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제천 폐교에 둥지 튼 만화가 김대중 씨

 ▲ 폐교 옆 텃밭에서 밭을 갈고 있는 김대중 대표 ⓒ 김지영.

충북 제천시 수산면 대전리의 수산초등학교 대전분교는 학생 수가 줄어 1999년에 폐교됐다. 그런데 이 학교에 지난해 8월부터 변화가 생겼다.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이다. 교실 네다섯 개짜리 단층 건물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털이 덥수룩하게 자란 페르시안 고양이 한 마리가 학교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지난 3월말 이 곳을 찾았을 때, 건물 옆 작은 텃밭에서 한 남자가 땅을 고르고 있었다. 빡빡 민 머리 위로 눌러쓴 모자, 검은 뿔테 안경.

“동네 주민이세요?”
“만화책 만드는 사람입니다.”

대안만화 출판사 <새만화책>의 김대중(38) 대표였다. 서울대 산업디자인과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지난 2002년 <자지 도시의 아름다운 추억>이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의 사전제작지원 공모 장편만화 부문 우수작으로 선정되면서 만화가로 입문했다. 같은 해 출판사 <새만화책>을 열었고, 이후 <한겨레> <씨네21> <한겨레21> 등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여러 작가들의 만화작품을 출판하고 있다.

출판사 <새만화책>은 고영일, 권용득, 김은성, 김수박, 앙꼬 등 20여 명의 만화가들과 함께 하면서, 지금까지 60여 종의 책을 펴냈다. 특히 <노근리 이야기(박건웅 작)>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앙꼬의 그림일기(앙꼬 작)>와 <꽃(박건웅 작)>은 프랑스에서 각각 현지어로 번역 출판되기도 했다. 판매량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국내 만화가 해외에 진출한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 만화지 <새만화책>(왼쪽),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출판된 <노근리 이야기>

그런데 이렇게 잘 나가던 <새만화책>이 왜 갑작스럽게 시골의 폐교로 이전했을까?

“서울에 계속 있는 게 부담스러웠어요.”

서울 양재동 사무실에서 그럭저럭 살림을 꾸려왔지만, 책과 짐이 늘어날수록 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숨 가쁘게 오르는 물가에 사무실 운영비나 생활비 압박도 만만치 않았다. ‘어디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곳이 없을까’ 궁리하던 차에, 마을 공동체 사업을 위해 대전리에 머물고 있던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예마네)>의 소개로 폐교를 알게 됐다. 사무실 식구 2명과 함께 이 곳으로 옮겨왔다. 컴퓨터와 전화 등 집기를 놓고 난로 등 난방시설도 갖췄다. 집은 대전리에 따로 얻었다.

불편함도 잊게 만드는 건강하고 즐거운 시골생활

▲ 김대중 대표 ⓒ 김지영.  

“불편한 게 많죠. 인터넷 선도 하나밖에 못 끌어다 써요. 인터넷이 마을 전체에 스물다섯 회선밖에 안되는데, 회선을 더 늘리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그냥 그런가보다 했죠. 도시의 편안한 삶과 비교하면 이것저것 열악한 것들이 많아요.”

특히 교통이 불편하다. 마을에서 읍내로 나가는 버스가 하루에 여섯 차례뿐이라 뭔가를 사러 나가는 것도 힘들다. 작가들은 여전히 서울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작가들과 만나고, 원고를 주고받는 일도 많이 번거로워졌다.

하지만 새로운 즐거움이 이런 불편들을 기꺼이 견디게 해 준다. 농사를 짓게 된 것이 대표적이다. 비록 학교 운동장 한 구석과 부근 텃밭을 개간해 인삼, 무 같은 농작물을 조금 심는 게 전부지만, 마을 주민들이 자주 들러 종자도 가져다주고 이것저것 살갑게 가르쳐 주기도 한다. 이전보다 적은 비용으로 훨씬 넓은 사무실 공간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도 만족스러운 부분이다.  

“농사도 짓고, 좋은 공기 속에 살아서 그런지 술 먹고 담배 피고 해도 다음날 몸에 이상이 없어요. 서울에서 어떻게 살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 서울에선 고민하는 시간이 많았는데 여기선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어요. 마음이 평화로워졌죠.”

지난 겨울동안 김 대표는 마을 어르신들과 아주머니들에게 한글과 그림을 가르쳐주었다. 특히 지난 3월에는 <예마네>와 함께 대전리 주민들의 이야기가 담긴 잡지 <뒤싯골 지나 방아다리 건너>를 펴내기도 했다. ‘뒤싯골’과 ‘방아다리’는 대전리의 열두 고을 중 각각 동쪽과 북쪽 끝에 있는 마을의 이름이다.

“사람들과 만나 뭘 한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습니다. 가르쳐 드린다고 해서 마을 분들이 당장 큰 성과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잠재되었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어선지 많이들 기뻐하십니다. 조금씩이나마 실력들이 늘고 있기도 하고요.”

마을 주민 가르치며 얻는 '자유와 공존의 기쁨'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서 느끼는 기쁨은 김 대표가 이 곳에 오기 전엔 기대하지 못했던 소득이다. 사무실로 쓰는 교실 옆방에는 마을 주민들이 그린 작품과 그동안 함께 찍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김 대표는 마을 주민에게 만화도 가르친다. 아직까지는 학생이 얼마 전 귀농한 주민 한 명뿐이지만, 앞으로 만화학교를 만들어 마을 주민들과 함께 작품도 만들어볼 계획이다.

▲ 제천시 수산면 대전리에 위치한 대전분교. 1999년 폐교되었지만 현재는 출판사 <새만화책>의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 김지영

“좋은 만화를 많이 그려서 널리 읽히게 하고 싶어요. 특히 일본 상업만화를 모방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작가의 개성과 목소리가 많이 담긴, 상상력이 풍부한 작품을 내고 싶습니다.”

그래선지 <새만화책>에서 펴낸 만화들 중에서는 작가의 독특한 상상력이 발휘된 작품들이 많다. 김 대표가 그린 <자지 도시의 아름다운 추억>에선 모든 등장인물의 얼굴이 남성의 성기 모양이다. 만화 속 구성원들의 우상 숭배, 인간의 얼굴을 얻으려는 불법 수술, 끔찍한 형태의 생명 탄생 시나리오 등은 사회적 금기를 넘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그의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어떻게 버틸까’를 고민하다 제천의 폐교에서 ‘자유와 공존의 기쁨’을 얻었다는 만화가이자 출판사업가 김대중. 그가 시골 사람들과 함께 그려낸 만화엔 어떤 얘기가 담길지, 기다려볼 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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