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값 인상, 재개발에 쫓겨...그래서 남 같지 않았던 ‘움막 아줌마’
[가난한 한국인의 5대 불안 2부] 철거민 취재후기

 집, 아니 한 칸의 방은 내게 늘 해결하기 어려운 숙제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움과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이 공기처럼 감도는 공간이었다. 대학 진학과 함께 객지 생활을 시작한 나는 짐짓 ‘독립한 청춘’인양 보이려 했지만, 실제론 월세 30만 원에 벌벌 떨며 내일을 걱정하는 ‘궁핍한 젊음’일 뿐이었다. 
 
내가 그들을 찾은 이유

서울 생활, 아니 정확히는 서울 근교생활을 시작한 2003년부터 6년 간 10번을 이사했다. 집은 사는 곳이 아닌 임시 대피소였다. 경기도 부천시 역곡동 주택의 방 한 칸을 월세 20만 원에 빌렸을 때 나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존재’여야 했다. 샤워 후 목욕탕에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남겨선 큰 일 나는 것이었고, 휴지를 쓴 후엔 맨 끝 부분을 삼각형으로 접어두어야 했다. 잠깐 부엌을 빌려 쓴 뒤엔 ‘사용한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할 것’이라는 메모지가 방문에 붙어있기도 했다.

부근 심곡본동의 다세대 주택에 살 땐 천장 위로 쥐가 돌아다니는 소리에 밤잠을 설쳤다. 보증금 100만원, 월세 15만원의 싼 방을 또 구하기가 어려워 꾹 참았지만, 자다가도 금방 천장이 뚫려 쥐들이 우르르 쏟아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서울 궁동의 보증금 200만 원, 월세 15만 원짜리 옥탑방은 불법증축된 구조물이라 주민등록 신고를 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학교에서 가깝고, 싸고, 천장의 쥐 떼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머무를 이유가 됐다. 불법 구조물에는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았다. 배달해 주는 액화석유가스(LPG)를 겨우내 쓰는 건 고단한 일이었다. 밤새 LPG 통이 얼어 보일러가 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전기포트에 물을 끓인 뒤 LPG 통에 부어 가스를 녹였다. 그러면 가스렌지가 켜지고 따뜻한 물이 나왔다. 그러나 컨테이너 박스를 대강 세워둔 꼴인 옥탑방에 좀처럼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사정이 조금 나은 서울 개봉동 친구네 옥탑방에서 6개월, 혜화동 주택의 친구 방에서 몇 달 살았다. 혜화동에선 창문 틈으로 어떤 남자가 늘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겁에 질렸다. 여자들만 산다는 인터넷 광고를 보고 찾아들어간 신림동의 지하방은 대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깜깜한 암흑이었다. 노고산동의 반지하방에선 옆집 남자와 낯선 여자의 신음소리를 일상적으로 들어야 했다. 그런 곳들조차도 진득하니 오래 살 수가 없었다. 재개발 재건축 때문에, 월세가 올라서, 집주인이 바뀌어서, 함께 지내던 친구가 유학을 떠나서, 나는 또 짐을 싸야만 했다.

주거 빈민들을 취재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그것이 바로 내 이야기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넓고 쾌적한 아파트, 밝고 따뜻한 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주거 난민들’이 이렇게 같은 하늘아래 있다는 것을, 그들이 힘없이 신음하고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것을 전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모두가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며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대안을 찾아보고 싶었다. 

재개발이 앗아간 소박한 행복 

경기도 성남시 판교 재개발 과정에서 쫓겨나온 김씨 아주머니의 ‘움막’ 안에는 철 지난 옷가지를 싼 보따리 서너 개와 노란 플라스틱 바구니 속 잡다한 물건들이 살림살이의 전부였다. 옆집 할머니까지 놀러와 셋이 둘러앉으니 몸을 비틀기도 불편했다. 아주머니는 그 좁은 데서도 버너에 물을 끓이고, 봉지커피를 타서 과일과 함께 내놨다. 아주머니의 첫 마디는 이것이었다. “이제 다 끝났어.”

▲ 북아현동 철거민들이 버리고 간 가구들  ⓒ 송지혜
남편 없이 아이 둘과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판교의 비닐하우스를 빌려 소파공장을 했던 아주머니는 재개발 불도저에 밀려 공장도 월세 집도 다 포기하고 빈손으로 쫓겨 나왔다. 아이들도 뿔뿔이 떠나고, 건강도 나빠진 상태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있었다.   

