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서 무대에 오른 느낌...25년 전 현장 기억도 새록
[김지영 전 경향신문 편집인 방북기]<상>

살다보면 갑(甲)이 을(乙)로, 을이 갑으로 뒤바뀌는 일이 생긴다. 처지가 정반대로 달라지는 경우다. 이렇게 되면, 대개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나’라는 세상의 중심에서 벗어나 ‘너’라는 세상의 반대편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바로 최근 내가 그랬다.
   
나는 신문기자 시절 한동안 남북관계를 전담했다. 1985년 제1차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공연을 비롯해 여러 차례 이산가족 상봉과 남북회담을 취재하고 이산가족의 슬픔, 분단의 비극을 기사로 작성하였다. 30년 가까운 기자 생활동안 이산가족의 슬픔은 나에게 뼈아픈 동족의 문제였다. 하지만 나 자신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들은 평생 나에게 ‘취재대상’이었다.
 
그런데 제 18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지난 10월말~ 11월 초)를 앞두고 당국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전쟁 기간 중 행방불명되었던 큰 고모가 북한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쪽 혈육들을 만나겠다고 신청해 서로 만나게 됐다는 전갈이었다.         
  
‘나’라고? 한동안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런 경우, 세속적 의미로 말하는 갑(시혜자)과 을(수혜자)의 관계 전환에 해당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완전한 ‘역지사지(易地思之)’였다. 객석의 관객이 무대 위로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정말이지 처음에는 너무 놀랐다. 인생무대에서 역할이 뒤바뀐 나는 물론이지만, 고향(경북 영주시 문수면 무섬마을)이나 서울에서 큰 고모와 함께 자라고, 지냈던 집안 어른들은 나와 또 다른 차원에서 그 충격이 컸다. 그동안 남북 이산가족 상봉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으레 남의 일로만 여겼는데........

생필품 위주의 선물과 가족사를 담은 파일 준비

 큰 고모(김은숙·78)는 원래 나에게 종고모(5촌)다. 넷째 할아버지의 세 따님 중 맏이다. 그런데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종조부께서 돌아가시자 집안에서는 아들이 없는 종조부의 제사를 모시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때 선친이 선택되었다. 호적법상 ‘사후 입양’은 불가능하므로 사문서인 족보상 숙부의 ‘자(子)’로 편입된 것이다.

▲ 필자가 난생 처음으로 만난 북한고모

 자연히 북한 고모를 만나러가는 5명의 친척을 구성할 때 족보상 친 조카뻘인 내가 포함됐다. 우선적으로는 북한 큰고모의 생존 동생인 둘째 고모(김혜숙·75)였다. 그리고 그 딸(정경아·50), 큰 고모의 사촌오빠들인 숙부(김제균·84)와 당숙(김운한·88)으로 정했다. 
  
유선과 모임을 통해 회의가 열렸다. “무얼 준비해야 하나......” 둘째고모가 생필품위주로 언니에게 드릴 선물을 이민가방 하나에 담아 준비했다. 그리고 몇몇 집에서 선물을 보탰다. 함께 돈도 약간 마련했다.

거기에 더해 나는 60년 집안 역사를 일별할 수 있는 파일 한권을 만들었다. 우선 큰고모의 선친, 그러니까 나의 종조부와 관련한 기록물들이다. 종조부께서는 일제시기에 통산 6년 반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전 생애를 항일투쟁에 몸 바친 영주(榮州) 항일 지도자중 한 분.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고문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뒤늦게 김영삼 정부 때 건국훈장을 추서받았으며 유해는 고향 선산에서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했다. 대전국립 현충원에 있는 산소 사진부터 종조부의 생애와 업적에 관련된 사진들, 신문·잡지·문서 기록물, 집안 친척들 사진, 고향 무섬마을과 큰집 해우당의 이모저모 사진과 기사들, 간추린 족보 등등....... 파일은 제법 두꺼웠다. 

한때 전쟁터였던, 너무도 아름다운 산천    
 
일단 속초 한화리조트로 집결하라는 전갈이었다. 거기에서 금강산으로 월북, 상봉한다는 일정이다. 숙부는 수원에서, 둘째고모와 그 딸은 부산에서, 나와 당숙은 서울에서 각각 출발했다. 나는 속초로 가는 몇 시간 동안 난생처음으로 당숙과 단둘이 여행을 하게 되었다. 당숙은 예비역 육군 소장. 바로 우리가 버스로 달리는 경춘 고속도로 부근 곳곳에서 전쟁 기간 중 포병장교로서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그 중 춘천전투는 6·25 전쟁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전투로 기록돼있다.

