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임 칼럼] 일본 재앙 계기 무모한 '원전 대국' 집착 버려야

▲ 제정임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교수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으로 꼽히는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는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지난 2008년에 쓴 책 '위기 그리고 그 이후'에서 세계 경제의 '희망적 가능성'과 '우울한 전망'을 함께 내놓았다. 희망적 가능성이란 이번 위기를 계기로 각국이 '고삐 풀린 자본권력'에 '민주적 통제'를 가함으로써 세계 경제가 안정적 번영의 궤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다. 반면 우울한 전망은 현실적으로 각국이 그걸 못 해낼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몇 가지 미봉책으로 이번 사태를 넘긴 뒤, 머지않아 더 큰 위기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2011년 현재 세계 경제는 아탈리의 우울한 전망대로 가고 있는 모습이다. 아탈리는 나아가 '탐욕'을 절제하지 못한 세계가 더 큰 파국, 즉 지구온난화로 인한 인류멸망 수준의 재해를 향해 '조종실 없는 비행기'처럼 날아갈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했다.

아탈리의 경고가 섬뜩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각국 지도자들이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무시했던 가능성들이 눈앞에 현실화하는 것을 우리가 목격한 탓이다. 지난 2005년, 2006년 무렵 누리엘 루비니, 로버트 실러 등 '비관적' 경제학자들이 "부동산 거품과 저금리, 파생상품의 범람이 엄청난 금융위기를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을 때 미국 정부 등은 무시했다. 그러나 곧 2007년의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위기가 닥쳤다. 우리에게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 있다. 김영삼 정부가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위해 금융개방을 밀어붙일 때,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재야단체들은 "우리 능력을 생각하지 않고 무리하다간 멕시코처럼 외환위기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전진했다. 이듬해 우리는 치욕적인 외환위기를 맞았다.

위기를 예고하고 개혁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이렇게 외면당하는 이유는 기존 체제에서 이득을 보는 이들의 힘이 세기 때문이다. 파생상품 등으로 떼돈을 버는 월가의 금융회사들, 이들로부터 돈을 받고 채권등급을 매겨주는 신용평가회사들, 월가의 정치 헌금을 받는 정치인 등이 모두 금융위기의 공범이었고, 이후 개혁의 최대 방해세력이 되고 있다. 각국의 지구온난화 대처가 더딘 것도 정유사, 자동차회사 등 대기업들의 로비가 작용한 탓이 크다.

지금 세계적 공포의 진원지가 되고 있는 일본 원자력발전소에도 이런 역사가 있다. 근본적으로 지진에 취약한 일본 땅에 50기가 넘는 원전이 건설되는 동안 환경전문가와 시민단체 등은 거세게 반대했다. 그러나 원전으로 이익을 보는 건설업체, 전력회사, 그들과 유착된 정부 관료와 정치인 등 '원전 마피아'는 이를 무시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원전 대재앙'이다.

일본의 재앙은 오는 2030년까지 발전량 중 원전비율을 현재의 30%에서 60%까지 높이고, 원전을 수출 주력으로 키우기로 한 우리나라에 충격적인 반면교사가 된다. 이 계획대로 원전을 더 짓는다면 조만간 한반도는 '원전 밀집도 세계 1위'가 된다. 이 땅에서도 지진, 테러, 전쟁, 오작동의 가능성을 100% 배제할 수 없는 게 현실인데 원전으로 먹고사는 전문가들과 정부는 "완벽하게 안전하다"는 말만 되뇐다. 전 세계에 채 500기가 되지 않는 원전에서 지난 40여 년간 체르노빌 등 3건의 초대형사고가 터졌다. 사고를 낸 나라들은 미국 러시아 일본 등 기술 초강대국들이다. 우리에겐 절대 사고가 안 날 것이며, 사고가 나도 절대 안전하다는 주장을 도대체 어떤 근거로 믿을 수 있을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의 마지막 공주 카산드라는 아폴론 신으로부터 예지능력을 얻지만 그의 사랑을 거절한 탓에 아무도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는 저주를 받는다. 트로이는 "적국의 목마를 받지 말라"는 그녀의 경고를 무시했다가 목마에 숨어든 그리스 군에게 패망하고 말았다. 일본의 재앙은 '원전대국'을 향해 제동장치 없이 달리는 한국을 향한 카산드라의 경고일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원전에 대한 무모한 집착을 버리고 독일처럼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는' 에너지, 즉 신재생에너지 개발과 에너지소비 절감에 승부를 걸라는 메시지일 수 있다. 아이들과 오래 살아야 할 이 땅인데, 귀를 좀 기울여야 하지 않겠는가.


*  이 칼럼은 국제신문 4월 12일자 시론으로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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