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기자들도 눈물 그렁그렁한 채 취재
[김지영 전 경향신문 편집인 방북기] <하>

이튿날 남쪽 출입관리소에 도착해 신상명세가 적힌 인식표를 받았다. 일정을 마칠 때까지 목에 걸고 다니라는 당부였다. 하지만 당숙께서는 인식표를 목에 걸지 않았다. 되돌아올 때까지 2박3일 동안 옆구리에 차고 다니셨다. “군대에서 인식표를 목에 거는 건 한 가지 경우뿐, 포로가 됐을 때이다. 대한민국 장군이 북한에 가면서 인식표를 목에 걸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 60년만에 만난 언니의 머리를 빗겨주는 둘째 고모

첫 단체상봉. 북측 혈육이 입장한다는 장내 방송이 나오자 작은 고모가 일어나 입구 쪽으로 나섰다. 언니를 잃었을 때 나이가 앳되기만 한 15세, 언니 나이는 18세. 이제 각각 75세, 78세 된 노인들이 과연 알아볼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주 달려가 껴안았다. 큰 고모의 얼굴을 모르는 나마저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돌아가신 종조모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60년만의 재회, 그리고 뜨거운 눈물

늙은 자매는 오랫동안 말없이, 말없이 부여잡고 흐느낄 뿐이었다. 이어 큰고모는 사촌오빠들과도 껴안고 60년만의 재회, 그 ‘기쁨과 슬픔’을 나누었다.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묻고, 가족과 고향 소식을 묻고는 흐느끼고, 또 묻고는 부여안고 하였다. 큰 고모는 젊은 시절 간호병과로 군에서도 복무했다고 한다. 남측의 장군과 북측의 여군, 한때 ‘주적’이었던 두 사람은 세상에 더없이 소중한 사촌남매였다.

피차 적인 동시에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혈육,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 때리는 주먹이자 맞는 뺨....... 분단의 비극적 모순이 눈앞에서 실체로 재현됐다. 나로서는 취재기자 시절, 많이 목도하기도 했고 눈시울도 적신 현장이었다. 하지만 이날의 느낌은 나도 전혀 짐작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어른들과 달리 처음에 어색하기만 했다. 주위 친척들이 쓰는 말씨란  경상도 사투리이거나, 서울 말씨 둘 중 하나. 그런데 초면의 고모로부터 함경도 사투리를 듣는 순간 이질감이 ‘확’ 들었고 착잡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내 육신의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무엇인가가 올라와 온 몸을 관통하였다. 그리고 눈물이 흘러 내렸다.

▲ 필자가 준비해 간 파일을 보며 가족과 고향의 모습을 떠올리는 북한 고모, 그리고 이것저것 설명하는 둘째 고모와 숙부

큰 고모는 가까운 친척들의 이름과 나이를 하나도 잊지 않았고, 일일이 그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준비해간 파일을 보여드리자 고향 무섬마을 사진들을 보고는 마을의 어느 구석인지 우리보다도 더 정확하게 짚어냈다. 
  
세월도 갈라놓지 못한 핏줄의 흔적

큰 고모는 전쟁기간 중 북한으로 가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군대에서 전역한 뒤 25세 나이에 한 청년을 만났다. 이 청년은 서울출신으로 연세대 상과를 졸업한, 당시로서는 인텔리겐챠. 그와 결혼해 평양에 살았고, 고모부는 북한 상업성 처장이라는 고위직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1976년 함경도 함주군으로 이주하게 되어 지금까지 살고 있다 했다. 고모부는 10여  년 전 돌아가시고 슬하에 1남 3녀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 둘째 고모의 딸이 난생 처음 만난 이모에게 음식을 먹여드리고 있다

북한 큰 고모는 돌아가신 종조모나 부산 둘째 고모와 성품이나 외모, 모두 흡사했다. 종조모와 둘째 고모, 이 모녀께서는 타고난 성품에 오랜 인격수양으로 주위에서 ‘도인(道人)’이라는 말까지 들어온 분들이다. 벼락이 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침착함에, 당신이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엄살을 피우거나 구차하게 처신하지 않는 의연함이며, 남을 배려하는 아량, 형형한 눈빛을 지녔는데 북한 고모 역시 모두 닮았다.

