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EU FTA> 협정문 이어 <한미 FTA>도 파문 조짐
[두런두런경제] 홍기빈 제정임의 경제뉴스 따라잡기

번역 오류 207곳... 졸속 진행이 낳은 부작용

홍기빈(MBC 라디오 ‘손에 잡히는 경제’ 진행자): 외교통상부가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문의 번역 오류를 인정했습니다. 무려 207곳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인데요, 어떤 내용들인가요?

제정임(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이번에 외교부가 스스로 인정한 것과 민간에서 먼저 찾아낸 것을 함께 살펴보면 우선 언어와 관계없이 중요 사항을 왜곡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완구류와 왁스류의 원산지인정비율, 즉 재료와 부품을 해외에서 몇 퍼센트까지 조달하면 국내산으로 인정이 되는지 정한 비율이 영문본에는 각각 50%로 돼 있는데 한글 번역본에는 40%와 20%로 엉뚱하게 돼 있었다고 합니다.

홍: 도대체 어디서 그런 숫자가 나온 것일까요? 
 
제: 그러게 말입니다. 그리고 원어의 의미를 왜곡한 부분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이식(transplant)’을 ‘수혈’이라고 번역하거나 ‘초과’로 해야 할 것을 ‘이하’라고 완전히 거꾸로 해석해 놓은 부분도 있었답니다. 번역을 누락한 부분도 있고 오타도 많았는데, 예를 들어 ‘공작기계’를 ‘공자기계’로, ‘광택제’를 ‘고아택제’라고 했답니다. 단순한 오타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게 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홍: 누구보다 외국어에 능통한 외교전문가들이 모인 통상교섭본부에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제: 정말 놀랍고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경제전쟁터에서 국익을 지켜야 할 외교관들이 기초적인 번역조차 엉터리로 해서 국익을 위협하고 톡톡히 국제 망신을 산 것이니까요. <한EU FTA 협정문>은 <한미 FTA 협정문>과 함께 영문본과 한글본이 모두 국제법적 효력을 지닙니다. 따라서 기업과 개인의 경제적 이해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단어 하나, 토씨 하나도 엄격하게 번역되고 규정돼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생긴 것은 근본적으로 협상 자체가 국회나 민간전문가그룹, 시민사회의 감시 없이 밀실에서 이루어진 탓이 있습니다. 해당 분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소수의 외교관들에 의해 협상이 이뤄지고, 협정문 번역도 짧은 기간에 졸속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민주적 참여 혹은 감시의 부재’가 엄청난 부작용 낳았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홍: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것도 국회나 행정부가 아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라는 시민단체죠? 지난 2월에 번역문 오류를 지적했는데, 정부는 당시 별 문제 아니라고 했죠.

제: 그렇습니다. 민변에서 국제금융통상위원회 준비위원장을 맡고 있는 송기호 변호사가 지난 2월 21일 언론기고를 통해 번역상의 오류를 처음 지적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송 변호사는 지난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논란 때도 정부의 번역 오류를 정확히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2월에 번역 오류가 지적됐을 때 ‘별 것 아니다’며 일단 버텼습니다. 그리고 일부 조항만 수정해 비준동의안을 새로 만든 뒤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민변이 160개 항의 번역 오류를 제시하는 등 계속 문제가 되자 또 다시 비준동의안 제출을 취소하고 전체적 재점검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번역 실수를 한 것도 잘못이지만, 이를 순순히 인정하지 않고 버티다 비준동의안을 세 번이나 만들게 된 외교부의 대응은 두고두고 비난거리가 될 것입니다.  

불균형한 협정, 기업과 국민 이익 걸린 만큼 제대로 고치고 따져야

홍: 민변은 번역 오류 외에도 <한EU FTA>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 맞습니다. <한EU FTA>는 유럽 27개 나라와의 무역관계 변화로 우리 농수산업, 제조업, 서비스업 전반에 광범위한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 협상 결과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니 알려진 것보다 우리에게 불리한 내용이 많더라는 것입니다. 우선 이 협정이 발효될 경우 국내법이 무력화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업형수퍼마켓(SSM)으로부터 중소자영업자를 보호하기 위한 ‘유통산업발전법’과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촉진에 관한 법’을 이 협정이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유럽유통회사들이 자국 정부를 통해 우리 쪽을 제소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프랑스와 벨기에 등 7개 나라는 우리나라 백화점의 현지 진출을 제약할 수 있는 권리를 명시적으로 확보했다고 합니다. 불균형한 협정이라는 얘기죠. 또 광우병 발생지인 유럽산 쇠고기의 수입을 우리의 자율적 기준에 따라 억제할 권리가 제약되고, 학교 급식에 친환경 국산농산물 쓰는 것도 유럽 쪽에서 시비를 걸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유럽에 어묵을 많이 파는데, 외국산 생선을 원료로 쓰면 관세를 많이 물게 돼 어묵 수출이 어려워질 우려도 있다고 하는군요.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영역에서 문제가 많다고 합니다.  
  
홍: 듣고 보니 머리가 복잡해지는데요, 그러면 앞으로 <한EU FTA>의 처리는 어떻게 되나요?

제: 정부가 세 번째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는데, 4월 중 이를 처리하고 6월에 관련법 개정작업을 거쳐 7월에는 잠정 발효될 수 있도록 하자고 국회에 독촉을 하고 있습니다. 빨리 비준해서 이를 지렛대로 미국 측에 <한미 FTA> 비준을 압박하자는 계산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 번역 파동을 통해 정부가 낸 협정문의 문제점, 그리고 통상관료가 잠정발효시기를 자의적으로 유럽 측과 구두 약속하고 국회를 몰아붙인 태도의 문제 등을 국회가 파악했기 때문에 동의안 처리를 서둘러주진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기업과 국민의 이익이 엄청나게 걸린 문제이므로 국회가 이번 기회에 제대로 따지고 고쳐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홍: <한EU FTA>를 지렛대로 <한미 FTA>를 압박한다는 얘길 하셨는데, <한미 FTA>의 협정문에는 문제가 없을까요?

제: <한미 FTA> 협정문의 한글본 번역에도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정책위원장 맡고 있는 남희섭 변리사가 지적재산권 부분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는데, 그 분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일반 회사로 치면 과장 결재도 받지 못할 수준의 번역”이라고 합니다. 영어본과 의미가 달라 도무지 뜻을 알 수 없거나, 오역을 해서 우리 국민들이 잘못 이해하고 손해를 볼 수 있는 내용들이 부지기수라는 지적입니다. 통상교섭본부도 지금 <한미FTA 협정문> 번역본에 대한 재검토작업을 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자칫하면 <한EU FTA> 협정문 파문이 재연될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이 기사는 MBC 라디오 <손에 잡히는 경제>와 제휴로 작성했습니다. 방송 내용은 4월 6일 <손에 잡히는 경제> 다시 듣기를 통해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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