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스쿨 문사철특강] 한홍구 교수
언론통제와 자승자박의 언론사

연탄가스에 중독된 언론

"연탄가스에 중독된 신문’이라는 말은 유신정권 시절 언론상황이 어땠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관우 <동아일보> 주필은 한국의 신문들이 ‘잠든 사이에 스며든 독가스에 취해 비명 한번 못 질러보고 어리둥절하고 있는 상태’라고 했죠. ‘독가스’는 바로 자유와 항쟁정신을 잊어버리고 안일하게 나날이 지나가는 것을 합리화하면서 사이비 자율에 취해 있던 사이비 협조정신을 말하는 거예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언론을 비판한 겁니다."

▲ 강의중인 한홍구 교수. ©송지혜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성공회대)는 ‘군사독재 시대의 언론통제’를 주제로 강연을 시작하면서 “언론이 제 몫을 하면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된다”고 운을 뗐다. 민주주의와 독재의 갈림길에 언론이 서있는데, 언론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며 우려했다. 그는 언론학자는 아니지만 현대사를 전공하는 사학자로서 그동안 ‘언론’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에 관심이 많았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경영주가 한국의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장본인이 된 첫 사례로 <신동아>의 차관도입 내막 폭로 사건을 들었다. 1968년 11월 하순 월간지 <신동아>가 정부의 차관도입 내막을 파헤쳤는데, 이 기사와 관련해 <동아일보> 천관우 주필 등 간부 3명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뒤 회사에서 퇴직 당했다. 그 시절 언론탄압은 늘 있어왔던 일이지만 문제는 당사자인 <동아일보>를 포함한 신문들의 태도였다. 8개 중앙일간지들은 약속이나 한 듯 1주일이 지나서야 1단 단신으로 취급하거나 아예 묵살했다.

이에 대해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최석채는 <기자협회보>에 투고한 글에서 “신문이 편집인과 기자의 손에서 떠나 경영주의 손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며 언론이 스스로 단결하여 싸우지 못하고 “성문을 열어 외적을 불러들인다면 누구에게 구원을 청할 것인가”라고 탄식했다. 언론이란 성 안에 경영주와 편집인, 기자가 공존하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성 안에서 반란이 일어나 성주를 향해 주민들이 선전포고를 하는 사태가 올 수 있다는 우려였다. 

사주가 독자보다 광고주 눈치를 보는 시대

몇몇 언론인의 ‘절개’에도 불구하고 “한국언론은 1970년대 유신시대에 이미 완전히 장악되었다”고 한 교수는 보았다. 박정희 정권은 1~4호 긴급조치를 발동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장기징역형을 내리고 언론을 철저히 통제했다. 제목의 단어 하나하나까지 정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교정을 받아 싣게 했다. 1974년 <동아일보>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했지만, 정부는 <동아일보>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넣어 광고를 싣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동아일보>를 옥죄었다. 바로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이다. 시민들의 폭발적인 격려 광고가 쏟아진 것이 이때였다.당시의 <동아일보>는 국민의 선두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1등 신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동네가게 광고부터 동아일보 지지 광고까지 시민들이 채운 광고면.

“시민들이 광고를 채우기 위해 <동아일보>로 몰려들었어요. 기업광고는 하나도 없는데 동네 약국, 안경점 등 1단짜리 광고가 폭발적으로 들어오는 거죠. 남루한 지게꾼이 ‘오늘 하루 일당이요’하면서 광고비를 내놓고 가는데, 기자들이 얼마나 뭉클했겠습니까? 격려광고 문구도 감동적인 게 많았습니다. ” 
 
“배운 대로 실행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이렇게 사죄하나이다.”
“4.19의 꽃은 어디에 피었는고?”
“민의가 동아의 고난을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굽히지 말고 견디어라 민족의 얼 동아여, 기필코 광명 있으리!”
 
그러나 <동아일보> 사주는 견디지 못해 굽히고 말았다. 한 교수는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이후 언론이 사기업과 동일시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가 발전하면서 신문사 주수입원도 구독료에서 광고료로 옮겨갔다. 사주가 독자보다 광고주의 눈치를 보게 됐다. 정부 역시 언론을 죄고 싶을 때 광고를 이용했다. 사장은 광고를, 기자는 사장을 무서워하는 구조가 돼버렸다. 
 
“옛날에는 사주와 편집인, 기자 간에 일체감이 있었어요. 사주가 기자들을 부당하게 대우하지 않았고 권력에 같이 맞서 싸워주니까요. 결국, <동아일보> 사주는 독자를 택하고 기자를 끌어안는 대신 기자 160여명을 자릅니다.” 

세계 언론사에 없는 두 가지 사건
 
한 교수는 “한국이 세계 언론사에 없는 두 가지 일을 해냈다”고 말했다. 정권이 광고를 끊는 야비함도 세계 언론사에서 찾아볼 수 없고 시민들의 성금으로 언론사를 차린 적도 없다는 얘기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뭉쳐 시민들의 성금으로 차린 언론사가 지금의 <한겨레>이다.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고 ‘언론 통폐합’을 실시하면서 지방 언론 사주들 상당수는 아예 신문사를 뺏겼다. <창작과 비평> <월간 중앙> <뿌리깊은 나무> <씨알의 소리> 같은 비판적 언론들도 모두 폐간시켰다. 1천 명 가까운 기자가 해직됐다.
 