“바로 저기에서 홍천 말고개 전투를......” “저 위쪽은......” 퇴역 노장군은 차창 밖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60년 전 목숨을 걸었던 전쟁터를 떠올렸다. 하지만 참혹했던 그 전쟁터들은 지금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가을 하늘은 공활하고 구름 한 점 없었으며’ 밝은 햇살 아래로 펼쳐지는 만추의 산하는 찬란하기만 했다. 미수(米壽)를 넘어가는 연세 때문일까. 당숙은 만나면 주로 무용담을 과시하시던 과거와는 달랐다. 대신 창밖을 응시하며 “이 아름다운 산천에서......”라는 혼잣말을 되뇌었다.  
 
설악산 한화리조트에 도착하자마자 기자들이 에워싸고 속사포처럼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기자가 저런 모습이구나......” 나는 평생 처음 기자로부터 취재를 당해보았다. 
 
내가 이산가족 상봉을 취재하던 1985년으로부터 어느덧 25년. 그 기간 중 남북관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동시에 변하지 않은 점도 많다. 남북관계 취재 및 보도 과정도 마찬가지로 변한 게 있고 변치 않은 게 있다.

80년대 후반엔 경제, 체육 등 남북회담 빈번

변치 않은 것부터 보자. 이번처럼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열리면 그때나 지금이나 우선 프레스센터가 설치된다. 기자들의 거점은 프레스 센터. 여기에서 국내기자들은 미리 회의를 열어 소속사와 상관없이 각자 행사장 안팎에서 열리는 행사일정 취재를 분담한다. 그리고 취재를 하게 되면 기사를 작성해 프레스센터로 송고한다.
 

▲ 앞줄 왼쪽부터 북한고모의 사촌 오빠인 필자의 당숙, 북한고모, 둘째고모, 또 다른 사촌 오빠인 필자의 숙부, 뒷줄은 둘째고모의 딸과 필자

취재에 참여한 언론사는 물론, 남북관계를 담당하는 통일부 출입기자라면  풀(공동취재)단에 참여하지 못했더라도 누구나 이 풀 기사를 이용할 수 있다. 대개는 스트레이트 기사와 스케치 기사다. 각 사 기자들은 프레스 센터에서 이 기사를 소속사로 재송고한다. 
  
해설기사는 ‘풀’이 거의 없다. 대개 각 언론사 지면 사정과 제작 노선에 따라 각 언론사 기자가 별도로 작성, 보도한다. 통일부에 출입기자를 내보지 않는 언론사, 가령 서울에서 먼 지방 언론사 경우라도 풀 기사를 게재하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통신사(연합뉴스나 뉴시스 등)들이 이 풀 기사를 전국 회원사들에게 전면적으로 송고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풀 기사의 크레딧은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이름이 아니라 ‘남북이산가족 상봉 공동취재단’ 또는 ‘공동취재단’으로 나간다.  
  
1985년부터 한동안은 이산가족 상봉행사뿐 아니라 판문점에서 여러 가지 회담이 열렸다. 남북 정치회담·경제회담·군사회담·체육회담 등....... 이 때문에 남북관계 담당기자들은 판문점에 자주 출입했다. 지금은 금강산에서도 남북관계 행사가 열리고 개성에서도 회담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는 공개적 남북 회담은 판문점에서, 이산가족 상봉이나 예술공연단 교환공연은 서로 남북 상대측 지역을 방문하는 방식이었다.

판문점에서 회담이 열리면 기자들은 회담이 열리는 회담건물 옆 벤치 같은 곳에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남측 기자들과 북측 기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런 저런 한담을 나눈다. 그러다보면 서로 안면이 익숙해지고 인간적으로 친해지기도 한다.

내가 이사한 것 까지 꿰고 있던 북한기자

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및 공연예술단 교환 공연 때의 일. 프레스 센터는 워커힐 호텔에 설치됐다. 또 많은 행사가 호텔 그랜드 볼룸이나 식당, 공연장 등에서 진행됐다. 당시 나의 소속사 주필과 북한 취재단장이 만찬장의 같은 테이블에 합석을 하게 되었다. 나는 만찬 담당 풀 기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대규모 인원이 참석한 만찬이므로 취재할 뒷얘기거리도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맡은 일의 ‘풀’ 책임을 마치고 만찬이 막 끝난 그랜드불룸 앞으로 갔는데 마침 북한 취재단장과 맞닥뜨렸다.

그와는 평소 판문점에서 자주 보는 사이. 그런데 나에게 이렇게 생색을 내는 것이었다.

“내가 당신네 주필에게 당신 칭찬을 많이 했지!” 
 “........??” 
 
공안바람이 드세던 그 시절, 북한 취재단장이 나를 칭찬했다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기분이 묘했다.   
 
