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나]유치원 시절 상처 되새기게 하는 한국 교회

▲ 안수찬(한겨레21 사회팀장)
나는 유치원을 다니지 못했다. 젊은 나이에 결혼하여 아득바득 살림을 일구던 부모님은 맏아들을 유치원에 보낼 여력까진 없었던 것 같다. 또래들이 유치원 다닐 때, 나는 집에서 AFKN(미군방송)을 봤다. 대낮에도 방송하는 채널은 그것밖에 없었다. 5~7살 무렵, 나는 ‘세서미 스트리트’와 ‘제너럴 호스피탈’을 봤다. 옥상에 올라 하늘 한번 쳐다보고, 방으로 돌아와 세서미 스트리트의 쿠키 몬스터를 보고, 골목에 나가 집 앞의 파밭 한번 쳐다보고, 방으로 돌아와 제너럴 호스피탈의 의사와 간호사가 뽀뽀하는 것을 봤다. 요즘으로 치면 영어 조기 교육을 받은 셈이므로, 회한은 없다.

미군방송만 보던 나에게도 소꿉친구가 있었다. 동네에서 가장 예쁘고 말쑥했다. 그 아이가 사 모은 종이 인형을 함께 가위로 오려 공주님과 왕자님에게 옷을 입혔다. 아이에겐 플라스틱 인형이 사는 플라스틱 궁전도 있었는데, 몹시 부러웠다. 우리는 뒷산에 올라 진달래를 따먹었다. 풀잎 뒤에 매달린 달팽이를 잡아 손가락 끝에 올려놓고 배시시 웃으며 놀았다. 골목의 사내 녀석들이 나를 놀렸지만, 아무 상관없었다. 그 아이가 하자는 일이면 무엇이든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교회에 가자”고 아이가 말했다. 교회에 가면 돈 내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유치원이 있다고 했다.

열심히 기도하면 뽀빠이 받을 수 있나요

지방 도시의 교회에는 널찍한 강당이 있었다. 코흘리개들은 마룻바닥에 앉아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점심 무렵이 되면, ‘뽀빠이’를 나눠 줬다. 라면을 구워 만든 과자였다. 과자 봉지 안에는 ‘별사탕’도 있었다. 뽀빠이가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별사탕이 있기 때문이다. 별사탕을 먼저 먹을지, 나중에 먹을지 항상 고민이 심했다.

뽀빠이 때문에 그 아이와 멀어지게 될 거라고 그때는 상상도 못했다. 100여명의 코흘리개들이 오직 뽀빠이만 쳐다보고 교회에 나오는데, 교회 어른들이 나눠주는 뽀빠이는 항상 부족했다. 뽀빠이를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 있었다. 날이 갈수록 쟁탈전이 치열해졌다. 아이들은 줄을 서지 않고, 우르르 몰려들어 어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드센 아이들은 꼭 뽀빠이(그리고 별사탕)를 차지했고, 숫기 없는 아이들은 뒤로 밀렸다. 어떤 아이는 울었다. 어른들이 말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내일은 꼭 (뽀빠이를) 받을 거야.” 그건 옳지 않았다. 힘이 약한 아이들도 과자를 받을 수 있도록 줄을 세우고 차례를 정하면 부족하나마 공평하게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세서미 스트리트의 미국 어른들은 과자 욕심이 많은 쿠키 몬스터를 그렇게 타일렀고, 덕분에 세서미 스트리트의 아이들 모두 깨가 쏟아지는 웃음으로 골고루 과자를 나눠 먹었던 것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교회 어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성들여 기도하고 또다시 뽀빠이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나는 보았다. 나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뽀빠이를 매일 받아먹을 자신이 없었으므로 나는 교회를 드문드문 나가기 시작했다. 동네에서 가장 예쁘고 말쑥한 아이는 그런 나를 타박했고, ‘뽀빠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 아이에게 나는 서운했다. 우리는 국민학교 입학 직전에 헤어졌다. 그 아이가 이사를 갔다. 이사 가던 날, 나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콧물 흘리는 지저분한 사내놈들과 구슬치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진달래 대신 솔방울을 모아 전쟁놀이를 했다. 미군방송에선 한국전쟁을 다룬 드라마 ‘매시’를 새로 시작하고 있었다.

세월에 묻힌 뽀빠이의 기억이 자꾸 도드라지는 때가 있다. 축구선수 박주영이 골을 넣을 때다. 프랑스 프로축구 AS 모나코의 스트라이커이자 한국 축구대표팀의 새로운 ‘캡틴’인 그는 골만 넣으면 바로 주저앉아 기도를 시작한다. 스트라이커를 끌어안으려 그라운드를 가로질러온 동료들은 무릎부터 꿇는 박주영 앞에서 머쓱한 표정이 된다. 확실히 그의 기도는 동료와 관중의 환호를 반감시킨다. 골의 기쁨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아주 가끔 박주영은 골을 넣어 너무 기쁜 나머지 두 손을 펼쳐 만세를 부르다 ‘아차’ 하는 표정으로 다시 기도하기도 한다. 본능적 희열을 억누르는 기도의 의무를 누가 심어준 것인지, 나는 궁금하다. 혹시 박주영도 기도해야 뽀빠이를 받는 교회를 다녔던 게 아닐까, 나는 혼자 상상한다.