언론사 사주들은 권력과 유착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당한 측면도 있었다. 1962년 손꼽히던 재력가인 김지태씨를 사소한 혐의로 구속해놓고 부일장학회 명목의 개인 소유 토지 10만평과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의 주식 100%를 강제 ‘헌납’받은 뒤 풀어준 사건이 있었다. 또 박정희는 천주교 소유 <경향신문>을 인수하려다 실패하자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경향신문>을 빼앗아버렸다. <경향신문>의 적극적인 비판 논조가 박정희에게는 눈엣가시였다.

 ▲ 정부의 검열 때문에 기사가 삭제된 신문.

권력은 마음에 안 드는 언론인들을 몰아내는 한편으로 그들을 국회의원, 장관, 고위공무원 등으로 발탁하는 등 회유정책도 병행했다. 유신정권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언론인들의 적극적인 충성을 끌어냈다. 내부 검열을 통해 알아서 기는 풍토도 일반화했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사형 확정 판결 18시간 만에 집행된 것을 두고 유가족들이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제발 우표딱지만하게라도 우리 소식을 실어달라”고 절규했던 것이 그 시절의 언론현실이었다. 전두환은 언론을 입맛대로 정리한 다음 기자들 월급을 대폭 인상하게 했다. 
 
“살아남은 기자들은 승진 기회가 생기고 월급이 팍 뛰었죠. 기자 월급이 일반 직장인 월급 몇 배로 뛰니까 논조도 고분고분해지고, 연탄이나 대중교통 관련 기사도 없어져요.”

언론인의 자각과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송지혜
문화공보부가 언론사에 일괄적으로 하달한 ‘보도지침’이 월간 <말>지를 통해 폭로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정부는 기사 내용, 형식뿐 아니라 제목까지 구체적인 지시사항을 매일 내려 보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두고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기 위해 부끄러운 줄 모르고 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식으로 보도자료를 내 논조를 유도하거나 전두환 대통령의 활동기사를 모든 뉴스 첫머리에 내보내게 한 것도 문화공보부의 ‘과업’이었다.

“1983년, 가택 연금 중이던 김영삼은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합니다. 20여 일 단식을 했는데, 정권이 언론을 험악하게 통제해 김영삼이 단식한다는 기사가 어디에도 나지 않았죠. 그래도 아예 언급하지 않을 수 없어서 기사가 나기는 했는데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를 보면 처음에는 너무나 애매하게 ‘정치 현안’이라고 하다가 나중에 ‘모 재야인사의 문제’라고 합니다. 그 뒤에야 ‘어느 재야인사의 식사 문제를 놓고 정부 여당이 연석회의를 가졌다’는 표현을 하죠.”

각 신문 1면 머리기사보다 정치사회면 1단 기사가 더 중요한 기사인 날도 많았다. 전두환 정권이 막을 내리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한 박종철 고문사건도 <중앙일보> 2판 사회면에 고작 2단으로 보도되는 정도였다.
 
대한민국 형법이 1953년 제정 이래 1988년 군사독재 이후 전면 개정됐는데, 그 사이 딱 한번 개정된 적이 있다. 국내 언론은 정권이 나서서 굴복시킬 수 있지만 외신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때 생겨난 법이 ‘국가 모독죄’다. 외신 인터뷰를 하면서 유신에 대해 비판할 수 없도록 차단하려 했던 것이다. 억눌려 있던 시민들은 서서히 민주화운동의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다. 한 교수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회상했다. 
 
“그때가 돼서야 언론인도 지식인, 노동자, 학생과 함께 들고 일어나요. 기자들이 그동안 정부에서 내려 준 말도 안 되는 보도자료를 읽고 있으면 심경이 어땠을까요? 모멸감, 참담함, 느껴지지 않았겠어요? 그것이 분출된 거죠.”
 
1992년에는 MBC의 공정방송투쟁에 KBS와 시민들이 가세하면서 언론탄압에 항의하는 집회로 번지는 일이 있었다. MBC 손석희 아나운서가 감옥에 간 것도 이때다. 결국 공정방송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며 파업도 종결됐다. 한 교수는 “’PD수첩’ 같은 탐사보도 프로그램이 언론 민주화의 산물”이라고 했다.  

민주화와 멀어진 몇몇 언론

그는 “언론이 제 몫을 할 때 독재정권이 힘을 잃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언론은 민주주의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감스럽게도 몇몇 신문은 민주화와 점점 멀어져 갔다”고 언론현실을 진단했다. 

“보수/진보가 아니어도 좋아요. 상식적인, 언론인으로서 규범을 지키는 문제는 보수/진보의 입장에서 오는 게 아니잖아요. 그동안 우리나라는 민주화를 이루어 왔어요. 대한민국이 얼마나 민주화됐나? 상고 출신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을 정도로 민주화됐죠. 그러나 그 노무현이 바위에서 뛰어내릴 만큼 민주화되지 않은 곳도 대한민국이죠.”
 
그는 “젊은 언론인이 누구의 목소리가 가장 절실한지, 누가 가장 고통 받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주의가 발전될수록 세상은 살기 좋아져야 하는데, 그 사이 부동산이 뛰고 비정규직이 늘어났죠. 죽어라 일해도 따라갈 수 없게 됐어요. 이 또한 언론인이 다른 사람의 아픔에 울림통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 저널리즘스쿨특강은 <인문교양특강> <사회교양특강> <저널리즘특강> <문사철특강>으로 구성되며, 매 학기 번갈아 개설되고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서울 강의실에서 일반에 공개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거야말로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학기 <문사철특강>은 도종환, 김진석, 한홍구, 이권우, 이주헌, 장승구 선생님이 맡았는데,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를, 강의를 함께 들은 담당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방학 동안 <단비뉴스>가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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