남북 기자들은 비록 이렇게 편하게 대화를 한다 해도 피차 속마음으로는 긴장감을 깔고 있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수시로 상대편의 간을 건드리는 말, 뼈있는 농담들이 비수처럼 날아다닌다. 그 당시, 나는 이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사한 직후 판문점에서 또 회담이 열렸고 나는 회담이 끝날 때를 기다리며 북측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북측 기자 왈 “김 선생, 이사 잘 하셨소? 새로 이사 간 00동은 어떻습네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찔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이 사람들이 기자라기보다는 실상 당국자나 기관원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 60년 만에 만난 북한의 언니와 남한의 동생이 서로를 부여잡고 쌓인 사연들을 나누고 있다

남측은 각 언론사 사정에 따라 남북관계 담당기자도 수시로 바뀔 수 있다. 하지만 북측 기자들은 한번 남북관계를 맡으면 좀처럼 바뀌질 않았다. 말하자면 ‘전문기자’인 셈인데 그들은 남측 기자들의 신상과 동태를 샅샅이 꿰고 있었다. 기자들에게는 만국공통의 모습과 행태가 있다. 하지만 남북은 이처럼 같은 기자 세계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다른 점도 많았다.
  
판문점 회담이 끝나고 우리 측 브리핑을 듣고 나면, 기자들은 미리 각자 맡은 대로 기사를 작성해 서울 삼청동의 남북대화사무국으로 송고한다. 판문점에서 남북대화사무국으로 연결된 전화선의 수는 한계가 있으므로 풀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도 소수로  압축해야한다. 남북대화사무국에는 각 언론사에서 파견된 ‘캐쳐(포수)’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각자 풀 기사를 소속사로 재송고한다.

풀 기사는 그 전체 양이 모든 매체에 다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각 언론매체는 풀 기사를 그날의 지면형편, 또는 방송시간 형편에 따라 취사선택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이산가족 상봉 기사나 남북회담 기사가 보도된 뒤 다시 남북회담 취재차 판문점에 나가면 북측 기자들이 꼭 시비를 거는 대목이 있다. 그들은 남측 기사가 어떻게 나갔으며 어떤 신문에서 어떻게 다루었는지 훤하게 알고 있었다.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는 으레 남북 가족과 행사 관계자들이 단체로 오찬, 만찬을 하게 된다. 이럴 때 남측 언론의 스케치 기사에는 “북측 가족들이 식탁의 음식을 순식간에 해치우고.......”라는 대목이 단골로 등장했다. 또는 회담에서 북측이 내세운 주장은 으레 ‘생떼’ 나 ‘억지’로 표현하곤 했다. 풀 기사이다보니 담당 기자가 이런 식으로 작성하면 대개 모든 신문·방송·통신도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남북 체제경쟁이 극심할 때였다. 이 같은 정치 상황 속에서 북측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남측도 정권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은 우리의 남북관련 보도에서 이런 표현은 찾아보기 어렵다. 25년 전보다 훨씬 성숙해졌다. 

남북 행사 때는 이렇듯 취재 및 보도가 풀 제로 운영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미 언급한대로, 해설 기사는 각 언론사가 독립적으로 취재·보도한다. 또 아무리 풀 제라고 하더라도 기자들의 ‘특종’ 본능은 결코 쉬지 않는다. 자기가 맡은 ‘풀’ 책임을 다해놓고는 호시탐탐 특종 먹잇감을 찾는다. 그리고 먹잇감을 잡았다하면 단단히 챙겨 소속사로만 송고한다. 

▲ 금강산 숙소에서 북한고모와 필자
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및 예술 공연 교환 때의 일이다. 북측 참가자들은 워커힐호텔 내 각자 숙소에서 짐을 꾸려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의 사진담당 동료기자가 요리사 복장으로 변장을 하고 삼엄하게 통제된 북측 숙소로 잠입했다. 그리고는 북측 참가자들로부터 “OO신문 독자 여러분, 반갑습니다.......안녕히 계십시오, 다시 만납시다.”하는 내용의 글과 함께 싸인을 받아냈다. 그날 이 글과 싸인이 나의 소속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난 것을 보고 타사기자들이 경악했음은 물론이다. 또 그들은 소속사 데스크로부터 혼이 나갈 정도로 질책을 받았고........                
   
속초 한화 콘도에 도착한 첫 날, 짐을 풀고 일정에 관한 설명을 들은 뒤 저녁식사를 마쳤다. 살펴보니 속초의 한화 콘도 안에도 프레스 센터가 설치돼있었다. ‘상봉행사는 내일부터 주로 북한의 외금강 호텔주변에서 진행될 것이므로 외금강 호텔에도 프레스 센터가 마련돼 있으리라....... 그리고 남북전화 회선이 제한적일 것이므로 역시 풀 기사를 서울의 남북대화사무국으로 송고하면 캐쳐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풀 기사를 소속사로 재송고 하겠지.......’ 옛날 생각을 하면서 현장의 기자에게 물어보니 역시 그대로였다. 

속초 한화 콘도 숙소에 든 뒤 숙부께서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다소 비장한 표정으로 당숙과 고모께 나누어 드렸다. 우황청심환이었다. “내일 상봉하기 전 이걸 한 알씩 복용합시다.” 어른들은 이날 밤, 한 많은 60년 세월을 이야기하느라 늦도록 주무시지 못했다.

<하편이 11일 이어집니다.>


김지영 (신문윤리위원/ 전 경향신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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