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영화 스태프, 그 꿈과 현실 사이

 

▲  어느 단편 영화 촬영 현장의 스태프들ⓒ 오마이뉴스

영화 촬영 현장에 간다. 멋진 영화배우에 대한 기대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 따위는 없다. 어수선한 현장에서 살갑게 인사를 건네지만, 그보단 몸을 움직여야 한다. "거기, 레일 깔아라." 사수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장비 이동부터 전선 정리까지…. 촬영팀 막내 김민호(가명·28)씨는 날렵하게 움직였다. 

 

김씨는 영화 촬영 스태프다. '영화하면 가난하다'는 말을 수백 번 들었다. 그러나 고향인 전주의 한 대학에서 영화영상을 전공하며 단편영화를 만드는 도중에 카메라의 매력을 알았다.

"촬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시나리오를 더 좋게, 혹은 더 나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영화판으로 갈지 말지를 두고 '상업영화 딱 세 편만 해보고 결정하자'고 마음먹었죠."

 다부진 다짐에도 영화판은 막내 스태프에게 모진 곳이었다. 턱없이 부족한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계약을 벗어날 수 없었다. 대학 졸업과 함께 서울 생활을 시작한 김씨는 짐짓 '꿈을 좇는 청춘'인양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 달 생활비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궁핍한 젊음'이 되어갔다.

10시간 촬영은 기본, 눈 뜨고 24시간도 견딘다

김씨가 본격적으로 영화판에 발을 디딘 것은 2010년 2월이다. 촬영 스태프를 모집하는 광고를 보고 형이 사는 서울로 올라왔다. 동기들 중 20~30%는 전공과 다른 길을 가고, 나머지는 프로덕션 취업, 예술문화 강사로 활동한다. 영화 전공 선배들 가운데도 영화 현장으로 가는 이는 한둘 정도다.

상경 후 바로 시작한 작품은 3개월에 걸쳐 완성됐다. 강원도, 경주, 용인 등 촬영이 있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달려갔다. 10시간 촬영은 기본이다. 눈뜨고 가장 오래 견딘 건 24시간이다. 그렇게 2월부터 5월까지 일해 200만 원을 받았다. 월급으로 치면 70여만 원이 안 된다.

스태프의 평균 영화제작 참여 횟수는 보통 1년에 한두 편이다. 영화 제작기간이 3개월에서 5개월인 점을 감안하면 결코 많은 편이 아니다. 그러나 영화제작 자체가 줄어들고 인력은 넘쳐나고 있어 작품 한 편이 끝난 뒤에 새로운 영화를 만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김씨도 새 작품을 찾지 못해 지난 3개월 일한 200만 원이 고스란히 지난해 연봉이 됐다.

대부분의 연출, 촬영, 조명팀 스태프는 피디와 각각 계약한다. 각 팀은 연차가 가장 오래된 '퍼스트' 조수부터 '세컨드', '서드', '막내'로 이뤄지는데, 퍼스트가 그 팀의 운영과 계약을 책임진다. 지난 영화에서 그의 팀 계약금은 3000만 원이었다. 이 금액은 퍼스트에 의해 등급에 따라 나뉜다. 자칫 자신의 몫만 챙기는 악덕 퍼스트를 만나면 김씨 같은 막내는 무임금으로 고생할 우려가 있다.

장비 하나 깨면, 그날로 영화 그만둘 각오해야

영화판에서 쓸모 있는 것은 오직 '눈치'다. 사수에게 무엇인지 필요한지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그것이 곧 능력이다. 스태프 경력이 쌓이는 것은 눈치가 쓸 만하다는 방증이다. 대신 장비를 나르다 몇 천만 원짜리 렌즈라도 깨는 날에는 영화를 그만둘 각오를 해야 한다. 영화판에서 찍히는 건 한순간이다. 김씨와 함께 짐을 옮기던 사수는 "장비 하나 깨거나 잃어 버리기라도 하면 어딜 가나 그 꼬리표가 따라다닐 거"라고 말했다.

