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별난 감독 장항준의 ‘알고 보면 치열했던 청춘’

“어릴 때 발달이 늦었는지 숫자 1, 2, 3, 4, 5, 6, 7, 8을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날 밤 배웠고, 끝내 8을 정복하지 못하고 진학했어요. 그 흔한 미술, 음악, 체육에도 재능이 없었죠. 딱 하나 능통한 게 있다면 거짓말이었어요.”

 ▲ 지난 18일 서울 신수동 서강대에서 진행된 장항준 감독의 <청춘> 특강. ⓒ 진희정

<한겨레21>의 창간 17주년 기념특강 ‘여기 청춘수다 있수다’의 한 순서로 지난 18일 서울 신수동 서강대 곤자가(Gonzaga) 플라자 무대에 오른 장항준(42) 감독의 얘기다. 서울방송(SBS)의 화제작 <싸인>의 작가이자 연출자, 영화 <박봉곤 가출사건>의 작가이자 배우 등 다채로운 활동을 보여 온 그는 300여 청중 앞에서 특유의 ‘까불까불한’ 말투로 ‘수다’를 풀었다.

'숙제는 곧 흑연의 낭비'라 생각했던 장 감독, 부끄러움을 알다

어린 시절 그는 공부엔 통 관심이 없었고, “반장 됐다” 등 곧 들통 날 거짓말로 어머니와 이모들을 속여 먹곤 했지만 집안에선 인기 최고였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후 가난했던 집안 형편이 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버지가 위탁받은 나일론 공장이 잘 되면서 단칸방에서 조금씩 더 큰 집으로 옮기기 시작, 마침내 동네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됐단다.

정말 ‘장항준 효과’ 때문이었을까. 지금의 서울 테헤란로가 민둥산, 잠실이 뽕밭이던 70년대 후반에 부친이 서울에서 건설업을 시작하면서 초등학교 2학년이던 그는 잠실역 부근 대저택으로 이사를 했다. 그는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을 생각으로’ 아무 걱정 없이 미국 잔디가 깔린 집 앞마당에서 야구를 하며 놀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고등학생일 때 부친 회사가 부도를 맞으면서 ‘좋은 시절’도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어쨌거나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그는 ‘숙제는 곧 흑연의 낭비’라 여기며 공부와 담을 쌓았다.  그런데 그에게 지금 대학강사를 하고 있는 한 친구가 문예동인지 활동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른바 ‘보들쓰생’, 보고 듣고 쓰고 생각하자는 모임이었다.

“장항준의 청춘 1막을 여는 신호탄이었죠.”

▲ 장항준 감독. ⓒ 진희정
2주에 한편씩 각자 자작시를 쓰고, 돌아가면서 편집장을 맡아 동인지를 내는 모임이었다. 세계사와 철학 등에 대한 토론도 했다. 이 모임을 통해 그는 부끄러움을 알게 됐다고 했다.

“시라곤 동시 밖에 몰랐어요. 역사관도 세계관도 없고 문체나 문장에 대한 이해도 없었죠. 내가 쓴 시와 친구들이 쓴 시는 너무 달라 부끄러웠어요. 걔네들보다 공부를 못하는 건 괜찮았지만 이것까지 못 하는 건 참을 수 없다 싶어 서점에 가 시집을 읽기 시작했어요.”

시집 뿐 아니라 역사, 철학 등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던 그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 쓴 마지막 작품으로 친구들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청춘의 부끄러움을 알려준 게 시였다면, 그가 무엇을 해야 할 지 알려준 건 영화였다. 영화를 좋아하던 부모님 영향으로 시험 전날도 주말의 명화를 보고 자란 ‘명화극장키드’ 장항준은 학교에 가면 친구들 앞에서 영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신문 하단에 나온 광고로 극장에서 영화를 찾아보던 시절, 그는 보지도 않은 영화에 대해 지어낸 스토리로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 앞에서 떠벌였다. 실제 영화 상영은 2시간 남짓이겠지만 ‘장항준 표’ 영화는 일주일을 갔다. 수업시간마다 다음 쉬는 시간에 들려줄 이야기를 만들어 내던 그는 당시 인기 절정이던 홍콩 느와르 영화 <영웅본색>과 마피아 영화 <대부>를 본 따 아예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갱지에 쓴 그의 소설에 학교 친구들은 열광했다.

