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어가는 수제화 시대, 구두 장인들의 이야기(상)

 ▲ '리갈' 앞 길가에 세워져 있는 '구두작크 수선' 팻말. ⓒ 최원석

몇 달 전 최원석(27) 기자가 아끼던 구두가 망가졌다. 정확히 말해 밑창에 구멍이 났다. 4년 전 인도에 여행 갔을 때 우리 돈 3만 원 가량을 주고 산 태슬 로퍼(tassel loafer, 바닥이 얇은 구두의 한 종류)였다. 연갈색 낙타 가죽이 발 모양에 자연스레 길들여져 즐겨 신던 것이라 꼭 고치고 싶었다.  

서울 종로의 한 수선집에 갔더니 구두를 이리저리 살펴보곤 “웬만하면 좀 신다 버리라”고 했다. 밑창을 덧대는 일이 너무 어려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단다. 다른 수선집도 여러 곳 찾아갔지만 대답은 비슷했다. “맡겨도 한 달은 걸려요.”

그러기를 석 달. 어머니의 손에 들려 나간 최 기자의 구두는 서울 용문동 용문시장 인근 구둣가게에서 다시 태어났다. 낡아서 속이 다 드러났던 바닥이 두터운 밑창으로 가려졌고, 거기에 발등 부분이 단단하게 붙어 있었다. 이음새의 손질자국을 없애려 안팎으로 가죽조각을 동그랗게 붙인 솜씨에선 섬세함이 느껴졌다. 아주 새 신발을 신은 듯 편해서, 수선비 3만원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반가운 마음과 함께 궁금증이 생겼다. 이렇게 솜씨 좋은 수선공은 어떤 사람일까? 이 정도 솜씨라면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을 입에 달고 살던 <시크릿가든>의 김주원 사장(현빈 분)도 명품 구두를 맡길 만 하지 않을까? 물론 그 정도 부자라면 구두가 낡을 때까지 신는 일이 아예 없을 수도 있겠지만. 

 ▲ 길가에서 바라본 '리갈'(왼쪽), 가게 내부 모습(오른쪽). ⓒ 최원석

구두 한 켤레에 공장 삼천 개

길가에 구두 가게 두 곳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한 곳은 꽤 큰 진열장을 갖췄고, 다른 한 곳은 두 건물 틈새에 옹색하게 끼여 있었다. 최 기자는 오른 편의 작은 가게에 먼저 들어갔다. 붉은 색 테이프 토막을 삐뚤빼뚤 붙여 만든 ‘리갈’이란 가게 이름이 여닫이문에 붙어있었다. 문을 열자 김정렬(67)씨가 작은 의자에 앉아 굵고 긴 눈매로 바라보았다. 낡은 구두를 새 것처럼 고쳐준 장인이다. 어른이 양팔을 벌린 정도 너비의 가게 안에는 재봉틀 두 대와 망치, 못, 접착제, 안료통, 붓, 페인트, 실패 등 얼핏 봐도 수 십 개는 돼 보이는 공구들이 널려있었다.

“신발 산업이라는 게 중소기업 3000개를 돌려주는 산업이여.”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구두약 뚜껑과 다양한 크기의 못들, 재봉틀 탁자 밑에 쌓인 도구와 재료들, 재봉틀, 여러가지 공구들. ⓒ 최원석

구두 만드는 얘길 듣고 싶다고 했더니 김 씨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구두 한 켤레를 만드는 데 필요한 도구와 원재료, 부품 등을 생산하는 기업을 다 합치면 그 정도 되니, 괜히 복잡한 얘기 꺼내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간청하자 김 씨는 옛날 얘기를 술술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열아홉 살에 구두 수선을 배우기 시작했다. 서울 만리동에서 1년 정도 일을 하다 서대문으로 옮겨 양화점을 열었다. 친형과 함께 사람을 두고 남녀 구두를 만들어 팔았다. 모든 게 수작업이니 하루에 한 켤레 정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구두 한 켤레 값은 쌀 한가마니를 살 수 있을 만큼 비쌌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예닐곱 해 동안 용문동과 후암동 등 서너 군데를 옮겨 다니다가 용문시장에 자리를 잡았다. 구두를 만진 세월만 40년이 넘는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대기업의 브랜드 구두에 밀리고, 중국산 저가품에 밀려 김 씨의 수제화는 설자리를 잃어갔다. 
 
