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우리나라의 선진국 숭배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와 선진국은 생활수준 격차가 엄청났기에 선진국은 무조건적 동경의 대상이었다. 40대 이상 사람들이 아직도 고급스러운 곳에 가면 대개 “야, 여기 꼭 외국 같다”고 말하는 이유도 ‘외국=선진국=좋은 곳’이라는 이들 세대의 고정관념을 반영하는 것이다. 선진국 콤플렉스는 지금도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가 우리의 ‘잘못된 시스템’ 때문에 일어났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선진국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절대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경제 발전 초창기의 현 선진국들과 현 개발도상국들을 유사한 발전 단계에서 비교하면 당시 선진국들은 매우 낮은 수준의 제도적 기반만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적재산권 제도도 많은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1836년 미국에서는 발명품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고, 심지어 이미 사용 중인 기계에 특허권을 주기도 했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 대부분 국가에서는 수입된 발명품인데도 자국민에게 특허권을 부여했다. 경제 발전 초창기 선진국의 지적재산권 제도는 현재 세계무역기구의 무역 관련 지적 재산권(TRIPS) 협약에 한참 못 비쳤음을 뜻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지금 선진국이 공정한 무역을 이유로 개발도상국에 무리한 제도적 요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존 롤스도 <정의론>에서 이런 현실을 비판한다. 그는 사회의 최약자, 곧 최소수혜자에게 이익이 돌아갈 경우에만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인정한다는 차등의 원칙을 제시한다. 공정한 무역은 법철학적으로 말하면 정의의 원리가 관철되는 무역이다. 후발주자인 개발도상국은 선진국에 견주어 상대적 약자이기에 그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인정하는 것, 즉 제도적용을 완화하는 게 롤스의 공정 무역이다.

지난 11월 주요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가 무역 증진 등을 위해 도하개발어젠더(DDA)의 조속한 타결을 촉구했다. 최근 경기 회복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지만 고용 없는 회복 등으로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민간 소비는 감소하고 있다. 이에 각국 정상들은 무역 활성화를 통해 효과적인 경기회복을 꿈꾸고 추가적인 무역보호조처를 취하지 않는다는 정신, 곧 ‘스탠드 스틸’에 모두 동의한 상태다. 2013년 말까지 새로운 투자와 무역거래 장벽을 설치하는 것을 일절 금지한다.

▲ 정혜아 기자
그러나 각국 정상들은 개발도상국에 이익을 제공하는 것을 막는 새로운 투자와 무역거래 장벽 금지가 공정한 무역질서에 맞는가를 따져보지 않았다. 무엇이 진정 공정한 무역이고 정의로운 무역인지, 그 가치를 위해 실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정상회의 경제적 파급효과가 24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정부는 국격이 높아졌다고 엄청난 돈을 들여 홍보했다. 그러나 이익 챙기고 이벤트 열고 홍보 열심히 한다 해서 국격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우리나라 공적개발원조(ODA) 규모는 2009년 8억달러에 불과했다. 10대 교역국임을 자랑하지만, 국민총소득에서 차지하는 원조금액 비율은 0.1%로 개발원조위원회(DAC) 24개 회원국 중 꼴찌다.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