“뉴욕을 배경으로 했고 같은 반 친구들이 보스나 오른팔 등 주인공이었어요. 조직의 총책임자는 당연히 나죠. 소설이 인기 있었던 이유는 상대편 조직 우두머리가 죄다 수학 선생님, 화학 선생님이었기 때문이에요. 학교 선생님들은 비열한 악당이고 매번 처참한 죽음을 선물했는데, 나중엔 청탁까지 들어왔어요.”

"하고 싶은 것 마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쓰레기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인기소설 작가에, 영화감독까지 혼자서 경험한 그는 대학 연극영화과에 갈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영화감독이나 작가가 되지 못한다면 기술도 없는데 뭐로 먹고 살지’하는 현실적 고민 때문에 망설였다.

이 때 그의 ‘청춘 2막’을 열어 준 또 다른 친구가 나타난다. 아버지가 종로경찰서장이던 친구가 관내 영화관 초대권 두 장을 들고 왔는데, 88년 개봉한 영국 멜로영화 <썸머스토리>였다. 그렇게 엄청난 작품도 아니었는데 그는 펑펑 눈물을 흘렸고, 그날 가족들 앞에서 연극영화과 진학을 선언했다.

▲ 1988년 피에스 해가든 감독이 만든 영국의 멜로 영화 <썸머 스토리>.

“집으로 가는 버스가 중앙극장 앞에 잠깐 섰는데, 창밖으로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예식장에 온 사람들, 시골에서 올라와 길을 묻는 할머니, 나들이 가려고 나온 가족 등.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내 눈에는 없는 것 같았어요.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안 될 거라면 차라리 하고 싶은 걸 하다 죽자고 생각했죠.”

연극영화과에 가겠다는 자식이 있으면 말리던 그 시절, 그는 오히려 ‘하고 싶은 게 있어 다행’이라는 응원을 받으며 서울예전 연극과에 입학했다. 연극과를 선택한 것은 “영화과나 연극과나 다 비슷비슷하고, 나중에 옮길 수도 있다”는 한 지인의 불성실한 조언 때문. 그는  뒤늦게 시나리오 수업을 청강하는 등 영화공부를 따라 잡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닥치는 대로 수업을 듣고 책과 대본을 읽고 필독 영화를 봤다. 당시 그는 ‘시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치열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학교 안에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신입생 아니면 졸업생이었죠. 중간이랄 것이 없는 2년제 대학생활에서 1년이 지나면 곧 나가라고 할 게 두려웠어요. 내가 하고 싶다고 한 것 마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막말로 진짜 쓰레기가 될 것 같았어요.”

자기 과 학생들 취업도 다 신경 쓰지 못하는 영화과의 교수로부터 타과 학생 장항준이 김영빈 감독의 <비상구가 없다> 객원 연출부 자리를 소개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치열함 덕이었을 것이다.

어렵게 첫 발은 내딛었지만 앞으로 나가는 것은 힘들었다. 열심히 일했지만 5개월 동안 10원도 받지 못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얼마 못 가 회사는 부도났고 그는 백수가 됐다. 일자리를 잃고 방황하던 중 불현듯 SBS에 아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대학시절 청강을 할 때 몇 차례 수업을 같이 들은 적 있던 타과 학생이었다. 개인적으로 별 친분이 없었지만 작은 기회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연락을 했다.

고된 FD 생활에서 예능 작가 되는 기회 잡다

때마침 <꾸러기 대행진>의 보조연출자(FD)자리가 비어있었다. 촬영 준비부터 출연진 커피 챙기기까지 고된 생활이 이어졌지만, 집으로 돌아와 그날 있었던 회의 내용을 바탕으로 코너 내용을 습작하고 영화 3편을 챙겨본 후 잠자리에 드는 일상을 반복했다. 

“스릴러물을 보기 전에 뒤로 가서 범인이 누군지 확인한 후 앞에서부터 돌려 보면 영화의 구조가 보입니다.”