딸 결혼식에 가야 하는데 손에 낀 때가 안 지워져

평생 해 온 일이라 손을 놓지 못하고 있지만, 소규모 가게를 꾸려가는 일은 너무 힘들다고 김씨는 털어 놓았다. 구두 제조와 수선에 필요한 재료들은 대부분 대량으로 구입해야 하는데, 가죽 같은 것은 반품이 안 되고, 일 년에 여섯 번까지 바뀌는 구두 틀은 장만하기도 어렵다. 큰 회사야 다양한 디자인의 틀을 써가며 유행에 맞출 수 있지만, 김씨 같은 영세업자들은 그럴 여력이 없다.

 ▲ 구두산업에 대해 설명하는 김정렬씨. ⓒ 최원석

“점차 나 같은 소규모 업자들은 다 없어지고, 대기업이나 브랜드 위주로 대량생산하는 회사만 살아남지 않겠어? 어쩔 수 없지. 시대의 흐름인걸.”

가게 벽에는 김씨가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만든 구두들이 빽빽하게 걸려 있다. 곳곳에 담긴 재료들과 이 구두들을 다 합치면 3천만 원 어치는 족히 될 것이란다. 하지만 팔리는 경우는 별로 없어 김씨의 수입은 수선료로 버는 월 오륙십만 원이 고작이다. 1남 3녀는 다 출가하고 몇 해 전 부인을 저세상에 보낸 뒤 이 수입으로 혼자 생활하고 있다. 한번은 일하다 손을 베었는데 파상풍 주사가 8만원이라고 해서 혼자 불에 지지는 걸로 치료를 대신하기도 했다. 

“딸이 결혼하는데 손에 낀 때며 화학약품 냄새가 아무리 씻어도 안 지더라고.......”

딸들이 아버지를 부끄러워하는 것 같더라는 얘길 하면서 그는 머리를 긁었다.

“구두 만드는 데 화학약품이 꽤 쓰이거든. 이것들이 독해서 그런지 머리에 자꾸 뭐가 나더라구. 그래서 빡빡 밀어버렸어.”
 
구둣가게에서 <사상계>로 세상을 보다

얘기가 한국 신발산업으로 넘어가자 김씨는 놀라울 만큼 전문적인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한국 신발산업이 시작된 지 5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접착제나 안료 등 필수적인 몇 가지 재료는 일본에서 수입해온다며 목청을 높였다.

 ▲ 김정렬씨가 구두를 수선하고 있다. ⓒ 최원석

“그래서 기초산업이 중요한 것이여. 유기화학이나, 고분자공학 같은 거 말여.”

따로 공부를 했냐고 묻자 자신의 ‘독학 경력’을 들려준다.

“젊었을 때 함석헌씨의 <사상계>를 스무 권정도 사다 읽었어. 검사 된 친구 놈이 와서 잘난 척을 하길래 열이 나서 봤지. 모르는 말은 사전 찾아보고, 손님들한테 동냥공부도 해가면서 말여. 요샌 영어공부도 시작했어.”

가게 안쪽의 쪽방엔 영어사전과 회화책이 놓여 있었다.

“구두라는 거, 사람을 싣고 다니는 도구지. 기름 값 안 들고 건강 챙겨주고……제일 싸고 편리한 자가용이지........하지만 이 일은 솔직히 고되고 힘들어. 몇 십 년 일해도 이 모양인데 누가 배우려고 하겠어.”

구두를 다듬던 거뭇거뭇한 손가락 사이로 긴 ‘장미’ 담배가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삼일 만에 통곡하며 공장 뛰쳐나오던 시절

 ▲ 구두를 매만지고 있는 '잉글랜드 제화' 권오복 사장.  ⓒ 최원석
‘리갈’ 옆에 자리 잡은 큰 구두가게는 ‘잉글랜드’란 간판을 달았다. 열 평 정도의 공간에 구두들이 줄지어 진열되어 있었다. 끊어진 구두끈을 능숙한 솜씨로 수선하고 있던 권오복 (57) 사장은 용문동에서만 23년 째 이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처음 일 배우러 갔을 땐 3일 만에 통곡을 하고 뛰쳐나왔어. 망치 자루로 맞아가면서 배웠거든.”'

