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서울역도보투어 체험기

2천 년 전 온조가 백제를 세운 서울. 천만 시민이 바쁜 삶을 꾸려가는 서울은 그만큼 두터운 역사의 무게가 얹혀있다. 백제의 왕성인 풍납토성에서 석촌동 백제고분군, 고구려와 백제군이 맞붙던 아차산성의 고대 유적부터... 박해받는 신도들을 치료하던 서양인 신부의 인술이 어린 개화기, 커피와 샌드위치를 즐기던 식민지 지식인 이야기까지... 서울의 역사 지층에 고스란히 자국을 남겼다. 서울시는 청년기업 ‘안녕서울(대표 윤인주)’과 함께 서울의 숨겨진 이야기를 소개하는 ‘걷다보니 서울여행-서울역도보투어’를 오는 10월까지 매주 네 차례씩 진행한다. 서울시 홈페이지에 가입하면 누구나 무료로 참여할 수 있다. (참가신청 : http://yeyak.seoul.go.kr) 기자도 지난 2일 오후 4시부터 시작된 여행길을 따라나섰다.

옛 서울역사 앞.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부터 카메라를 든 청년, 단아한 모시옷 차림의 중년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 십여 명이 모였다. 출석체크를 하고, 오늘 행선지 위치가 그려진 관광 지도를 건넨다. ‘안녕서울’ 직원인 권민정(26) 씨가 가이드를 맡았다. 작년부터 서울 도보투어를 진행해 온 ‘안녕서울’은 서울역 고가도로 재생 사업인 ‘7017 프로젝트’를 앞두고 서울역 주변 역사를 시민들과 나눠보자는 취지로 서울시와 함께 이번 행사를 기획했다.

▲ 1925년 준공된 옛 서울역은 복합문화공간인 ‘문화역서울284’로 바뀌었다. ⓒ 신혜연

현대건물 사이로 고풍미를 간직하고 있는 옛 서울역은 ‘경성역’이란 이름으로 1925년 문을 열었다. 서양의 르네상스 양식과 고딕 양식을 절충한 겉모습이다. 2층 건물조차 드물던 시기에 화려하게 지어진 경성역은 멀리서도 두드러지는 랜드마크이자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근대화의 상징과도 같았다. 2층 서양식 레스토랑 ‘그릴’은 당시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였다. 소설가 박태준, 이상 등이 자주 찾았다고 한다. 이상의 소설 <날개>에는 주인공이 이곳에 차를 마시러 왔다 되돌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설렁탕이 한 그릇에 15전이던 당시, 이곳의 양식코스 요리는 3원 25전이었다. 설렁탕 20그릇과 맞먹는 가격이다.

▲ 서울역에서 서계동이 내려다보인다. 서계동은 서울의 서쪽에 있는 ‘계’(옛날 ‘동’과 같은 개념의 행정구역)라는 뜻으로 본래 ‘서계’로 불리다가 일제 강점기에 행정구역 명칭을 통일하면서 ‘서계동’이 됐다. ⓒ 신혜연

첫 방문지인 서울역 뒤 서계동으로 발길을 옮겼다. 청파역이 있어 ‘청파동’이라 불리던 이곳에는 원래 마구간이 늘어서 있었다. 전차가 생기기 이전에 ‘역’은 갈아탈 말을 보관하는 장소였다. 근대식 역이 생기고 나서는 말이 있던 자리에 봉제공장이 들어섰다. 지금도 서계동을 거닐다 보면 가내공장에서 미싱 돌리는 소리가 정겹게 들려온다.

▲ 1980년대 군 수사 정보기관인 기무사가 있던 자리. 지금은 국립극단이 사용하고 있다. ⓒ 신혜연

대형 건물들이 경쟁하듯 높이 올라선 서울역 앞쪽과 달리, 역 뒤편의 서계동은 아담한 건물들이 오순도순 어깨동무한 모양새로 정겹다. 그 이유가 1981년부터 30년간 이곳을 지킨 기무사의 보안 업무상 500미터 이내에 3층 이상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한 덕분이라니... 지금 기무사가 떠난 자리에는 1950년부터 활동해온 국립극단이 터를 잡았다. 기존 건물을 최대한 살린 채 사용하고 있다. 옛 기무사 수송대 건물에서는 이제 날마다 다채로운 공연이 상연된다. 현대사의 어둡던 그늘 한 켠이 시민 터전으로 밝게 변한 셈이다.

