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박소희

<아프니까 청춘이다> -몇 주째 베스트셀러 1위인 책이다. 청년실업 100만 시대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88만원 세대를 위로하려 쓴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글에서 많은 이들이 위안을 얻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권위 있는 누군가가 말해야 ‘그래, 그렇지’라고 끄덕이는 현실, 그것은 ‘아픈 청춘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의 역설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란 말에 수십만 독자가 공감하는데도 매년 대학생 300명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한국 최고 과학 영재들이 모였다는 카이스트도 예외가 아니다. 석 달 만에 학생 넷이 세상을 등졌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누구도 섣불리 이유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징벌적 등록금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카이스트 대개혁’을 외치며 취임한 서남표 총장은 일정 점수 이하 학생에게는 차등적으로 등록금을 부과했다. 경제적 부담은 기본이요, ‘너는 공부를 못해’란 낙인이 가중처벌된다.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고, 때로는 흔들려도 괜찮은 게 대학생의 특권이라 말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다르다. 1등부터 꼴찌까지 순위를 따져 점수를 매긴다. 카이스트의 징벌적 등록금제는 그런 상대평가의 비정함을 드러내는 결정판이었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열등하다’고 깨닫는 건 큰 충격이다. 그 아픔을 추스르기도 전에 수많은 0이 찍힌 등록금 고지서가 날아와 부모까지 실망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서 총장은 청춘이 겪어야 할 아픔 정도로 생각한 걸까? 여기에 100% 영어강의, 재수강 제한 등은 햇볕 한줄기마저 차단하는 청춘의 감옥이었다. 누군가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했지만 아픔을 받아들일 시간도 주지 않았고 패자부활전마저 제한했다.

사실 서 총장은 악마가 아니고, 카이스트는 지옥이 아니다. 한국의 여느 대학보다 조금 심했을 뿐이다. 우리나라 대학은 ‘아프니까 청춘’이란 말 대신 ‘아파도 참아야 한다’고 말한다. ‘감옥 같던 고3시절’이 국민의 공감문구인 나라에서 대학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 들어오는 청년들에게 더 거센 경쟁을 강요한다. 학점과 영어를 비롯한 '스펙'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는다고 말한다. 학교와 사회는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학점과 영어 걱정으로 지새는 ‘범생이 양성기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성적 외에는 스스로 고민해 본 적도, 남을 위해 마음이 아파 본 적도 없는 ‘어린 아이’, 아니 ‘어른 아이’들에게 대학은 갑작스레 큰 상처를 준다. 카이스트를 비롯한 한국의 명문대학들은 그 간판만으로 ‘아플 줄도 모르는’ 청년들에게 ‘안정된 직장’이란 선물을 안겨준다. 낙오자에게는 ‘대학중퇴’라는, 한국사회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멍에를 들씌운다. 미국이 아무리 한국의 주류가 닮고 싶어하는 경쟁사회라지만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크 주커버그가 모두 대학중퇴자인 나라이다. 미국조차 경쟁의 방식이 다른데 한국에서는 그저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카이스트 사태는 아픔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와 무섭도록 덤덤한 얼굴의 청춘을 강요하는 대학의 냉혹한 면모를 보여줬다. 적당한 선에서 ‘카이스트 개선안’이 나오고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다시 ‘경쟁’과 ‘생존’만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살아오며 성공한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의 방황을 ‘방종’이라 말하고 청춘의 고뇌를 ‘잡념’이라 말할 것이다.

▲ 박소희 기자
시스템에 저항하기에는 청춘들의 힘이 너무나 미약하다. 한국의 교육은 ‘경쟁은 어쩔 수 없으니 무조건 살아남으라’고만 한다. ‘경쟁도 필요하지만, 질 수도 있고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거나 '패자부활전도 있고 또 다른 경쟁 라운드도 있다'는 소리는 현실적인 위안이 되지 못하는 사회다. 한번의 실수 또는 뒤처짐이 인생의 패배를 뜻하는 사회에서 카이스트식 변화가 해법이 될 가능성은 없다. 진정한 ‘아픔’을 배우지 못하는 교육이 계속된다면 ‘아픈 청춘’들의 비극은 늘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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