해외 취재 때, 한인 교회에 나간 적이 있다. 취재에 도움을 준 교민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 ‘뽀빠이 문제’를 가슴에 품고 살아온 지 30여 년 만에 교회에 나간 셈인데, 또 한 번 놀랐다. 목사의 설교는 ‘요즘 한국 교회에서 이단 종파가 잠입해 장로와 집사 자리를 차지한 뒤, 목사를 몰아내는 사태’에 대한 개탄과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에 대한 험담과 ‘그런 일이 우리 교회에선 없을 것으로 믿는다’는 당부 섞인 경고가 주를 이뤘다. 나는 예배가 편치 않았다. 사랑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증오의 언사만 귀에 담고 나왔다. 뽀빠이의 기억은 정화되지 못했다.

헌신과 사랑 아닌 ‘목적’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

나는 믿음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기자라는 직업 자체가 믿기보다 의심하는 일을 주로 한다. 다만 믿음의 개별성을 믿는다. 사상·양심의 자유의 맥락에서 종교의 자유가 있고, 그것은 각 인간에게 주어진 불가침의 영역이다. 나의 사상·양심·종교를 잣대로 타인의 사상·양심·종교를 타박하면 안 된다. 믿음의 개별성을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다양하고도 고유한 형태를 존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슬람과 명절 차례를 거부하는 개신교와 식사 때마다 기도하는 가톨릭의 금기와 습속을 나는 진심으로 존중한다.
 
다만 (모든 믿음을 존중함에도) 모든 믿음을 좋아하진 않는다. 예컨대 축구광으로서 박주영의 기도는 ‘싫다’. 가톨릭 신자인 남미 축구 선수들은 다른 신앙을 가진 동료 선수들과 부둥켜 환호하며 기쁨을 나눈 뒤에 하늘을 우러러 이마와 가슴에 성호를 긋는다. 그들은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는 방법을 안다.

예컨대 시민으로서 교회의 붉은 십자가 전광판은 ‘싫다’. 밤거리를 헤매는 노숙자에게 화장실을 개방하겠다는 뜻이 아니라면, 부족한 전기를 쏟아 부어 홍등가처럼 번쩍이는 네온사인을 주택가 곳곳에 밤새 밝혀야 할 이유가 없다. 밤마다 문을 걸어 잠그는 교회에 왜 유혹의 네온사인이 필요하겠는가. 예컨대 유권자로서 대통령의 기도는 ‘싫다’. 대통령이라면 공개석상에서 반복적이고도 노골적으로 특정 종교의 기도를 행하지 말아야 한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정교 분리 원칙이 엄연한 헌정국가의 수반은 헌법의 경계를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을 공식적으로 일삼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여러 종류의 중층적 시선을 느끼며 살아가는데, 유독 대통령은 오직 목사의 시선만 의식하며 사는 것 같아 ‘싫다’.
 
성스러운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에게 종교적 금기가 있다면 개신교도와 가까이 사귀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 믿음을 존중하지만 그 믿음이 ‘싫다’. 나는 그들이 조용히 기도했으면 좋겠다. 낮은 곳에 임하여 묵묵히 사랑을 실천하는 목사·장로·집사·신도가 있는 것을 안다. 비종교인인 내가 종교인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조건 없는 헌신과 사랑을 실천할 때다. 그러나 헌신과 사랑이 아닌 것을 향하여 기도할 때, 나는 그 종교에 정나미가 떨어진다.

믿음을 가진 자들이 믿음을 바탕으로 사람의 힘을 입증할 때, 그 믿음이 빛난다고 나는 믿는다. 코흘리개들에게 뽀빠이를 먹을 수 있다는 당근과 먹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를 던져놓고 기도를 익히게 하려했던 ‘사람의 무능과 무감’이 나는 싫다. 박애와 봉사의 말씀 대신에 다른 종파에 대한 증오와 공격의 언사를 늘어놓는 ‘목사의 무능과 무감’이 나는 싫다. 여론을 통한 성찰과 회개는 내팽겨 치고 하나님의 용서만 구하는 ‘대통령의 무능과 무감’이 나는 싫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특별히 사랑할리 없다고 나는 믿고 싶다.
 
일본 지진에 대해 “일본 국민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무신론·물질주의로 나간 것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조용기 목사가 말했다. “일본은 우상과 귀신이 많은 나라”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과 천황을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이 ‘요것 봐라’하는 마음으로 일본을 치고 흔들었다”고 김성광 목사가 말했다. 종교는 어느 면에서 ‘인격’으로 현현한다. 이런 목사들이 가장 힘 있고 돈 많은 한국 개신교회를 대표한다면, 나는 그들이 믿는 신이 ‘싫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참 졸렬한 하나님 아닌가.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