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수학여행’ 떠난 고교생 30명의 4박5일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은 수학여행을 간다. 요즘은 제주도, 중국, 일본까지 떠난다. 아이들은 보고 듣고 배우며 자란다. 그러나 돈이 없어 여행을 포기하는 아이들도 있다. 조기유학 바람으로 친구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외국을 들락거리는 동안 비행기를 한 번도 못타본 아이들도 적지 않다. 이런 고교생들을 위해 (주)여행박사가 지난달 19일부터 4박5일 일정의 일본 규슈 무료여행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교실 밖에서 만나는 더 커다란 세상'이라는 슬로건을 내 건 ‘청소년 희망여행’이다. 각 학교에서 추천을 받아 고교생 30명을 선발했다.

"비행기 처음 타 봐요. 진짜 떨려요!"
 

▲ 하우스텐보스 앞의 청소년희망여행 참가자들. ⓒ 여행박사

민지(17·가명)는 처음 만든 여권을 손에 들고 상기된 표정으로 인천공항의 출국심사대를 통과했다.

“주소도 한자로 써야 돼요? 한자 잘 모르는데.......아, 공부 좀 하고 올 걸!”

비행기 안에서 일본 입국신고서를 작성하다가 아이들은 느닷없이 한자 공부 열심히 안 한 걸 후회하기도 했다.
 
일본 사가공항에 도착하자 일행은 주차된 자동차, 이동버스, 일본인 운전기사까지 닥치는 대로 카메라에 담으며 흥분했다.

"자동차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요. 일본 자동차는 더 다양한 것 같아요."
"일본의 천연비누 같은 거 사가고 싶어요. 이런 거 만드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저는 친구들과 다 한 번씩 대화를 나누고 싶어요. 해치지 않으니까 말 걸어주세요. 흐흐."

구마모토성과 아소산, 하우스텐보스 등 이름난 관광지를 돌아보는 4박 5일 동안 아이들은 웃고 놀라고 뛰고 외치며 한껏 느끼고 배우는 모습이었다. 

“학원 보내달라고 엄마에게 투정한 거 후회돼요”

그 중 경찬(18·가명)이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먼저 기자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한테 질문할 거 있어요?”

왜 히죽거리느냐고 묻자 “웃는 얼굴로 사람들과 한 마디라도 더 해야 사회에서도 존재감이 인식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경찬이는 고3이라 입시공부에 매진해야 하지만 선생님 추천으로 여행을 오게 된 것이 무척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경찬이는 잘 웃지 않는데다 말이 없는, 소극적인 학생이었다.

"친구들도 저더러 '성인군자'라고 했으니까요."

그때까지 경찬이는 기초생활수급자인 게 부끄러웠고 술 마시고 사고치는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고 과외 하나 받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싫었다.
 

▲ 벳부 타카사키야마 공원에서 원숭이를 관람하는 참가자들. ⓒ 송지혜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자신의 가족이 기초생활수급대상인 것을 처음 알게 된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학교에서 급식 안내문을 받아왔다. 엄마는 회신 봉투를 선생님께 갖다드리라고 했다. 열어보지 말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하지만 경찬이는 봉투를 열었다. 무료급식대상 가운데 기초생활수급자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경찬이는 봉투를 학교에 가져가지 않았다.

"그때는 왠지 창피했어요. 주눅이 들고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1년이 지난 뒤, 경찬이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급식비를 면제받았다. 경찬이는 지금도 부모님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고등학생이 된 뒤 대충 짐작은 하지만, 부모님이 곤란해 하실까봐 자세히 묻지 않았다. 다만 중학교 1학년 되던 해, 방 세 개짜리 아파트에서 방 두 개짜리 낡은 빌라로 이사했을 때부터 집안 사정이 아주 나빠졌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때부터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어야 했다. 아침에 학교 가기 전 잠깐 부모님 얼굴을 봤고, 밤엔 일터에 간 엄마가 챙겨 놓은 과자를 먹다 잠이 들었다.

경찬이는 가난을 투정하다 엄마를 마음 아프게 한 일이 아직도 후회된다고 한다.

"학원에 가고 싶었는데, 갈 수가 없대요. 그래서 '엄마, 나는 왜 아무것도 못 해?'하고 투정했어요. 엄마가 '어쩔 수 없어, 미안해'라고 했어요. 아직까지 마음이 아프고 후회돼요."

학원을 가거나 과외를 받진 못하지만 경찬이는 서울에 있는 대학, 이른바 ‘인(in) 서울'에 진학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고 한다. 친척 누나들과 형들 중에는 아직 ’인 서울‘이 나오지 않았다. 대학에 가면 행정학을 전공하고 싶다.

"행정공무원이 되면 아들·딸이 학교도 무료로 다니고 복지 혜택이 좋잖아요. 아이들은 저처럼 살면 안 되니까요."

경찬이 가족은 작년 이맘 때 기초생활수급대상에서 벗어났다. 경찬이의 성격이 밝아진 것도 그 무렵부터다.

"일부러 성격을 바꾸려고 노력했어요. 기초수급대상에서 벗어나니까 자연스럽게 밝아진 것도 있는 것 같고요. 친구들에게 먼저 말도 걸고 장난도 많이 쳐요."

상을 당하고도 내색 없이 격려해 준 선생님

민지는 “이번 여행을 통해 스스로 ‘인복’이 많은 사람인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민지를 추천해 준 선생님은 민지가 기대했다가 실망할까봐 미리 얘기를 하지 않았다. 발표 날, 선생님께서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셨다. 민지는 꿈만 같았다.

