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박준용 기자

▲ 박준용 기자
지난 2월의 어느 날 나는 한 상가(喪家)에서 닫혀있는 유족 회의실 벽에 귀를 대고 있었다. 경주 마우나리조트 참사의 피해자 빈소였다. 회의실 안에서는 유족과 리조트 관계자들이 보상금 문제를 협의 중이었다. 금액이 어떻게 결정될지 궁금해 하던 기자들은 매미떼처럼 벽에 들러붙었다. 처음 한두 명이 벽에 귀를 대기 시작하자 다른 기자들도 지지 않으려고, 혹은 회사 데스크(간부)에게 혼나지 않으려고 벽에 귀를 댔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미국 언론인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이 쓴 <저널리즘의 기본원칙(The Elements of Journalism)>을 읽다가 기자들이 상가를 들쑤셨던 그 때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책에서 제시한 저널리즘의 열 가지 원칙 중 두 번째, ‘저널리즘이 가장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은 시민들’이라는 대목에서다.

경주 마우나리조트 참사는 부산외국어대학교 학생들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하던 중 리조트의 강당이 지붕에 쌓인 눈의 무게를 못 이기고 무너지면서 일어났다. 학생 9명과 이벤트업체 직원 1명이 사망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했다. 사망자 10명 중 1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외상없이 저체온증으로 숨졌다.

이 참담한 비보를 받아들이기조차 어려웠을 유족들에게 당시의 선정적인 보도는 어떻게 비쳐졌을까. 사고 현장의 저널리즘은 그 순간 가장 충성을 바쳐야할 대상에게 패악을 저지르고 있었다. 현장에서 유족들은 보상금 문제를 집중적으로 보도한 기사, 유족의 표정 등을 과장해서 자극적으로 보도한 기사를 보고 해당 기자 이름을 부르며 의자를 집어던지기도 했다. ‘상갓집 개들’이라는 욕설도 나왔다.

현장에서 만난 한 기자는 당시 보도에 대해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은 피해자 유족이 아닌 그 사실을 알고 싶어 하는 시민들”이라며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보상’이라는 민감하고도 내밀한 문제를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보도가 다수 시민들의 ‘알 권리’를 위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빌 코바치는 “시민들도 뉴스에 대해 권리와 책임을 가진다”고 말했다. 시민들이 뉴스의 취재원이 될 수도 있지만 사생활 등 자신의 어떤 측면이 보도되지 않기를 요구할 권리도 있다. 공익을 위해 꼭 필요한 정보라고 보기 어려운 개인 보상금 문제를 엿들어서라도 쓰겠다는 것은 시민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는 폭력이 아니었을까.

돌아보면 마우나리조트 사건 당시 기자들의 태도는 세월호 참사 때 언론이 보인 행태의 예고편이었다. 세월호 참사 보도를 보며 시민들은 분노했다. 스포츠 중계하듯 경쟁적으로 구조자, 사망자, 실종자 숫자를 보도하면서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지 않아 무더기 오보를 했다. 충격과 비탄에 빠진 피해자 가족을 배려하지 않는 보도도 많았다. 지난 4월 22일 조선일보의 경우 1면에 유가족의 초근접 사진을 내걸어 초상권 등 인권 침해 소지가 크다는 지적을 받았다. 경향, 한겨레 등도 감성적인 부분에 집중해 ‘아수라장’ 등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가까스로 구조된 학생에게 친구의 죽음에 대해 묻거나, 희생자의 학교에 찾아가 책상 서랍을 마구 뒤진 기자도 있었다.

'클릭'에 목숨 거는 언론

시민들의 질타가 쏟아지자 기자협회가 ‘세월호 보도 매뉴얼’을 내는 등 자성의 움직임을 보였지만 ‘기레기(기자+쓰레기)’라고 불릴 정도였던 취재 현장의 행태는 금방 달라지지 않았다. 시민에게 충성해야 할 언론이 오히려 시민의 지탄을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자극적이고 인권침해적인 보도는 기자 개개인의 윤리의식 결여에도 원인이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미디어산업의 생존경쟁과 깊은 관계가 있다. 무엇보다 기업이 언론에 주는 광고의 평가 기준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신문의 유가부수 판매량이나 인지도에 따라 가중치가 있었다면 이제는 온라인 사이트의 ‘클릭’이 평가를 크게 좌우한다. 해당 기사 혹은 매체 사이트에 얼마나 많은 클릭수가 몰리는지, 즉 ‘트래픽(교통량)’이 얼마나 많은지에 따라 광고가치가 달라진다. 온라인 업계는 매주 트래픽 순위를 집계하고 광고주는 해당 매체의 광고가치를 이에 따라 판단한다. 그래서 종이신문도, 온라인전문매체도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한 ‘클릭’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를 쓰고, 이 과정에서 ‘클릭을 부를 만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들을 양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클릭을 부르기 위한 선정성 경쟁은 온라인 시대 미디어의 숙명일까. 빌 코바치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책에서 “선정적이지 않은, (방송의 경우) 60초가 넘는 기사들이, 낮은 질의 뉴스보다 더욱 높은 시청률과 시청자 충성도를 얻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세계 언론의 역사를 근거로 “뉴스가치에 투자한 언론사들이 결국 살아남았다”고 강조했다. 코바치의 말대로 미국의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영국의 가디언, 프랑스의 르몽드 등 ‘진지하고 믿을 만한 보도’에 공을 들인 언론들은 오랜 세월 수많은 풍파와 위기를 견디고 일류언론으로 살아남았다. 국내에서도 수많은 매체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공들인 탐사보도와 신뢰할 만한 심층보도로 명성을 쌓아나가는 매체와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신생 대안매체에 몰리는 자발적 후원과 한국방송(KBS)의 공정보도 투쟁 등에 쏠리는 응원을 보면 말초적 흥미를 자극하는 싸구려 기사 대신 ‘제대로 된 뉴스’를 보고 싶다는 시민의 갈증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다.

'시민에 대한 충성'이 신문방송 살 길

빌 코바치는 ‘살아남은 언론사’의 공통점을 강조했다. 일류 언론들은 자신들이 지향하는 목표, 즉 저널리즘의 가치와 기준을 조직 내에서 모든 임직원이 공유할 뿐 아니라 독자 시청자 등 시민들에게도 분명하게 알린다. 그래서 자사의 언론인들이 어떤 행동강령 하에 움직이는지 시민들이 알 수 있게 하고 이를 토대로 시민들이 뉴스조직과 언론인들에게 책임 준수를 요구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르몽드를 창간한 위베르 뵈브메리가 강조한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과 같은 대원칙이 언론사와 독자가 공유하는 가치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빌 코바치도 급변하는 세계 언론환경을 돌아보며 “저널리즘은 21세기에도 3세기 반 전에 확립됐던 그 목적을 유지할 수 있는가”라고 자문했다. 더욱 빨라지는 미디어산업의 변화, 더욱 치열해지는 수익성 경쟁을 생각하면 만만치 않은 과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확고하다. 충성의 대상으로서 ‘시민’을 되찾아야 언론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섬겨야 할 ‘시민’ 대신 ‘광고’를 의식하느라 ‘상갓집 개’로 추락한 우리 기자들이 엄중하게 되새겨야 할 말이다.

박준용 / 아시아경제 스포츠레저부 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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