이번에 함께 상봉했던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북한 고모는 젊었을 당시 모친인 종조모보다 더 흰 피부에 얼굴윤곽이 뚜렷했으며 성격은 좀더 적극적이었다 한다. 그런데 연세가 드니 그 모친과 생김이 매우 흡사해졌다는 것이다.
 
북한 고모는 우리들에게 몇 차례나 “고맙다”고 하셨다. 당신은 맏딸로서 아버지에게 할 도리를 다 못해 늘 죄스러웠다는 것이다. “그랬는데 혈육들 덕분에 아버지의 공적이 평가받고 있음을 알게 되니 여한이 없다”고 하셨다. 개별상봉 때 우리가 준비해간 선물을 드리자 큰 고모도 선물을 한 보따리 내놓았다. “위에서 마련해주신 것”이라면서.   
  

▲ 모든 일정이 끝나고 북측 가족이 탄 버스가 금강산을 떠나는 모습. 모두가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첫 상봉에 이어 만찬 상봉과 개별상봉, 점심상봉과 작별 단체상봉이 외금강호텔과 금강산호텔에서 이어졌다. 그리고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이 왔다. 상봉 이틀 동안 특유의 절제력으로 낮게 흐느끼기만 하던 둘째 고모. 그런 둘째 고모가 떠나는 버스의 창틀을 잡고 처음으로 대성통곡을 하였다. 기자들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취재를 하고 있었다. 

로또 당첨보다 어려운 이산가족 상봉

남측의 이산상봉 신청자 수가 12만 명, 그중 많은 이들이 이미 세상을 뜨고 8만3천명이 ‘로또’ 당첨보다 어려운 상봉 당첨을 기다리고 있다.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많은 상봉가족들은 화를 터뜨리고 있었다. “이런 상봉을 왜 하느냐”는 것이다. 18차 이산가족 상봉 역시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 피살사건 이후 2년 만에 열려 겨우 100가족이 만났을 뿐이다. 귀환버스 속 이산가족들이 터뜨린 화는 이런 메시지였을 것이다.

 “서신교환과 상호방문은 둘째 치고, 상설면회소 설치와 상봉 정례화, 수시 상봉은 속히 실행해 이산가족의 한을 풀고 통일을 앞당겨라. 그러기위해 남북 모두 정치를 잘하라.” 
  
나는 귀경한 뒤 예전의 일상생활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많았다. 그 며칠 사이에 이산의 한을 풀었고 가족사의 빈칸이 채워졌다. 생전 처음 뵈었던 북한 고모의 얼굴이 수시로 눈앞에 삼삼하고 그저 다시 뵙고 싶은 마음뿐이다. 또 있다. 북한 고모의 경제적 형편이 어떤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으나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반듯한 기품을 지니셨음을 알게 돼 적이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상봉의 감격도 잠시, 북한의 연평도 포격사건이 터졌다. 우여곡절 끝에 이산가족 상봉 한번 하고 남북관계는 다시 얼어붙었다. 유리그릇처럼 예민하고 깨지기 쉬운 관계, 벼랑위의 대화, 위기의 일상화, 그 모든 남북관계의 특성을 새삼 확인하면서 자문해본다.

 “남북관계는 과연 진전하는 것인가?”

지난 25년간 남북간에는, 남북을 둘러싼 국제관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변화의 조짐 없이 여전히 고착적인 부분도 많다. 이 때문에 오히려 희망의 크기로만 본다면 25년 전 1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및 예술공연단 행사 당시보다 더 작아진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다시 자답한다.

“그러나 결코 희망의 타겟을 치워선 안 된다. 그리되면 희망의 싹도 트지 않으며 열매도 없다. 타겟은 굳건하게 세워놓고 당면 현안을 면밀하게 해결해야 한다.”

 


김지영 (신문윤리위원/ 전 경향신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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