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카프카 '여행자 예찬'

카프카가 약혼녀 펠리체 바우어에게 편지했다.

“많은 이야기들과 연인들이 내 머릿속에서 행진을 하며 북소리를 내고 있소.”

 ▲ 카프카의 단편집 <여행자 예찬>

카프카는 일부러 무언가를 떠올리지 않아도 독특한 상상들로 머릿속이 가득했고, 이를 종이에 기록해 놓아야 안심이 되었다. 그가 이 가운데 하나를 붙잡고 힘들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변신> <성> <소송>과 같은 중․장편소설이 탄생했고, 그렇지 않으면 일기장과 메모장에 단상이나 우화로 남았다. <여행자 예찬>에 실린 44편은 이처럼 곳곳에 흩어져 있던 카프카의 짧은 이야기들을 편집자 위르겐 보른이 찾아 소개한 것이다. 

짧은 글이라 해서 무게가 덜하리라는 생각은 금물. ‘작가들의 작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르헨티나 작가 보르헤스는 카프카 탄생 백주년 기념 기고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그의 단편소설이 장편소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도 나는 짧은 단편들을 더 좋아합니다. 나 또한 카프카가 되려고 야심차면서도 쓸모없는 노력을 하면서 몇몇 작품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벨의 도서관>입니다.”

한 시대의 대가(大家)가 그보다 앞선 대가에게 보내는 최고의 찬사였다. 보르헤스 역시 단편이나 짧은 우화를 주로 발표했는데 카프카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카프카 우화에는 어떤 매력이 있을까? 사실 그의 우화는 한두 페이지 정도로 짧지만 숨겨진 의미는커녕 스토리도 명확하게 짚어내지 못할 정도로 난해한 것이 많다. <여행자 예찬>에 실린 <코멘트>의 전문을 보자.      

‘꽤 이른 아침이었다. 거리는 깨끗했고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역으로 갔다. 시계탑의 시계바늘과 내 시계를 비교해 보고 이미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늦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급히 서둘러야만 했다. 늦었다는 사실에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길에 대한 확신을 잃게 되었고, 게다가 아직 이 도시에 대해 썩 잘 알고 있지도 않았다. 다행히도 근처에 경찰관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그에게 달려가 급히 길을 물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서 길을 알고 싶은가?” “네.” 나는 말했다. “혼자서는 길을 찾을 수 없어서요.” “포기해. 포기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몸을 홱 돌려 나를 외면했다. 마치 웃으면서 혼자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처럼.’

주인공은 도시를 빠져나가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낯선 도시는 미로처럼 그를 가둬버렸다. 시간마저 늦은 상태. 그때 그를 구원해줄 유일한 사람, 경찰관을 만나지만 그의 대답은 ‘포기해!’. 개인의 안녕을 보장하고 불안을 잠재워주어야 할 공권력이 비웃음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지 않은가? 위기에 처한 주인공의 불안과 공포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허투루 넘길 수 있는 심오한 우화들이 가득하다. <황제의 전갈>에서 전령은 황제의 중요한 전갈을 ‘그대’에게 전달해야 하지만 수천 년이 지나도 궁전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미로 같은 방과 정원을 헤맬 뿐이다. 그러나 ‘그대’는 여전히 창가에 앉아 전갈이 오는 꿈을 꾼다. ‘출구’와 ‘구원’ 없는 현대인의 실존적 문제를 그린 우화다.

<도시의 문장>에서 바빌로니아의 탑을 건설하는 사람들은 수 세대가 지나도록 탑을 건설하기 위한 노동자 도시를 만드는 데만 힘을 쏟는다. 그러면서 어느 날 어떤 거대한 주먹이 도시를 강타해 파멸시킬 것이라는 예언을 기다린다. 역시 허무한 인간 실존을 그린 묵시론적 소설이다.

<포세이돈>에서는 자본주의 관료사회의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모든 바다와 하천과 호수들을 관리하기 위해 책상머리에 앉아 계산을 하느라 골머리를 앓는다. 그가 고대하는 건 세계가 멸망해 마지막 계산을 마치고 조용한 휴가를 얻는 것. 포세이돈을 평범한 직장인으로 전락시켰다.

문지기가 지키는 법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밖에서 일평생을 기다리는 남자의 이야기 <법 앞에서>는 법에서 소외된 현대인에 대한 단상이다. <이웃>에서는 ‘나’의 전화를 매일 엿듣는 사무실 동료에 대한 공포가, <독신남의 불행>에서는 “독신남으로 남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일 것”이라는 작가의 고독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 카프카의 <성>, <변신>

카프카의 다른 작품에 대한 모티브도 곳곳에 숨어 있다. 가령 농장의 문을 두드렸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하는 <농장의 문을 두드리고>는 서른 살 생일 아침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체포된 요제프 K의 이야기 <소송>을 떠올리게 한다. <혼혈> <황새 같은 새> <유대인 교회당의 동물> 같은 작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생명체에 대한 묘사들이 있는데 <변신>의 분위기가 풍긴다. 책 맨 끝에 실린 <왕의 말>에는 왕이 “여기 프란츠 카프카가 있는가? 이 자는 성으로 이사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대로 장편 <성>으로 이어질 듯하다. 

카프카 문학은 일찍이 많은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았고 작품을 해석하려는 노력도 다양했다. 수전 손택은 “카프카 작품은 벌떼 같은 해석자들로부터 집단 강간을 당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카프카를 사회적인 우화로 읽으면 현대 관료권력의 광기와 실패로, 정신분석학적인 우화로 읽으면 카프카의 강인한 아버지에 대한 절박한 공포로, 종교적인 우화로 읽으면 신에 대한 갈망 또는 신으로부터의 심판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잘 알려졌듯이, 사르트르나 카뮈 같은 철학자는 카프카를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칭송했다. 푸코, 벤야민, 아도르노, 데리다, 들뢰즈 등 많은 현대 사상가들이 카프카를 독해하고 카프카 소설과 우화를 인용하며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카프카’라는 하나의 텍스트가 20세기 지식사회에서 얼마나 광범위하고 중요하게 다뤄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프란츠 카프카

독일어 사전에는 ‘카프카적’(kafkaesque)이라는 낱말이 있다. ‘비인간화한 악몽 같은 세계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공포와 소외와 당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카프카는 낙서하듯 끼적인 자기 글들이 한 사회의 ‘형용사’가 될 정도로 부각되리라는 걸 예측이나 할 수 있었을까? 카프카는 자신이 죽으면 모든 작품을 불태우길 원했고 실제로 그렇게 유언했다. 그러나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편집자 막스 브로트가 그 말을 지키지 않았기에 카프카는 현대 문학사에 남을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자신이 일기장에 쓴 짧은 글이 백년이 넘도록 수많은 지식인들에 의해 회자되며 풍성한 사상으로 영글어간다고 생각해 보라. 얼굴도 인종도 알 수 없는 독자가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그 글을 아껴 읽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것이 ‘어처구니없는’ 문학의 힘이 아닐까? 이런 아찔한 상상을 하며 <여행자 예찬>을 읽으면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의 즐거움을 더욱 찬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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