들의 노하우가 더해져 깊은 맛을 내기로 이름 높다. 이익금은 교육 공동체 건설에 쓰여 의미도 남다르다. 마을기업인 다사리 협동조합 남기문 이사장은 “보다 많은 학교에 건강한 식품이 보급되었으면 좋겠다”며 “아이들이 좋은 것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조과정을 아이들과 공유하는 활동의 중요성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서울시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 다사리협동조합에서 만든 전통장, 얘기 듣는 박 시장. ⓒ 윤연정

김성보 도시재생본부 주거사업기획관은 “다살이 협동조합 같은 경우 6-7개 마을 사람들이 직접 와서 물건을 사주는데, 팍팍한 서울 생활 속에서도 따듯한 정을 피워낸다”며, “스스로 뭔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민들 삶의 원동력이 된다”고 마을기업의 의의를 강조한다. 이어 “이러한 모습이 서울형 도시재생의 본질”이라며, “벽화 만들고 타일 까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내가 사는 곳을 ‘내 공간’이라고 느끼며 일상을 같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인다.

청소년, 방관자 아닌 지역문제 해결의 주체로

▲ “청소년 체인지메이커 디자인씽킹해방촌 프로젝트” 1차·2차 초기 결과물을 발표하고 있는 청소년들과 실시간 sns에 올리며 경청하는 박 시장. ⓒ 윤연정

박원순 시장의 현장 시장실은 발걸음을 ‘우리 실험자들’ 교실로 옮겼다. 해방촌 중고등학생들이 모여 좀 더 쾌적한 삶을 위한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고민한다. 청소년이 방관자가 아니라 스스로 주인이 돼 지역문제 해결하자는 기특한 노력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이어진다. ‘꿈틀꿈틀 지렁이통’은 그 산물이다. 쓰레기 불법투기 지점을 합법화시켜 환경을 개선하는 역발상. 아이디어를 낸 배준영(15·배문중)군은 “다른 봉사와 달리 직접 문제개선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며 도시재생 프로젝트의 장점을 꼽았다. 박원순 시장도 고개를 끄덕인다. “학생들이 주민들의 의견을 받아 보완한 것”이라며 “앞으로 더 발전시켜 나가면 실제로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젊은 예술과 오랜 전통의 공존이 희망 일궈

이날 현장시장실의 종착역은 신흥시장. 도로 사이 좁은 길 안쪽의 낡은 상점들. 생명력이 없는 가라앉은 분위기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시장 내 곳곳에 생기가 돈다. 곳곳에 새로 들어온 젊은 예술인들 덕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오래전부터 자리를 지켜왔던 어르신들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해방촌에 새로 유입되는 젊은이들과 기존에 거주고 하고 있는 주민 모두 소통하며 살아가자는 의지가 강하다.

▲ 80년대 이후 30년이 넘게 침체된 사람 없는 신흥시장. ⓒ 윤연정

젊은 주얼리 작가 김새롬(24)씨는 ‘Vacia’라는 자신의 공방을 만들기 위해 3월부터 신흥시장에 왔다. 이렇게 새로 들어오는 젊은이를 시장의 기존 주민들은 마냥 달가운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물려줘야 될 때가 왔다며 열심히 해 이곳을 살리기 바란다며 환영하는 속내도 내비친다. 그런 점에서 희망을 본다는 김 작가는 “반찬가게, 생선가게들이 점점 없어지는데, 그런 공간이 모두 젊은이들로만 채워지는 걸 원하지 않다”며, “전통시장의 모습과 젊은 모습이 반반씩 어울렸으면 좋겠다”고 희망한다.

“나간다 나간다 하지마.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거야”

▲ “희 양장점”자리에서 변화를 받아들이는 신흥시장 어르신들의 이야기와 변화를 가져오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공간. ⓒ 윤연정

그 반반씩 어울리는 공간을 위해 들어온 강민희(27)씨. 신흥시장의 “안녕, 희” 전시 기획 및 홍보를 담당하던 강씨는 공동으로 “희양장점”을 임대해 들어왔다. 강씨가 시장 주민들과 나눈 대화 중 가장 마음이 따뜻했던 말이 바로 “나간다 나간다 하지마.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거야”였다며 기분 좋은 웃음을 짓는다. 그렇다. 희망은 그렇게 새로운 사람과 함께 들어오는 것이다.

강씨는 “어르신들은 젊은 애들이 단순히 둘러보고 그냥 가는 존재가 아니라, 여기에 와서 살아보고자 노력하는 친구들이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다”며, “시장을 우리만의 이야기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계셨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담아서 우리 또래를 거쳐 다음세대로 넘겨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다. 집값이 싼 매력도 있었지만, 이곳은 차 한 잔 마시고 지나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해방촌을 택한 사연을 들려준다.

생활과 예술의 공존 ‘해방 아트마켓’

이날 박원순 시장이 참석한 가운데 해방촌 도시재생 사업 연구 및 지역발전 상생협력 토대 구축 등을 위한 서울시·용산구·동국대·주민협의체 4자간 MOU를 체결하고 ‘해방 아트마켓’의 닻을 올렸다. 해방촌 도시재생사업 총괄기획을 맡은 한광야 동국대 교수는 “젊은이들의 건강한 열정이 동네에 활기를 불어 넣을 것이라고 주민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점에서 미래가 기대된다”고 전망한다. 손행조(76) 주민협의체대표는 “서울시 도시재생사업이 끝나고도 마을 사업은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며,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해방촌이 투기장화되지 않고 주민들의 공간으로 남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공동체의 의무”라고 강조한다.

▲ 동국대와 지역 대표 MOU 맺는 사진. (왼쪽부터 순서대로 성장현 용산구청장, 박원순 서울시장, 한태식 동국대학교 총장, 손행조 주민협의체 대표). ⓒ 윤연정
▲ 시장이 어떻게 변화되길 기대하는지에 대한 주민 토론회. ⓒ 윤연정

해방촌은 역사적 굴곡이 새겨진 동네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 난민들이 산기슭에 터전을 잡은 곳. 가난과 고난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공간이다. 하지만 이제는 주민들이 뭉쳐 해방촌을 ‘해방’되고 싶은 공간에서 ‘해방’시켜 진정한 행복의 공간으로 만들어 간다. 목표로 한 5년이라는 시간을 넘길지도 모르지만, 남녀노소, 전통과 현대가 어울리는 공동체를 꿈꾼다. 얼핏 조용하지만 생기 있게 움직이는 해방촌의 날갯짓을 함께 지켜보고 싶은 이유다.

▲ 저 멀리 보이는 해방촌 전경. ⓒ 윤연정

이 기사는 서울시의 새로운 미디어 서비스 '내 손안에 서울'(http://mediahub.seoul.go.kr/)에도 공동 게재됩니다. 

편집 : 강민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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