밤 8시쯤 시작된 첫 인터뷰는 11시를 넘겨 끝났다. 아주머니는 내게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다. 스물여섯이라고 하자 “결혼할 때가 다 됐다”며, “남자들은 이런 일 하는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나 같은 사람 만나러 다니지 말고 취직해서 돈 벌라”고 충고했다. 버스를 타러 나오는 길에 왈칵 눈물이 났다. ‘나 같은 사람’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한 아주머니도 한 때는 아이들과 행복한 내일을 꿈꾸며 열심히 일했던 ‘소파 공장 사장님’이었다. 판교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섰는데, 누군가는 재개발로 떼돈을 벌었다는데, 아주머니와 다른 세입자들은 왜 저런 신세가 돼야만 했을까? 

며칠 뒤, 무작정 서울의 뉴타운 개발 지역들을 찾아갔다. 이미 월계, 길음 뉴타운 지정구역의 집들은 거의 비워져 있었다. 담벼락이나 대문마다 시뻘건 페인트로 뜻 모를 숫자들이 휘갈겨져 있었다. 전봇대 마다 빈틈을 찾기 어려울 만큼 이삿짐센터 전화번호 광고들이 나붙었다. 길거리엔 버려진 가구들이 나뒹굴었다. 노원, 당고개 뉴타운에는 대기업 건설사들의 ‘주택재개발정비사업 축하’ 플래카드가 나부꼈다.

▲ 재개발 지역에서 항상 볼 수 있던 이사짐 센터 광고 ⓒ 송지혜
재건축 플래카드는 내게 아주 익숙한, ‘퇴거 명령증’ 같은 것이었다. 부천시 심곡본동의 다세대 주택, 서울 개봉동의 옥탑방, 염리동의 주택에서 재건축을 이유로 6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쫓겨났고, 1년 전까지 지냈던 노고산동에서도 재건축이 추진되고 있다. 

특히 부천의 다세대주택을 잊을 수 없다. 천장에서 쥐가 몰려다니는 소리에 시달려야 했던 바로 그 방에서 ‘재건축이 결정됐으니 나가달라’는 통지를 받았다. 이주비로 30만원이 나왔다. 옆 동네에서 방을 얻으려했더니 귀신같이 방값이 올라있었다. 철거민 세입자들이 몰렸기 때문이다. 이미 두 번씩 버스를 갈아타고 학교를 다니던 형편에 더 멀리 나갈 순 없고, 눈앞이 캄캄했던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

첫 만남 후 6개월 만인 11월 초 다시 찾아간 김씨 아주머니는 다행히 성남시의 배려로 연립주택의 반지하층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었다. 친척집으로, 친구 집으로 흩어져 어렵게 살던 아들과 딸도 불러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아주머니의 건강은 물론 우울증에 시달리던 아들도 많이 회복됐고, 일거리를 찾아 다시 일어설 생각으로 생기가 돌았다. 움막에서 ‘다 끝났다’고 하던 표정이 떠올랐다. 진작 이렇게 손바닥만한 임대주택이라도 내 주었다면 식어가는 물병을 끌어안고 엄동설한을 버텼던 그 처절한 5년은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누구를 위한 재개발인가 

 ▲ 상계동 재개발 지구 사이로희미하게 보이는 아파트 단지ⓒ 송지혜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곳곳에서 재개발 공사가 진행되고 있고, 쥐꼬리만한 주거이전비로는 살 곳을 마련하지 못해 헤매는 세입자들이 있다. 김씨 아주머니는 성남시의 ‘인도적 조치’로 거처를 얻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버려진 움막으로 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명지대학교 부동산대학원 백준 교수는 “재개발 사업을 할 때 시행조건으로 구청장 등이 나서서 세입자 대책을 요구하고, 인근 미분양아파트에 입주시키거나 공공용지에 임대주택을 확보해 거처를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흑석 뉴타운의 경우 재개발조합장이 서울지역에 비어 있는 임대아파트를 모두 찾아내 조합원 1천여 명과 세입자 7백여 명이 아파트가 지어지는 동안 살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저소득층을 위한 공공임대주택이 대폭 늘어나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공공임대주택이 전체 가구의 3% 정도에 불과한데, 최소 10%로 늘려 빈곤가구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살 곳을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종대 부동산학과 김수현 교수는 "공공임대 주택을 많이 짓는 것이야 말로 주거복지 정책인 동시에 주택경기가 바닥에 있을 때 가장 효과적인 경기부양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누구를 위한 재개발인가’를 제대로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땅주인과 건설업체는 큰 돈을 벌지만, 세입자 등 원주민들은 대부분 더 불편하고 누추한 변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지금까지의 재개발이었다. 불충분한 보상을 납득할 수 없어 저항하던 철거민이 경찰 진압에 목숨을 잃는 ‘용산 참사’까지 빚어낸 게 이 땅의 재개발이었다. 개발 이익의 일부를 걷어 원주민들에게 정당하게 보상하는 제도가 자리 잡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또 한을 안고 움막으로, 누군가는 또 화염병을 들고 옥상으로 갈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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