“나도 해외여행을 가보는구나!”

다음날,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간 교무실에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선발결과가 발표되기 직전, 선생님의 부군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장례식장에서도 선생님은 '나는 너무 울어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며 또 웃어주셨어요. '너무 고맙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는데 펑펑 눈물이 나데요. 선생님께서 저를 꼭 안아주시면서 '사진 많이 찍어와' 하셨어요." 
 
민지의 부모님은 민지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이혼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아빠 때문에 엄마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을 봤기에 “엄마 잘 했어”하고 위로했다.
 
여행을 오기 전까지 민지는 일본을 ‘침략’ ‘독도’ ‘은둔형 외톨이’ 등의 부정적 이미지와 함께 떠올렸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직접 보니까 달라요. 일본인들 모두 친절하고, 우리와 비슷한 줄 알았는데 다른 부분도 매우 많고요. 일본에 대해 몰랐던 것들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아요."

생각보다 볼 것, 배울 것 많은 일본  

아이들이 처음 가본 곳은 구마모토현에 위치한 구마모토 성이다. ‘은행나무 성’으로도 유명한 구마모토 성은 오사카 성, 나고야 성과 함께 일본 3대 명성 중 하나로 꼽힌다. 적의 침략에 대비해 쥐조차 기어오르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이 곳에 은행나무가 많은 것은 전쟁으로 식량이 모자랄 때를 대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시내 중심에 위치한 구마모토 성을 보고 나오니, 도로 한 가운데 자동차와 함께 달리는 전차가 보였다. "전차가 그리 낡아 보이지 않는다"는 수지(17·가명)의 말에 가이드 최성훈씨는 "일본은 절약하는 나라라 바닥을 땜질하면서 단단하게 재정비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학생들이 2박 했던 아소팜 빌리지. ⓒ 일본관광청

일행은 아소산 중턱에 위치한 아소팜 빌리지에서 이틀 밤을 묵었다. ‘스머프’ 만화 속의 집들을 닮은 마을을 학생들은 마냥 신기해했다. 아소팜 빌리지 안에 있는 온천에서 노천탕도 즐기고 포대를 타고 언덕을 미끄럼질하는 놀이도 했다. 선생님께 드릴 선물을 사는 아이들도 있었다. 

3일째 되는 날은 일본의 대표적인 활화산인 아소산 분화구를 거쳐 벳푸 타카사키야마 자연동물원 구경을 갔다. 2천여 마리의 원숭이가 야생 그대로 서식하는 곳. 엄마 원숭이는 새끼의 이를 잡아주고, 어떤 먹이든 대장 원숭이가 우선 확보하는 모습이 인간 사회와 비슷하게 보였다. 아이들은 겁 없이 원숭이들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고 원숭이 바위를 올려다보며 '대학 잘 가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기도 했다.
 
벳푸 지옥온천과 우레시노 온천마을을 돌아본 뒤 일행은 일본 전통 료칸(旅館)에서 저녁상을 받았다. 여학생들은 화려한 색의 기모노를, 남학생들은 정갈한 유카타를 입고 일본전통 정식요리인 '가이세키'를 맛보았다.

"흐흐, 숨을 못 쉬겠어."
"속옷이 보일 것 같아."

▲ 유카타를 입은 참가자들. ⓒ 여행박사

아이들은 처음 입어보는 옷 때문에 불편해 하면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정갈하고 아름답고 맛있는 밥상에 감명 받는 모습이었다.

다음날은 우레시노 지역에서 유명한 녹차 제조 공정과 녹차 제품들을 둘러보았다. 녹차 하나로 비누, 크림, 팩 제품 등 다양하게 활용하는 아이디어를 배울 만 했다.

‘숲 속의 집’에서 미래를 설계하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전형적인 마을을 재현한 ‘하우스텐보스’는 나가사키시의 대표적인 테마파크다. 하우스텐보스는 네덜란드 말로 '숲 속의 집'이라는 뜻인데, 들쭉날쭉한 물길은 암스테르담의 운하를 본 뜬 것이고, 대표적인 건축물인 ‘팰리스 하우스텐보스’는 네덜란드 여왕이 거처하는 궁전외관을 모방했다고 한다.

미현(18·가명)이는 "볼거리가 너무 많아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하우스텐보스도 좋지만 좋은 친구들과 함께여서 더 신난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이번 여행을 통해 저마다 꿈을 키웠다. 일본어 능력시험인 JLPT 3급 자격증을 갖고 있는 경찬이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며 일어를 배웠는데, 직접 일본인들과 말을 해보니 감이 잡힌다”며 더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미현이는 "방학 때 국내 여행을 하며 이번에 사귄 전국 각지의 친구들을 찾아다닐 것"이라고 말했다.

여행의 마지막 날인 23일, 사가공항은 아쉬움을 달래며 장난치는 학생들로 떠들썩했다.'엔화 동전은 한화로 환전되지 않는다'는 말에 주머니 속에 남은 잔돈을 털어 과자를 사는 아이들도 있었다.

영하(18·가명)는 “이제부턴 고3 수험생활이 시작되는데, 솔직히 돌아가기 싫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아이들은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사진을 찍은 뒤, 아쉽게 뒤돌아보며 비행기에 올랐다. 

한편 이번 여행은 1인당 99만 원짜리 패키지 상품이며 ㈜여행박사의 전 직원이 매달 월급의 1%를 떼어 적립한 기금으로 충당했다. 이 회사는 오는 4월 중국으로 떠나는 희망여행도 계획하고 있다.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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