70년대 초, 제화 기술은 공장에 들어가야 배울 수 있었다. 하견습, 중견습, 상견습 과정을 거치고 나면 ‘선생’이 되어 밑에 사람을 둘 수 있었다. 모든 기술을 연마하려면 서너 해가 걸렸다. 이를 악물고 하지 않으면 다음 일을 배울 수 없었다.

“본드가 없을 땐 고물 안 묻힌 찹쌀떡을 사다가 물에 풀어서 많이 썼거든. 그런데 견습일 때 심부름 다녀오다가 찹쌀떡을 한 입 떼어먹고 가져 간 거야. 공장에 돌아와 선생 앞에 떡을 내놓았는데 망치자루가 머리를 딱 치더라고. 다 처먹구선 왔다는 거지.”

수십 년 전 일인데도 이 대목에서 권 사장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굽실거려야 했고, 참아야 했던 시절의 기억이었다. 어쨌든 그는 악착같이 기술을 배웠다.

“통행금지가 있던 때라, 일이 늦게 끝나면 공장에 남았거든. 선생들이 술 마시고 잠들면, 나는 몰래 재료를 가져다가 연습을 하는 거야.”

그렇게 밤잠을 아껴 혼자 연습하길 1년 반. 권씨는 남들의 절반도 안 되는 시간에 구두 만드는 기술을 다 연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이 “너 가게 좀 보면 안 되겠냐”며 영업부장직을 맡겼다. 매장의 ‘얼굴마담’이 된 것이다. 구두를 만든 경험이 있기 때문에 영업에도 유리했다. 실적이 좋아 나중엔 공장장이 되기도 했다.

 ▲ '잉글랜드제화' 내부 선반에 놓여있는 구두.  ⓒ 최원석

공무원 월급이 2만 원 가량이던 시절, 구두 한 켤레를 팔면 2800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중에서 바닥을 붙이는 기술자에게 400원, 재봉기술자에게 200원, 견습들에게 20원씩이 돌아갔다. 잘 팔면 한 달에 8만원 수입을 올렸다. 

“양복, 양장, 양화 기술자들이 일 할 땐 거지같아도 퇴근할 때는 젠틀맨이었어. 변두리에는 안 가고 명동으로만 돌아다녔지. ‘양’자 들어가는 가게 빼면 명동 땅값이 내려간다는 말도 있었고.”

그러나 상황은 노태우 대통령 시절인 90년 무렵 바뀌기 시작했다. 도로 확장 공사 등을 하면서 지금의 을지로 입구 인근 가게들이 다 철수했기 때문이다. 이후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구두제조업체들의 상황이 급속히 나빠졌다.

일 마치면 ‘말꼬리’ 잡으러 가는 근로자들

성수동에서 작은 구두 공장을 함께 운영하는 권씨는 ‘요즘 젊은이들’ 때문에 속 터지는 일이 많다고 한다.

 ▲ 성수동 '제화의 거리'.  ⓒ 최원석

“우리 때는 업주가 잘 돼야 종업원도 잘 되는 거라 생각했어. 지금 젊은 친구들은 내 일만 하면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나? 주말이면 말꼬리 잡으러 다니더라고. 그런데 언제부터 구두쟁이가 주5일 근무냐 이거야. 우리나라는 아직 선진국도 아닌데.”

‘말꼬리’란 경마를 의미했다. 공장의 근로자들 평균 연령이 마흔을 훌쩍 넘으니, 마땅한 여가활동을 가지기 어려운 탓에 경마장을 드나드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워낙 근무 환경이 좋지 않고 산업 자체가 침체된 탓에 젊은 인력들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단다. 
 
“일을 가르치는 사람도 자기 일이 늦어지니까 공들여 가르치려고 하질 않지. 또 일을 배우면 어느 정도 자기 수입이 생겨야 하는데, 요새 구두산업이 그렇질 못한걸. 젊은 사람들 이런 일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시대의 흐름인건 나도 알아. 그래도 어렵고 힘든 일, 궂은 일 하는 사람을 더 대우해줘야 하는 거 아냐?”  
 
한 때 ‘화려한 양화점 시대’를 풍미했던 권 사장과 김 씨 모두 저물어가는 시대의 끝자락에서 깊은 울분을 토해내고 있었다. 도대체 한국 구두 산업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생겼기에 장인들의 말로가 이렇게 쓸쓸해 진 것일까? (하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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