서계동에서 만리재를 기점으로 중림동으로 넘어간다. 만리재는 세종 때 한글 창제를 반대하던 최만리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의 집이 만리재 근처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좁게 난 골목길을 올라가니 ‘손기정 체육공원’이 나타났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가 외신기자들에게 써준 한글로 친필서명이 체육공원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체육공원은 손기정 선수가 다니던 양정고등학교 건물이었다. 올림픽 우승 당시 손기정 선수가 선물 받은 참나무도 공원에 심어져 지금은 대형 참나무로 자랐다.

▲ 손기정 체육공원에 심어진 참나무.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기념으로 받아온 참나무다. ⓒ 신혜연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 성당은? 힌트를 주자면, 명동성당은 아니다. 정답은 약현성당이다. 약현성당은 명동성당보다 6년 일찍 1892년 완공됐다. 착공은 명동성당이 먼저 했지만, 규모가 작은 약현성당이 먼저 완공돼 ‘최초’ 타이틀을 달았다. 서울역 근처에 약현성당이 생긴 이유는 박해받은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단다. 약현성당 맞은편에 서소문이 바라다보이는데, 서소문은 순교지로 악명 높다. 서울에는 네 개의 대문(사대문)과 네 개의 소문(사소문)이 있는데, 소문으로 시체를 옮겼다. 순교자들의 시체는 서소문을 통해 나왔고,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약현성당을 이곳에 지었다는 것이다.

▲ 약현성당 입구. 성당 안에는 서소문 순교자를 기리는 장소가 마련돼 있다. ⓒ 신혜연

염천교는 조선 시대 화약을 제조하던 염초청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염청교’로 부르다가 음이 변해 ‘염천교’가 됐다. 집이 없는 이들이 주로 살던 염천교 근처에 한국 최초의 수제화 상가가 만들어졌다. 서울역 근처에서 미군의 신발을 밀수해서 이를 재가공해 팔았다. 6.25 직후 수제화는 요즘 돈으로 150만 원 정도에 살 수 있는 고가품이었다고 한다.

▲ 염천교 근처에는 오래된 수제화 가게가 늘어서 있다. ⓒ 신혜연

조선 시대 한양은 성곽도시였다. 총 길이 18.2km에 달하는 성곽이 한양을 둘러쌌다. 성벽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다.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얹은 성벽지붕 아래쪽에는 중간까지만 이어지는 작은 홈이 패여 있다. 빗물이 성벽을 타고 흐르지 못하도록 만든 ‘물 끊기’다. 성벽 중간에 크게 뚫린 구멍은 활이나 포를 쏘던 문이다. 일자로 뚫린 포문은 멀리 있는 적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고, 아래쪽을 향해 뚫린 포문은 가까이에 있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 서울을 둘러싼 성곽. 가운데 뚫린 구멍이 포문이다. ⓒ 신혜연

성곽을 따라 남산 위 백범광장을 거쳐 마지막 행선지인 남대문 교회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 부설 교회였다. 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에 지어졌던 제중원은 남대문 밖인 지금 자리로 확장 이전했고, 교회도 자리 잡았다. 이후 병원은 연세 세브란스 병원이란 이름으로 신촌으로 이전했고, 교회만 남았다. 서울시는 남대문 교회를 100년을 내다보고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드라마 <미생> 촬영지로 유명한 ‘서울스퀘어’가 들어서기 전에는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보이는 랜드마크였지만, 이제는 숨은 유적지로 변해가는 실정이다.

▲ 서울스퀘어 뒤편에 있는 남대문 교회. 국내 최초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의 부설 교회로 출발했다. ⓒ 신혜연

세 시간의 긴 여정을 마치자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운다. 강다래(27) 씨는 “서울역 주변에 역사와 관련된 공간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며 “직접 걸으면서 들으니 설명도 쏙쏙 들어와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즐거워한다. 가족, 친구와 행사를 찾은 시민들은 모두 만족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정비되지 않는 골목길을 걷거나 성벽을 따라 이어진 산길을 올라가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가족 단위 참가자들을 위해 걷기에 좀 더 수월한 코스를 개발해야겠다”는 ‘안녕서울’ 윤인주 대표의 공약이 하루속히 실현되길 기대해 본다.


이 기사는 서울시의 새로운 미디어 서비스 '내 손안에 서울'(http://mediahub.seoul.go.kr/)에도 공동 게재됩니다. 

편집 : 민수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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