▲ 강의를 하고 있는 장항준 감독. ⓒ 진희정

당시 시간은 부족한데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만든 그만의 영화 접근법은 훗날 영화를 제작하는데 좋은 훈련이 됐다. 어떤 페이크(속임수)를 써서 범인을 등장시키는 지 등 영화를 분석하는 힘을 길러준 것이다.

힘든 FD 생활 속에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온 그에게 기회가 왔다. 팩스로 도착해야 할 대본이 들어오지 않은 상황. 작가와 연락이 닿지 않자 그는 습작 노트에 있던 소재 중 하나를 타이핑하기 시작했고 금세 대본이 완성됐다. 그의 대본으로 촬영이 진행됐다. FD로 들어간 지 석 달만의 일이었다.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두 달 뒤 예능작가로 변신했다.

이 때 김병욱 피디(PD)와 작가 3명이 재밌는 예능프로그램을 하나 만들어 보자고 모였다. 장 감독에 따르면 당시 김 PD는 너무 힘이 없었다. 좋은 기획도 뺏기고 인력도 뺏겼다. 방송사에서 버린 ‘잉여 인력’이 모였다고 할 정도의 팀이었다. 그런데 그 때 힘들게 만든 <좋은 친구들>이 당시 방송 3사 전체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이후 전성기를 맞은 김병욱 PD는 <순풍산부인과> <똑바로 살아라> <지붕 뚫고 하이킥> 등을 통해 스타 PD로 성장했고, 장 감독 자신은 ‘젊고 잘생긴데다 실력까지 갖춘’ 촉망받는 작가가 됐다고 한다.

 ▲ 김병욱 PD가 만든 <좋은 친구들>과 <지붕뚫고 하이킥>. ⓒ MBC, SBS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은 매력적이고 달콤했다. 안락한 삶 속에서 영화도, 시나리오도 잊고 지냈다. 그러던 중 한 언론에 실린 그의 인터뷰를 통해 평소 시나리오를 쓰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영화기획자가 연락을 해왔다.

“아직도 영화 하고 싶나?”

그의 말에 순간 무언가 꿈틀거림을 느낀 장 감독은 그 길로 방송사를 그만두고 미도영화사로 출근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꾸준히 들어오던 수입은 절반으로 뚝 떨어졌고 그나마도 일정치 않았다. 한 달 수입이 ‘제로’일 때가 더 많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시나리오를 써내려갔다.

오래 지나지 않아 장 감독은 <박봉곤 가출사건>을 완성했고 이 작품으로 1996년 백상예술대상 각본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비록 상을 받진 못했지만 영화계에선 그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이후 1999년 <북경반점>, 2003년 <불어라 봄바람>, 2004년 <귀신이 산다> 등을 집필했고, 2002년 <라이터를 켜라>, 2008년 <전투의 매너>, 2010년 드라마 <싸인>을 연출하는 등 작가와 감독 영역을 넘나들며 맹활약하고 있다. <박봉곤 가출사건>의 오씨 손자, <뜨거운 것이 좋아>의 안 감독, <참을 수 없는>의 장 작가 등 배우로서도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었다.

 ▲ 장항준 감독이 만든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봉곤 가출사건>, <뜨거운 것이 좋아>, <참을수 없는>, <싸인>. ⓒ 씨네21, SBS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이뤄졌죠. 나는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항상 기회가 왔고, 기회가 내게 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기회가 내게 오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아는 건 ‘갈증’에 달려있습니다. 얼마나 굶주려 있는가. 항상 그것에 대해 생각해왔기 때문에 기회인지 아닌지 단번에 알 수 있었던 거죠.”

자신의 꿈이 순식간에 이뤄졌다고 웃으며 말했지만 그의 청춘 또한 누구 못지않게 치열하고 고달팠음을 청중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장 감독은 청춘들에게 놓치지 말아야 할 두 가지를 당부했다.

“책을 읽으세요. 지적 호기심은 읽으면 읽을수록 더 커지는 것입니다. 인문학, 사회과학, 심리학, 철학 등 분야를 가리지 말고 접하세요. 그리고 연애하세요. 많이 사랑해보는 것이 최곱니다.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해보기도 하고, 버림받아 보기도 하고, 또 차보기도 하고, 비겁하게 자기 사랑을 외면하기도 하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후회하고 부끄러워 잠 못 들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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