 

▲ 2008년 방송된 방송국 스탭들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한 장면. ⓒ KBS

 

상업영화에서 쓰이는 장비는 김씨가 지금껏 다뤄본 것에 비해 몇 백배씩 비쌌다. 김씨는  자신이 손도 대지 못하는 비싼 장비를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촬영감독을 보며 현장에서 배우는 것이 많다. 김씨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나도 저렇게 카메라를 만져 볼 기회가 생길 거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발가락을 잘라 버리고 싶을 정도로 추울 때"나 "하루 종일 물조차 주지 않아 서러울 때"가 있어도 참는 것은 익히다 보면 기회가 올 거라는 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보다 무서운 건 돈이다. 김씨는 영화촬영이 끝난 지난해 5월, '퍼스트'가 제의한 한 드라마를 함께 하기로 결정했지만 드라마는 방영 날짜와 편성에서 엎어졌다. 결국, 6월에 계획돼 있던 첫 촬영이 11월에 시작됐다. 그나마도 12월 중순부터 1월 5일 현재, 3주를 내리 쉬고 있다. 다행히 드라마는 영화보다 급여가 두 배 가량 높다고 들었지만, 불행히 급여를 받은 적은 없다.

 "언젠가 영화를 관두고 월급 꼬박꼬박 나오는 프로덕션에 들어갈지도 모르죠, 아무래도 돈 문제가 제일 버티기 힘드니까요."

'학벌'아닌 '출신'이 지배하는 그곳, 영화판

영화판에서 '경력'을 쌓는 것은 토익 만점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나 드라마가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다.

"드라마가 미뤄지는데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도 없죠, 이대로 엎어지면 임금은 받을 수 있을까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으니 경력은 그대론데 나이만 먹겠죠…."

기다림에 지쳤다는 그는 "불안해진 미래에 한동안 우울감마저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드라마 촬영이 미뤄지고 있던 그때, 김씨는 전주에 내려갔다. 가구 나르기, 음식점 배달도 마다하지 않았다. 프로덕션에서 부탁하는 홍보영상이나 단편영화를 찍는 친구들을 도우며 드라마 일정을 기다렸다. 모든 일은 포트폴리오를 쌓는 마음으로 작업했다. 김씨가 대학 때부터 작업한 단편영화는 15편에 이른다. 대학 시절, 그는 열정적이고 실력 있는 '촬영감독'이었다.

 

▲ 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촬영장면 ⓒ SBS

 

영화판은 학벌보다 능력이 중요하다. 그러나 '학벌'을 '출신'으로 바꾸면 그 중요성은 새삼 두드러진다. 지난 몇 년 동안 생겨난 각종 아카데미와 대학원 출신들은 함께 작업해온 '동료'와 현장에서도 호흡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원에 입학해 현장에서 만져보지 못한 장비를 다루는 것도 좋지만, 그곳에서 맺는 다양한 인맥은 '촬영감독'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근 영화과 대학원 등록금은 한 학기에 600만~700만 원이다. 김씨는 등록금을 감당할 엄두를 못 냈다.

"유인촌 장관이 처우 개선해줄꺼라 믿었는데..."

요즘 떠도는 말로, 20대를 아우르는 말은 크게 세 단어가 있다. '정규직', '비정규직', '취업 준비생'. 그러나 이것은 20대인 김씨의 소속을 완벽하게 담아내지 못했다. 김씨는 정규직은 고사하고 취업 준비생이라 할 수도 없다. 그는 분명히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은 그나마 사회에서 논의라도 되는 반면, 영화 스태프는 제도권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 제3의 영역이다. 우스갯말마저 그에게 해당되지 않는 듯보였다.

<영화인신문고>에 따르면,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스태프는 임금·고용·근로조건을 보장받지 못하는 등 열악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2009년 12월 현재 스태프 1인당 영화제작 편수는 1년에 1.5편, 평균 연봉은 1020만 원 수준이었다.

전국영화산업노조는 2009년 낸 한 성명서에서 "근로자임에도 최저생계비도 보장받지 못하는 고질적인 저임금 구조와 임금체불 문제가 개선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 성명서에 따르면, 영화노조의 이 같은 주장에 노동부는 "업무형태의 특이성으로 근로자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겨울, 한 20대 조감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지인은 '그가 평소 거듭된 생활고와 앞날에 대한 불안함을 견디기 힘들어 했다'고 전했다. 천만 관객 시대, '박 터진' 돈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김민호씨는 "유인촌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됐을 때, 선배로서 처우를 개선해 줄 거라 믿었다"며 끝내 아쉬움을 토로했다.


*  이 기사는 '오마이 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